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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87화 (87/200)

기공술사 87화

삭막한 사막 위에 지어진 혈교의 건물.

그 안에는 사막에서 귀한 물을 그저 관상의 목적으로 만든 정원과 거대한 연못이 있었다.

연못엔 물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주위를 산책할 수 있는 길이 나있었다.

산책길 위로는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게 지은 지붕들이 자연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처음 이 공간을 발견한 찬호는 이 구역을 만든 전 혈교주의 욕심과 과시욕을 느꼈었다.

찬호는 뒷짐을 지고 정원을 거닐며 연못의 풍광을 감상했다.

첨벙.

잉어 한 마리가 찬호의 발걸음에 떨어진 모래를 먹이로 착각하고 뛰어올랐다.

찬호는 그런 잉어를 빤히 쳐다봤다.

거대한 잉어였으나 훨씬 거대한 연못에 비하니 작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쪽에서나 산다는 알록달록한 비단잉어였다.

찬호는 인위적으로 만든 연못에서 노니는 이 잉어가 자신의 신세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마교. 태어나고 자라 당연하게 여긴 고향. 하지만 자신이 원치 않는 방식의 삶을 강요하는 곳.

“너나 나나 답답한 이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구나. 죽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말이야.”

찬호의 말에 주변의 공기가 일렁였다.

소교주 찬호를 지키기 위한 수신호위들의 불편한 기색이었다.

4명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오직 마교의 지존만을 위해 존재했다.

그리고 사용하는 주 무기에 따라 이름은 검, 도, 암, 편으로 불렸다.

원래는 교주 천마의 곁을 지켜야 하지만 천마가 폐관수련에 들어가고 찬호가 교주 대행을 함으로써 임시 배치가 되었다.

찬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왜? 내 말이 불쾌한가? 네놈들이 감히?”

드드드드!

찬호의 몸에서 기함할 기운이 뻗어 나오자 지붕과 그 기둥들에 숨어 있던 수신호위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무릎을 꿇었다.

“소교주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수신호위 중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지만 눈빛은 말과 태도와 달리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찬호는 알고 있었다.

이들의 유일한 주인은 천마뿐이고 자신이 엇나가지 않게 감시하라는 목적으로 마뇌가 붙여줬다는 것을.

“쯧. 되었다. 물러나라.”

찬호는 부질없다 생각하며 신형을 돌렸다.

수신호위들은 찬호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안개처럼 다시 사라졌다.

그때 멀리서 무인 하나가 다급히 뛰어왔다.

흑풍대원이었다. 그는 피와 먼지투성이였다.

찬호는 흑풍대원이 소교주를 만나러 오면서 몸단장할 정신이 없을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벌써 북해빙궁을 점하고 돌아온 것인가 싶었다.

의문 가득한 찬호의 앞에서 흑풍대원은 공손히 자세를 낮추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래. 벌써 끝내고 돌아오는 것이냐?”

찬호의 말에 흑풍대원은 지극히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더욱 몸을 숙이며 소리쳤다.

“죽여주십시오!”

찬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이냐?”

보고를 하는 흑풍대원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실패했습니다.”

“뭐?!”

보고를 하는 흑풍대원 스스로도 원통한지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북해빙궁과의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찬호는 황당했다. 그리고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흑풍대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단 한 번의 패배와 작전실패도 없던 무적의 부대였다.

“흑풍대가 패했다니? 자세히 말하라.”

흑풍대원은 피가 끓는 심정으로 보고를 이었다.

“북해빙궁을 구원하고 저희를 방해한 지원군이 있었습니다.”

“지원군?”

“예. 모용세가와 홍건적의 병사들이었습니다.”

찬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기공가주가 있었습니다.”

“뭐?!”

찬호의 표정이 놀람으로 가득 찼다.

한동안 알 수 없던 의형제의 소식을 이렇게 들을 줄은 몰랐다.

“자세히.”

찬호가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흑풍대원이 비통하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북해빙궁을 무난히 제압해가는 찰나 기공가주가 번개처럼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계속.”

찬호의 이어진 재촉에 흑풍대원은 상세하게 보고를 이어갔다.

