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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86화 (86/200)

기공술사 86화

북해의 일정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원을 온 이들은 북해빙궁의 도움을 받아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 수송을 원한 수레에는 북해에서 마련한 특수한 얼음들이 제공됐다.

고 노가 이끄는 병사들의 시신 대부분은 북해빙궁 인근에서 장례를 치렀다.

병사들 다수가 고아인 경우가 많았기에 특별하게 가족이 있거나 고향이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화장을 했다.

풍장을 한들 이렇게 추운 곳에선 잘 썩지도, 동물들의 먹이가 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큰 이유였다.

또한 매장을 하기엔 땅이 단단해서 많은 수고가 필요했다.

그에 반해 천중모용대는 모든 시신들을 세가로 데려가기 위해 준비했다.

대다수가 모용세가의 식구인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모용세가에서 가까운 곳이 고향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북해빙궁주는 지원을 와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북해의 값비싼 모피들과 보물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물론 천애랑은 빙백단을 잘 받아 챙겼다.

“의형제를 꼭 살릴 수 있길 바라겠네.”

“고맙소.”

천애랑은 빙궁주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내성 밖 마을은 다 무너졌던데 재건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소.”

천애랑의 걱정에 빙궁주 설엄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뭐, 그렇긴 하겠지만 괜찮네. 살아있는 것이 어딘가. 천천히 해나가면 되겠지.”

“여기 있는 병사들에게 도움을 좀 구해보지 그러오?”

천애랑이 주원장의 병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빙궁주 설엄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나 불가하네. 우선 오랜 기간 저들 모두를 건사할 식량이 부족하네. 그리고 무엇보다 저들도 나름의 바쁜 일정이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천애랑은 쉽게 수긍했다.

고 노와 화운의 말로는 황실군들을 피해서 크게 우회해 강남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가야 할 길이 먼 만큼 이곳에서 더 시간을 소모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때 빙궁의 전사가 다가와 설엄에게 보고했다.

“궁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 하오문에서 왔다고 합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양의 수레와 인원들이 함께 왔습니다. 적의가 없어 보여 외성 밖에 대기시킨 상태입니다.”

“가지.”

설엄은 앞장서 내성을 벗어났다. 천애랑도 뒤를 따랐다.

무너진 외성문에 도착하니 한 남자가 몸을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족제비를 닮은 외모였다.

남자는 추운 북해의 날씨를 방비하고자 함인지 두꺼운 털옷들로 칭칭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북해빙궁의 성벽이 신기한지 연신 구경 중이었다.

“누구인가?”

빙궁주의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아! 북쪽의 밝은 태양인 북해빙궁주님이십니까?”

남자의 거침없는 아부성 인사에 설엄은 당황하면서도 썩 나쁘지 않은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네만?”

“아! 영광입니다! 저는 하오문에서 새로이 북해빙궁 무역담당을 맡은 곽찬입니다.”

“무역담당?”

“네. 하오문주님이 친히 내려 주신 명에 북해빙궁과의 무역계약이 있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가?”

곽찬은 의아함 가득한 설엄의 표정을 재빠르게 읽고선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엄청난 양의 수레가 사람들과 함께 도열해 있었다.

“식량 300수레, 무너진 빙궁의 재건을 위한 인부 200명, 그리고 건축을 위한 자재들입니다.”

엄청난 양에 설엄이 깜짝 놀라했다.

곽찬은 말을 이었다.

“문주님께서는 빙궁에 닥친 환란이 어찌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 피해가 만만치 않을 수 있다고 예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걸 준비해 온 것인가?”

“네. 준비는 전권을 받은 제가 한 것이기는 하나 사전의 명은 문주님께서 주셨습니다.”

“허어…….”

천애랑은 놀란 눈으로 곽찬의 뒤에 도열된 천이 넘는 수레를 봤다.

‘역시 대단하군.’

천애랑은 하오문주의 꼼꼼함에 감탄했다.

“대가로 요구한 빙백단보다 과한 지원군을 보내준 것도 고마운데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다니…….”

설엄이 작은 감탄과 감동에 빠졌다.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 무너진 마을의 재건이지 않았나.

