기공술사 88화
순식간에 의각원이 소란스러워졌다.
“오오! 가주님이다!”
모두 하던 일들을 멈추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주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추연, 추담 남매가 버선발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쇼!”
여전히 덩치가 좋은 춘석도 뛰어와 천애랑을 반겼다.
천애랑이 원생들의 환대를 받느라 발이 묶여 있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왔느냐.”
천애랑이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의각원의 원주이자 마 의원으로 불리는 마충이 푸근한 미소로 서있었다.
원생들은 소란 속에서도 천애랑과 마충이 만날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잘 지내셨죠?”
천애랑은 마충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앙상해져 있었다.
그 기색을 읽은 마충은 걱정 말라는 웃음을 띠었다.
마충은 천애랑에게 있어서 천단호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직접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마충은 천애랑에게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런 마충의 몸이 조금이라도 수척해진 것을 본 천애랑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천애랑이 계속 걱정할 기색을 보이자 마충은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먹으면 자연스레 몸도 늙는 것이지. 별거 아닌 일이다.”
마충의 말에서 초연함이 느껴졌다.
단호한 마충의 말에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두를 돌렸다.
“소걸이는요?”
“진법 안에 있다. 덜해지지도 더해지지도 않는 그대로란다. 담 가주와 하오문주의 적극적인 지원이 큰 도움이 되고 있어. 특히 하오문주가 보낸 영약들의 양이 엄청나다 보니 몇 년이고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다.”
천애랑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담 가주는 물론 종횡무진 움직이는 하오문주의 공로가 고마웠다.
특히 하오문주의 경우엔 소걸이가 그의 딸이기에 그런 노력들이 당연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거였다.
“가주님…….”
그때 허겁지겁 뛰어왔는지 다소 산발된 머리와 상기된 얼굴의 화란이 숨을 고르며 다가왔다.
“잘 지냈어?”
천애랑은 화란의 건강한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새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기운이 충만한 게 느껴졌다.
그리고 훈련과 그에 따른 건강 덕분인지 피부와 혈색이 좋아져 미모가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화란은 천애랑의 미소를 보자마자 갑자기 뛰어가 와락 안기었다.
천애랑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팔을 벌렸다.
주변 원생들이 모두 입을 틀어막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시선을 모으는 게 보였다.
옆에 있던 마충은 그저 ‘허허허’ 웃고만 있었다.
천애랑은 자신의 품이 화란의 훌쩍임에 따라 점점 촉촉해지는 게 느껴졌다.
천애랑의 놀란 마음이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그간 걱정을 많이 했던가.’
천애랑은 화란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하지만 얼굴은 멋쩍은 상태 그대로였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화란이 코를 훌쩍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갑자기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뽀얀 피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간 안녕하셔서 다행입니다.”
화란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래. 화란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다른 모두도 마찬가지고.”
천애랑은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들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과 관련해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 원생들이 몇몇 보였다.
천애랑은 피식 웃고선 마충을 봤다.
“소걸이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데요.”
마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이다. 앞장서마.”
마충의 뒤를 따라 천애랑과 화란만 따라갔고 다른 원생들은 각자의 일을 하러 흩어졌다.
“진법이 더 보강된 것 같네요?”
진법이 설치된 곳에 도착하니 크고 단단한 주술석들이 추가된 게 보였다.
마충은 천애랑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담가에서 신경을 많이 써줬다. 평소 교류가 있다던 제갈세가에 특별히 부탁했다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천금으로도 구하기 힘든 최상급 주술석들이다.”
천애랑은 당장 급한 일이 일단락되면 담가를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담가의 성의들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마충이 말을 이었다.
“덕분에 진법의 내구성과 안정성을 확고히 가져갈 수 있게 됐단다. 바로 들어가자꾸나.”
진법에 몸을 들이미는 마충의 신형이 일렁이며 사라졌다.
천애랑과 화란도 주저하지 않고 진법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우웅---
인위적으로 일그러뜨린 공간 특유의 어지럼증이 스쳐갔다.
‘대단한데?’
진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천애랑조차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진법은 고밀도의 기를 품고 있었다.
주술석 덕분인지 진법 자체가 환골탈태를 한 수준이었다.
진법 내부 또한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아늑한 느낌을 주던 초옥은 그대로 있었지만 이곳저곳엔 그보다 좋은 건물 몇 개가 추가되어 있었다.
“하오문주가 사람을 보내 지은 것이다. 환자를 치료할 공간과 약제를 보관하고 다룰 공간, 식량을 보관할 창고, 그리고 우리가 쉬고 머물 수 있는 건물들이 있단다.”
천애랑은 마충의 설명을 들으며 감탄했다.
진법 안은 하나의 마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여러 명이 상주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식수를 해결하던 작은 연못은 더 확장되어 계곡물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환자에게 더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자 신경을 썼다. 주술석 덕분에 진법이 내외적으로 매우 튼튼해져서 이런 작업도 가능했지.”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없는 사이 많은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큰 노력들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란이 훈련을 했던 진법 중앙에는 보다 고품질의 주술석이 추가되어있었다.
그리고 주술석 중심에는 작은 전각 하나가 있었다.
“소걸이가 저기 있겠군요.”
마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천애랑은 떨리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소걸…….’
천애랑은 현재 송소걸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와 걱정이 교차했다.
그는 소걸이가 있는 전각을 보며 다소 안심했다.
보기에도 진법의 많은 기운들이 주술석에 의해 소걸이가 있을 건물로 모여들고 있었다.
아마 소걸이의 기운을 유지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전각에서 한 노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진설주 신의였다.
