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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85화 (85/200)

기공술사 85화

“켁!”

천애랑은 사래에 걸려 헛기침을 했고.

꿀꺽.

고 노와 화운은 입안에 넣은 술을 소리가 나도록 삼켰고.

탱그랑.

모용단이 술잔을 떨어뜨렸고.

주르르륵.

빙궁주 설엄은 입안의 술을 흘렸다.

장내엔 누구 하나 선뜻 입을 떼지 못하는 정적이 흘렀다.

“크흐흠. 딸아.”

설엄이 입에 묻은 술을 닦아내며 설화를 불렀다.

“왜요 아버지?”

설화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설엄이 이마를 짚었다.

“그……, 혼인이라는 것은 말이다. 그렇게 어디 대련이라도 하자는 듯이 말하는 게 아니란다.”

“뭐 어때요? 제 마음에 드는데요. 저보다 강한데 젊기까지 하니 딱이잖아요.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금상첨화네요.”

설화의 말에 설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의 의견도 중요하지 않느냐…….”

설엄은 철없는 딸의 화법에 한숨을 쉬었다.

북해빙궁에서만 자라서 외부와의 교류를 거의 갖지 못한 딸이었다.

무공을 배우기 시작한 후로는 마을의 아낙들보다 전사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남자보다 더 씩씩했다.

물론 빙궁의 전사들 중 여자도 있었지만 도긴개긴이었다. 전혀 설화의 여성성과는 거리만 먼 표본들이었다.

설화는 평소 빙궁의 공주로서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음에도 금은보화엔 전혀 관심이 없던 딸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욕심을 부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武)에 대한 성취였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미래의 신랑감은 무조건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살았다.

설엄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빙궁에서 적수가 없는 설화라서 결혼은 먼 나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다.

오히려 설화의 연배에 맞춘 신랑감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있네…….”

설엄은 조용히 혼잣말을 하며 난감해하는 천애랑을 보았다.

썩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나쁠 게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천금 같은 기회이지 않나 싶었다.

얼핏 들은 바로는 빙백단이 필요한 이유도 사리사욕이 아니라 소중한 의형제를 살리기 위함이라고 하니 신의가 좋을 것이었다.

그리고 인맥도 훌륭한 것 같고, 무위야 본 게 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젊은데다가 가주이긴 하나 가문의 터가 없기도 하고.

딱 데릴사위로 데려오면 너무나도 좋을 것 같았다.

“좋은데……?”

설엄은 침을 꼴깍 삼키며 천애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 천애랑이 설화를 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미안하오. 좋게 봐주는 것은 좋으나 나의 앞길은 복수를 위한 피의 길이오.”

정중한 천애랑의 거절에 설화는 오히려 반색했다.

“사나이가 그런 기개는 있어야죠. 괜찮습니다. 그 복수의 길을 제가 내조 하죠.”

“그 대상이 마교요.”

천애랑은 험난한 미래를 암시하며 재차 사양했다.

“오히려 좋네요. 우리 북해빙궁도 이제는 마교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게 됐으니까요. 내 낭군이 마교를 멸한다면 죽은 전사들의 복수도 하고 일석이조겠네요.”

황당함에 천애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데 우리 오늘 처음 만나지 않았소?”

“운명이라는 말이 달리 있을까요. 저는 오늘 그것을 느꼈답니다.”

천애랑은 점점 진땀이 났다. 무슨 철옹성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 내 인연이 있어 나름의 마음을 나눈 여식이 있다오.”

처음으로 철옹성 같던 설화의 얼굴에 금이 갔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재차 말을 해왔다.

“혼인을 약속했나요?”

천애랑은 삐그덕 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오만.”

짝!

설화가 크게 손뼉을 쳤다.

“그러면 아직 아무것도 아닌 사이네요.”

천애랑은 식은땀이 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강수를 두었다.

“제가 설화 소저를 좋아하지 않소.”