추가로 비축한 식량에만 의지할 수 없어 식량도 고민 중이었다.

설엄이 잠시 감상에 빠져있을 때 곽찬은 재빠르게 천애랑을 보았다.

“천 가주님이시죠?”

“그렇소만?”

“문주님이 보내신 서신입니다.”

천애랑은 곽찬이 건넨 서신을 받았다.

곽찬은 천애랑이 서신을 받자마자 재빨리 시선을 설엄에게 돌리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상대방을 기다리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는 자였다.

“문주님께선 오늘과 같은 지원을 주기적으로 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설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지금 가지고 온 식량만으로도 빙궁의 전 인원이 한 달은 먹을 수 있을 양이었다. 아낀다면 더 긴 기간도 가능할 양이었다.

식량이 귀한 빙궁에서 지금과 같은 식량지원은 웬만한 보석보다 귀한 가치였다.

“의도가 무엇인가? 지금의 빙궁은 그에 상응해 지불할 것이 없다네.”

“괜찮습니다. 문주님께서는 북해빙궁이 감당 가능한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을 하는 곽찬은 추운지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지만 눈빛만은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설엄은 고개를 갸웃했다.

“말해보게.”

곽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북해의 특수한 얼음을 가공, 유통할 권리. 그리고 맹우의 결의입니다.”

설엄은 인상을 쓰며 곽찬의 말에 대해 해석을 했다.

“북해의 얼음이 쓰일 곳이 있단 말인가? 그만한 가치가 있고?”

“예. 향후 큰 전쟁이 발생한다면 시신의 부패방지를 위해 쓰일 겁니다. 기다리면서 보니 이미 그렇게 사용을 하신 것 같더군요.”

“흐음……. 그뿐인가?”

곽찬은 고개를 저으며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먼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새로운 평화가 찾아온다면 내륙 부호들을 대상으로 북해의 얼음을 판매할 계획이 있으십니다.”

설엄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부호들이 얼음을 살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너무 먼 미래를 계획하는 게 아닌가? 그동안은 하오문이 순수한 손실을 볼 것 같은데 말이야.”

곽찬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문주님께선 기꺼이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게 혹시 맹우의 결의와 연관이 있는 것인가?”

“문주님의 바다와 같은 깊은 속내는 제가 미처 헤아리진 못합니다. 다만 확실한 건 문주님께선 앞선 거래조건보다 맹우의 결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대체 누구와 맹우를 맺으라는 소린가?”

곽찬의 시선이 천애랑에게로 돌아갔다. 이에 설엄도 곽찬의 시선을 따라 천애랑을 보았다.

“혹 천 가주?”

곽찬은 천애랑에게서 설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문주님께선 북해빙궁이 천 가주님의 기공가와 맹우의 결의를 하길 바라셨습니다.”

“하오문이 아니라? 왜?”

설엄의 고개가 모로 갸웃거렸다.

곽찬은 그저 여유롭게 웃으며 답했다.

“문주님의 깊은 뜻을 제가 헤아리긴 어렵지만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설엄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곽찬과 천애랑을 번갈아 쳐다봤다.

거래는 하오문과 하고, 심지어 모든 지출은 하오문이 하면서 당장 혜택이 있을 맹우의 결의는 기공가와 하라 하니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나야 상관없지.”

설엄은 눈썹을 까딱이고는 천애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북해빙궁은 기공가와 맹우가 되고자 하는데 천 가주 자넨 어떤가?”

잠잠히 듣고 있던 천애랑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소. 고마울 따름이지.”

“그렇다는데?”

설엄이 곽찬을 쳐다보자 곽찬은 미소와 함께 읍을 했다.

“문주님껜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추위에 떠는 손님을 너무 밖에만 붙잡아 뒀군. 향후 일정에 대해선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겠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곽찬이 반색을 했다.

“천 가주 자넨?”

“먼저 들어가시오.”

천애랑이 가볍게 서신을 들어 올리자 설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하시게.”

설엄과 곽찬의 뒤를 따라 일꾼들과 수레들이 줄을 지어 외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후 천애랑은 하오문주가 보낸 밀봉된 서신을 펼쳤다.