북해빙궁의 거센 저항, 하지만 거의 제압했던 상황. 그때 나타난 천애랑과 지원군들.

엄청난 수의 창병을 보유한 홍건적의 병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던 두 명의 고수.

그리고 끝까지 흑풍대를 추격해온 모용세가의 천중모용대와 천애랑.

천애랑의 엄청난 무위에 흑풍대가 엄청난 타격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흑풍대주가 왼팔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현재 흑풍대주는 깨어나지 못하고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3천이 넘던 기병 중 복귀한 것은 흑풍대 뿐이며, 그조차도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보고가 이루어졌다.

“…….”

찬호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오묘한 감정 속에 빠져들었다.

그나저나 천애랑의 무위가 예상보다 더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풍대를 추격하고 흑풍대와 함께하는 흑풍대주를 빈사 상태로 만드는 것은 마교의 어느 누구도 쉽사리 만들 수 없는 결과였다.

찬호 자신이 아는 흑풍대주는 지장(智將)이었다. 그리고 맹장(猛將)이었다. 또한 백전노장(百戰老將)과도 같은 이었다.

마찬가지로 흑풍대는 산전수전을 다 치른 마교 최정예 집단이었다.

그런 흑풍대주와 흑풍대가 큰 낭패를 봤다는 것에 먼저 분노와 불쾌감이 들었다.

전쟁이 멀지 않은 이때 주 전력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큰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것과 같았다.

그러한 분노, 불쾌의 감정에 이어서 엄청난 무위와 존재감을 선보인 의형제이자 친우가 대견했다.

찬호는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출정 전의 흑풍대주를 떠올렸다.

흑풍대주는 세외세력을 무시하다간 50년 전처럼 뒤통수를 맞아 낭패를 볼 수 있다 강조했었다.

북해빙궁을 멸해 북쪽의 걱정을 없애고 오겠다는 흑풍대주의 의견을 찬호는 승인했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명했었다.

“빙백단은 가져오지 못했나?”

“죽여주십시오!”

찬호는 바닥에 피가 나도록 이마를 박는 흑풍대원을 무심하게 보았다.

“됐다. 물러나라.”

찬호의 명에 흑풍대원은 피를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물러났다.

“너희들도 물러나라. 잠시 혼자 있고 싶다.”

수신호위들은 찬호가 자신들에게 한 말임을 앎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짜증 나게 하지 마라. 아무리 아버지의 수신호위라고 한들 더 건방을 떨면 죽인다.”

끈적한 살기가 찬호의 몸에서 뿜어 나오자 수신호위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찬호에게서 크게 거리를 벌렸다.

찬호는 한숨을 쉬며 발밑의 흙을 쓸어 찼다.

연못에 떨어진 흙들이 토도동 튕기며 작은 원의 파장을 일으켰다.

이에 또다시 잉어가 먹이로 착각하고 폴짝 뛰어올랐다.

찬호는 순간적인 발검으로 잉어를 두 동강 내 죽였다.

찬호는 복잡한 심경을 달래기 위해 이왕 뽑은 검을 가볍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찬호는 마교에 복귀한 뒤 가장 먼저 마의(魔醫)를 찾았었다.

마의(魔醫)는 마교 내 모든 의원들의 수장이었는데 세간에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신의와 견주어 부족함이 없다고 평하고 있었다.

오히려 비인도적인 임상실험도 마다치 않는 환경에 있기에 마의가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졌을 거라는 평도 있었다.

찬호는 그런 마의에게 송소걸이 당한 독과 그 해독약에 대해 물었었다.

자신이 마교로 돌아와 다시는 과거처럼 돌아갈 수 없을지언정 송소걸만큼은 살리고 싶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마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 독에 당했다면 이미 죽었을 거라고 확신하는 마의를 향해 찬호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당사자가 살아있다면 어떤 해독제를 써야 하느냐고 재차 묻자 마의는 또다시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해독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기이한 방식으로 독을 만들어 내기만 했을 뿐 해독제는 없다는 말에 찬호는 극심히 분노를 했었다.