한 편의 경극을 보는 듯 숨죽이며 구경하던 빙궁주와 고 노, 화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설화가 과연 천애랑의 날카로운 말을 어떻게 받아칠지 기대하는 눈빛으로 침을 삼켰다.

의외로 설화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오늘 처음 봤잖아요?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같이 살을 붙이다 보면 차차 좋아질 겁니다.”

“딸아, 그런 표현은 좀…….”

설엄이 당혹감과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설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이때 천애랑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음도 없이 그러는 건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소. 그리고 책임지지 못할 허언을 내뱉는 것도 싫고. 이 대화는 그만합시다.”

천애랑은 설화가 다소 상처를 받더라도 확실하게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차게 말했다.

설화에게서 잠시의 정적이 생겼다.

그러나 의외로 설화가 순순히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설화가 순순히 물러나자 천애랑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좀 전의 기세만 보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불퇴의 눈빛이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상황이 일단락되자 한 편의 경극과도 같은 전개를 구경하던 일행들은 참았던 숨을 뱉었다.

설화는 차분히 다시 자리에 앉아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듯이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끌며 깔깔 웃었다.

‘참 독특한 여인이네.’

천애랑은 속으로 실소를 지으며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곤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북해의 달은 낮보다 더 차가운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얀 설원들은 달빛을 받아 마치 호수라도 되는 듯이 반짝거렸다.

내성 곳곳에선 무인들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로 빙궁의 전사들과 천중모용대가 자리했는데 북해빙궁의 주민들이 술과 안주를 내어주며 손님 대접을 해주고 있었다.

주원장의 병사들은 인원이 많은 탓에 외성에 진을 치고 그들 나름대로의 휴식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이 없는 북해빙궁은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네.’

천애랑은 간만의 여유를 느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천 가주. 잠시 시간이 되겠나?”

고 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천애랑은 피식 웃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조용한 데로 갑시다.”

“빙궁주가 언질을 해준 곳이 있다네. 앞장서겠네.”

고 노는 뒷짐을 지고 표홀하게 경공을 펼치면서 이동했다. 천애랑은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내성의 뒤쪽으로 멀찍이 벗어난 둘은 아무도 없는 설원 위에 자리했다.

“천 가주 자네의 몸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내 그간 너무나도 궁금했던지라 욕심을 부려봤네. 미안하네.”

천애랑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백두검파의 검술 복원을 원한다 기억하오만?”

천애랑의 말에 고 노가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기공가와 교류를 했던 당시의 고구려 제일검을 되찾고 싶다네.”

“그럼 우선 그 검을 볼 수 있겠소?

“물론.”

고 노는 챙겨온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천천히 기수식을 잡았다.

고 노는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고 다소 품 안으로 당겼다.

“발검술도 있고 다양한 기수식이 있지만 백두검파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수식으로 시작하겠네.”

고 노의 앞발이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미묘한 손목의 움직임이 더해지자 방울뱀의 꼬리처럼 검봉이 좌우로 간결하게 휘둘러졌다.

마치 찔러오는 적의 검 두 개를 좌우로 쳐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나무가 많은 곳에서 검을 휘두르기 위해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 효과를 가지는 것이 중요했네.”

고 노의 앞무릎이 가볍게 구부러짐과 동시에 검이 부드럽게 내려치고는 앞으로 쭉 뻗어갔다.

천애랑의 상상의 눈에서 고 노와 가상의 적이 살아있는 듯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질러 오는 적의 검을 내리쳐 방어하고는 공방일체로 바로 찔러 들어가는 고 노가 보였다.

“지구력이 필요한 전투에서는 공방일체의 균형이 중요하지.”

고 노는 찌른 검을 회수하지 않고 엄청난 허리의 탄력과 근력을 이용해 그대로 검을 횡으로 그었다.

하체는 천근추의 수로 흔들림 없이 지탱하며 기예에 가까운 상체의 움직임을 유지해주고 있었다.

부웅!

“백두의 검엔 도처럼 휘두르는 형식도 존재한다네.”