[이 서신을 천 가주 자네가 받았다면 북해에서의 일은 무난히 마무리됐단 의미겠지. 고생 많았네.]

천애랑은 웃음이 났다.

고생 많았다는 짧은 말이었지만 이 표현을 이 여정의 시작부터 모든 것을 아는 이에게서 들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아마 자네는 우리 소희를 살리기 위해서 소희가 치료를 받고 있는 의각원으로 곧장 달려가겠지.]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내 딸을 드디어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네. 다 자네 덕이라네.]

‘하오문주 그대의 역할이 매우 컸소.’

[고맙네. 할 말은 많지만 차차 기회를 갖도록 하지.]

천애랑은 서신을 다 읽고 다시 접으려다가 뒷면에 쓰인 추신을 보았다.

[운남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가 되었네. 그리고 남림야수왕이 만날 때마다 자네의 칭찬을 하도 해서 귀가 아플 지경이라네.]

천애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남림야수왕의 호쾌한 얼굴과 행동이 떠오르면서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야수족들도 잘 지내려나.’

천애랑은 서신을 잘 정리해 품에 넣었다.

서신을 읽고 나니 한시라도 지체하지 않고 의각원으로 향하고 싶었다.

그래서 천애랑은 곧장 빙궁주를 찾으러 외성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빙궁주 설엄을 따로 찾을 필요는 없었다.

손님을 데리고 들어갔던 빙궁주가 떠나야 하는 손님들과 함께 다시 외성문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떠나기 전 인사를 나눌 요량으로 보였다.

천애랑도 자연스럽게 이들의 인사에 합류했다.

“많이 아쉽구만.”

설엄이 아쉬운 기색으로 외성 밖까지 배웅을 했다. 설엄의 주위로는 빙궁의 전사들도 함께 했다.

“다음엔 모용으로 놀러 오시오. 모용의 술도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겠소.”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네.”

모용단과 고 노의 인사에 설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화운과 천애랑도 말했다.

“후일을 약속할 순 없으나 언젠가 주 대장님과 함께 술을 마시면 좋을 것 같소.”

“긴 말이 필요하겠소. 다음에 봅시다.”

마지막 순번으로 인사를 한 천애랑은 주위를 둘러봤다.

‘설화 소저가 안 보이네?’

첫날의 술자리 이후 설화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크게 상관없으려나.’

천애랑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선 마저 떠나는 일행들과 작별을 나눴다.

모용단이 천애랑에게 미소를 지었다.

“천 가주. 꼭 모용세가에 들리게. 앞으로 요녕 심양에서 천 가주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될 것이니 방문한다면 큰 축제를 벌일 것이네.”

“하하, 알겠소.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그리하리다.”

천애랑이 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어 화운이 천애랑에게 말했다. 차갑고 딱딱한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미소엔 작은 따스함이 있었다.

“천 가주. 꼭 의형제분을 살리길 바라겠소. 그리 된 후 부대를 방문해 주시오. 주 대장님이 크게 마음을 쓰고 있소.”

“그러겠소.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가만히 순서를 기다리던 고 노가 천애랑에게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땐 기대에 부합하는 훈련 성과를 보여주겠네. 천 가주 자네의 앞길에 안녕이 있기를 비네.”

“고 노도 뜻하는 바를 이루시오.”

간단한 인사들을 나눈 모두는 그대로 각자의 길을 떠났다.

모두가 향하는 방향이 달라서 동행은 없었다.

천애랑은 북해의 햇살을 뒤로 하고 설원 위로 또각또각 말을 몰았다. 모용단이 먼 길 조심히 가라고 챙겨준 말이었다.

물론 죽은 대원들의 말 중 하나였는데 천중모용대 안에서도 준마로 취급하는 호마였다.

기골이 장대한 몽골의 말이었는데 야생성이 강해 주인을 가린다고 했다.

하지만 천애랑의 기운에 감응한 호마는 쉽게 등을 내주었다.

천애랑은 호마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호마는 그 손길이 좋은지 투레질을 했다.

천애랑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가자. 의각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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