찬호는 마교의 전권을 받는 즉시 마의를 닦달해 해독제를 만들라고 명을 내렸다.

이에 마의는 찬호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모든 일을 제쳐두고 최우선 과제로 해독제를 연구했다.

완치는 아니나 호전이 가능한 약을 마의는 구상했고 이에 필요한 재료 중 하나가 빙백단이었다.

그래서 찬호는 흑풍대주에게 빙궁을 멸하거든 빙백단을 꼭 챙겨오라고 당부를 했었다. 하지만 의미가 없게 되었다.

“소걸…… 애랑…….”

콰가가가!

찬호의 복잡한 심경이 흑검을 통해 발출되며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부질없군.”

찬호는 착검을 하고 정원을 벗어났다.

정원 밖에는 찬호의 시중을 드는 이들과 무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근육질의 색목인은 큰 우산을 재빨리 찬호 머리 위로 드리우며 뜨거운 햇빛을 가렸다.

시중을 드는 여인은 조금은 더러워진 찬호의 피풍의를 벗겨 받으려 했다.

찬호가 가볍게 손짓으로 거부하고선 말했다.

“대계를 시작할 것이다. 마뇌에게 소식을 알리고 맡은 바 계획들을 시작하도록”

“존명!”

찬호의 말에 무인들이 소식을 전하러 뿔뿔이 흩어졌다.

“흑풍대주에게 갈 것이다.”

찬호는 당당한 보부로 앞장서 걸었고 그 뒤로 시중들이 황제를 모시듯 고개를 숙이며 뒤따랐다.

*  *  *

천애랑은 무탈한 여정을 보냈다.

내몽고를 지나 하북에 들어선 후론 산을 타야 했기에 적당한 표국에 말을 팔았다.

워낙 좋은 말이라서 그런지 두둑한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천애랑은 표국을 나오며 무한표국을 떠올렸다.

세상을 경험하고자 선택했던 표국이었고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는 시작점이었다.

‘찬호…… 소걸…….’

천애랑은 쓸쓸함을 느꼈다. 산을 타면서 보이는 단풍나무들은 의형제의 추억을 자꾸만 상기시켰다.

상념에 빠져 걷다 보니 천애랑은 어느새 목표로 했던 곳에 도착을 했다.

“다섯 바위 봉우리와 거북이 바위. 오랜만이네.”

천애랑은 미소를 지었다.

“대머리 같은 산봉우리도 그대로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이지만 세상물정 모르던 그때가 왠지 모르게 그리웠다.

“진법도 그대로고.”

천애랑의 눈에 기묘한 공기의 흐름과 함께 진법 속 길이 보였다.

“그리고 하춘?”

진법 안 경계 근무를 서던 의각원생 한 명이 천애랑을 보고 놀라서 엉덩방아를 찍었다.

화란의 치료를 마치고 진법에서 나왔을 때 호들갑을 떨던 원생이었다.

“헉! 가주님!”

“오랜만이네?”

천애랑은 미소를 지으며 하춘에게 다가갔다.

“오오~ 백두신룡 가주님!”

하춘은 몸을 일으키며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마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듯한 행동이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하춘의 뜬금없는 흰소리에 천애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춘은 천애랑의 질문이 더 어이가 없는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말했다.

“아니! 운남에서부터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백두산에서 온 신룡이 운남에 평화를 주고 갔다고요? 모르셨어요?”

천애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처음 듣는데?”

“이 먼 곳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면 아마 전 무림이 가주님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설동이가 마을에서 이 소식을 들고 왔을 땐 의각원이 얼마나 난리가 난 줄 아세요?”

천애랑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야 모르지…….’

천애랑의 생각과 상관없이 하춘은 길을 앞장서며 침이 튀게 말했다.

“다들 걱정했거든요. 그 영약들을 구하러 가는 여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잘 계시다 못해 날아다니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모두 마음이 놓이면서 신이 난 거죠.”

“그랬군.”

천애랑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이리 걱정하고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맙고 기분 좋았다.

‘이것이 가족인가.’

천애랑은 하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익히 아는 의각원의 입구에 도착했다.

하춘은 의각원에 들어서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가주님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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