고 노는 순간적으로 검을 당기며 반대 손으로 주먹질을 했다.

이어서 검을 찌르듯 던져 날리고선 따라가며 박투술을 선보였다. 수박(手搏)이라고 불리는 무예였다.

“전장에서의 무기는 검만 있는 것이 아니지.”

엄청난 속도로 수박을 펼치며 나아간 고 노는 허공에서 검을 다시 낚아챘다.

그리곤 바닥을 쓸 듯 보법을 밟아가며 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한참을 움직이던 고 노는 검식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백두검파는 전쟁을 위한 검식들이 많다네. 갑옷을 입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말을 타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활을 사용할 때와 아닐 때 등 다양한 전쟁의 상황에 어울리는 검식을 연구했지.”

“그래 보이오. 상당히 상황변화에 적응하기 좋아 보이더군.”

고 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렇다면 자네가 보기에 어떤 것을 보완해야 할 것 같나.”

천애랑은 견식 내내 들었던 생각을 말했다.

“기공가의 무공 중 그대의 검술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바람의 결을 읽는 법을 익히는 것이라 생각하오.”

“바람의 결?”

고 노가 고개를 갸웃하며 궁금함을 표하자 천애랑이 가볍게 손을 허공에 뻗었다.

휘이익!

한줄기의 바람이 고 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허어…….”

고 노는 칼날 같은 바람에 감탄했다.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단순히 검기처럼 내기를 날카롭게 벼려 날리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건 그저 바람의 결에 내기를 날린 단순한 예시일 뿐이오. 그대가 만약 바람의 결을 읽고 이용할 수 있다면 검의 속도는 물론이고 그 위력 또한 진일보 할 것이라 확신하오.”

“허, 허허…….”

고 노가 설렘에 연신 감탄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바람의 결을 읽기 위해선 우선 바람의 기운을 느낄 줄 알아야 하오. 이건 감각의 영역이니 가부좌를 틀어 보시오.”

천애랑의 말에 고 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즉시 가부좌를 틀었다.

“평소처럼 운기조식을 한다 생각하고 흡입되는 외부의 기운들에 좀 더 신경을 써 보시오.”

고 노는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천애랑은 가볍게 기운을 펼쳐 바람의 기운을 끌어왔다.

천애랑과 고 노의 중심으로 북해의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추위가 몰려왔지만 두 사람은 괘념치 않았다.

고 노는 눈을 감고 최대한 감각에 집중했고, 천애랑은 그런 고 노의 반응을 보면서 지속적으로 바람의 기운을 끌어왔다.

한 시진(2시간)이 넘도록 시간이 지난 후 고 노가 살며시 눈을 떴다.

고 노는 극도의 집중을 한 터라 추위도 잊고, 오히려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언가 살랑거리는 가느다란 선과 같은 기운을 느꼈는데 이게 맞는가?”

천애랑이 눈에 이채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가 계속 기운을 끌어올 테니 확실한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더 집중을 해보시오.”

“알겠네.”

고 노는 다시 눈을 감고 집중을 했다.

다시금 한 시진(2시간)이 더 지나자 고 노는 깊은숨을 뱉으며 운기조식을 마쳤다.

천애랑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고 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어…… 바람의 기운, 그리고 그 결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대략 알겠네.”

고노의 감탄에 천애랑은 미소를 지었다.

만류귀종이라 하더니 고 노 정도 되는 경지면 이렇게까지 금방 감을 잡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물론 방향만 잡아줬을 뿐이기에 고 노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기공가의 무공처럼 큰 위력을 펼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앞으로 그 기운을 어떠한 상황에서든 느끼고 읽을 수 있게 훈련하시오. 그렇다면 검술뿐 아니라 활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니.”

고 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천애랑에게 깊게 포권을 취했다.

“진심으로 고맙네. 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네.”

“기공가와 백두검파는 서로 좋은 이웃이었다 하지 않았소. 앞으로도 잘 지내면 그것으로 족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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