“왔나?”
신의가 천애랑을 보며 덤덤한 인사를 건네 왔다.
그는 진법 밖의 소란에 마충이 나갈 때부터 천애랑이 올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들어가도 되오?”
신의는 천애랑이 건물로 들어가기 쉽도록 길을 비켜줬다.
“그러시게.”
“아!”
전각으로 향하려던 천애랑은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마충에게 건넸다.
“빙백단입니다. 나머지 영약들은 하오문주를 통해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마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관하고 있었다. 우선 보고 나오거라.”
“알겠습니다.”
천애랑은 신의의 옆을 지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건물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약제의 향이 엄청나게 풍겨 나왔다.
방 안의 공기는 약제에 절여진 것처럼 끈적한 농도를 가지고 있었다.
방 중심에는 널찍한 의료용 침상이 있었는데, 그 위엔 천애랑이 익히 아는 얼굴이 누워있었다.
“소걸아…….”
천애랑은 송소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북해빙궁의 여인들보다 더 창백해 보이는 혈색, 그러나 신체는 영약 덕분인지 다소 건강한 상태로 보였다.
천애랑은 송소걸의 단전 위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그 내부를 관조했다.
온갖 영약들의 기운이 송소걸의 내부에서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실시간으로 기운이 소실되는 것이 느껴졌다.
천애랑은 송소걸의 단전에서 손을 뗐다.
‘처음 쓰러졌을 때와 다를 바 없다. 다행히도 악화된 것은 없어.’
천애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밖으로 다니면서 순간순간마다 혹시나 송소걸의 상태가 악화될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별다른 욕창도 없고 몸과 옷이 깨끗한 걸 보니 화란이 고생을 한 건가.’
천애랑에겐 항상 명랑한 의형제 송소걸이었지만 실상은 여인이었기에 여자인 화란이 처치를 했을 것 같았다.
소중한 사람을 살리겠다는 천애랑 자신의 일념을 위해 두 명의 신의는 물론이고 화란과 의각원생들, 담가와 하오문주 등 많은 사람들이 물심양면 고생을 했다는 것이 감사했다.
“곧 구해주마.”
천애랑은 다짐하며 송소걸을 일별했다.
천애랑은 방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치료약의 제조에 대해 논의합시다.”
“우리가 쉬는 곳으로 가세.”
두 신의들은 천애랑의 말에 반색하며 대답했다.
이들도 그간 송소걸을 빨리 치료하고 싶어 목이 빠져라 천애랑을 기다려 왔었다.
특히 진설주 신의는 이 치료가 성공한다면 전무후무한 경험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함께 하고 있었다.
“저는 소저를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화란은 송소걸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럼 잠시 부탁해. 그리고 그간 고마워.”
천애랑은 고생이 많았을 화란을 격려하고는 앞장서는 마충과 신의의 뒤를 따라갔다.
* * *
천애랑과 마충, 신의는 자리에 앉자마자 차를 마실 생각도 않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애랑은 말했다.
“대환단은 모든 영약 중 가장 안정성이 뛰어납니다. 화룡단은 양(陽)의 기운이 가장 강하고 빙백단은 음(陰)의 기운이 가장 강하죠.”
천애랑의 말에 마충이 크게 수긍했다.
“지당한 말이다. 각 성질의 분류에서 가장 최상에 놓인 영약들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완성품이고 말이야.”
신의도 마충의 말에 공감하며 말을 이어받았다.
“허나 각각 개성이 강하기에 어우러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했다시피 그럼에도 그 세 가지의 영약을 하나로 합쳐야 합니다. 그 역할을 우리가 해야 하고요.”
“어떻게 말이냐?”
마충과 신의가 궁금한 눈빛으로 천애랑을 바라봤다.
천애랑이 그 시선들을 보며 확신을 가지듯 말했다.
“제 기운으로 동화를 시킬 겁니다. 그리고 각 영약의 기운을 헤치지 않으면서 동화를 시키려면 최소 한 달의 시간은 필요할 겁니다.”
마충과 신의는 놀란 눈을 했다.
우선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최상급 영약 간의 동화가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다.
또한 그 작업의 기간이 불과 한 달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무림의 일반적인 영약들도 그 성격이 예민해서 다른 영약들과 합치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정설이었다.
적게는 몇 개월은 기본이고 길게는 몇 년도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헌데 전 무림을 통틀어 가장 개성이 강하고 그 기운이 가장 강한 세 영약들을 불과 한 달 만에 합칠 수 있게 만든다는 소리니 마충과 신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놀랍구나.”
“그러게 말이오.”
두 사람의 놀람을 뒤로 하고 천애랑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제가 무사히 영약들의 기운을 동화시키면 두 분은 이 영약들을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해주세요. 기를 다루는 거야 제가 더 낫지만 영약 자체를 다루는 것은 두 분을 따라갈 자가 없을 거니까요.”
마충과 신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선을 다하마.”
“맡겨만 두게.”
천애랑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저는 며칠간 몸가짐을 바로 할 겁니다. 그동안 두 분도 각자의 할 일들을 준비해 주세요.”
천애랑은 며칠 동안 심기체를 다듬을 생각이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쉬지 않고 섬세한 기의 운용을 해야 하기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각 영약들이 매우 귀한 것들이라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실패는 용납할 수 없으니 작은 변수도 줄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전에 하루 정도는 자신을 위해 고생하고 기다려준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었다.
명색이 자신은 가주이고 이들은 가솔들이지 않은가.
“그럼,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그간 고생한 이들을 위한 작은 연회라도 열까요?”
천애랑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