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84화
수많은 피의 제물 덕분인지 북해의 거칠었던 눈이 그쳤다.
북해빙궁, 천중모용대, 주원장의 병사들 모두 전쟁의 몸살을 느끼며 사상자를 수습했다.
북해빙궁 총 300여 명의 전사들 중 사망 110여 명.
고 노인과 화운이 이끄는 주원장의 정예병사 총 6천여 명 중 사망 400여 명.
모용세가의 천중모용대 총 200명 중 사망 100여 명.
그리고 흑풍대를 포함한 마교 기병의 사망자는 약 3천여 명이었다.
악귀 같이 악착같은 마교의 기병들은 끝까지 항전했기에, 포로 따윈 없이 마교 기병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빙궁과 지원군의 입장에선 불과 600여 명의 사망자만 만들고 3천에 가까운 마교 기병들을 섬멸했으니 대승 중 대승이었다.
물론 부상자들까지 따지면 더 큰 피해가 있었지만 무림 최강이라고 평가받던 흑풍대와 기병들을 상대한 것이기에 기념비적인 승리임은 틀림없었다.
허나 승리의 기쁨만큼이나 치명적인 비율의 사상자가 나온 모용세가는 쓰라린 감정도 함께 공유했다.
지원군으로 온 가문의 최정예 절반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었기에 모용단의 표정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북해빙궁주 설엄이 그런 모용단을 위로했다.
“진정한 흑풍대를 상대한 건 모용세가 그대들이니 그 영광은 그대들에게 돌리겠소. 그리고 구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오.”
북해빙궁 내성 궁주전에 각 세력의 수장들이 자리를 가졌다.
장소엔 단출한 술상이 차려졌고 자리엔 설엄과 설화, 고 노인과 화운, 모용단, 그리고 천애랑이 자리했다.
빙궁주 설엄의 말에 모용단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하루의 피로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술에 부르르 떨며 함께 씻겨 내려갔다.
“고맙소. 허나 흑풍대를 진정으로 섬멸한 건 여기 천 가주시오. 그 영광을 모용이 모두 가져가기엔 무겁소.”
천애랑은 모용단의 말을 들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무림인들은 참 허례허식과 명예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명예가 죽은 대원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다면 나는 상관없소. 이에 대한 것은 단화대협이 알아서 하시오. 혹 이의 있는 분이 계시오?”
천애랑이 고 노와 화운 등 장내를 둘러보자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모용단은 천애랑에게 깊게 포권을 취하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천 가주.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구려. 천 가주와 함께 이름을 알리겠소.”
북해빙궁에서의 전투 소식은 곧 전 무림으로 퍼질 것이다.
그리고 흑풍대의 전설이 강했던 만큼 그들을 상대한 모용세가의 명성 또한 하늘을 찌를 것이다.
작게는 모용세가를 떠받드는 인근의 중소문파들과 민심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크게는 내몽고부터 북경, 하북, 요녕, 길림, 흑룡강 등 모용세가와 가깝고, 흑풍대의 명성을 아는 지역의 상단들이 모용세가와 거래를 하고자 줄을 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용세가는 상단과 관련된 수익은 물론이고 고려까지의 무역로를 확장하며 더 큰 부와 세력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희생이 따랐지만 그 희생을 상회하고도 남을 전투의 결과와 명성이 흑풍대라는 상대에게서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을 천애랑이 양보해준 것이었고, 이에 모용단은 양심상 천애랑과 합심해 흑풍대를 섬멸했다라고 공표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하더라도 세간의 사람들은 당연히 혼자인 천애랑보다 기병대를 이끈 모용세가의 활약이 더 컸을 거라고 자연스레 인지할 것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이해득실을 꼼꼼하게 따지는 성격들이 없다 보니 대화는 호쾌하게 흘러갔다.
“그나저나 주 대장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서 지원군을 보내줄지 몰랐소. 난 그저 하오문주가 주 대장의 지원을 받아냈다고만 들어서 말이오.”
천애랑은 차분하게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고 노에게 시선을 던졌다.
오늘만큼은 화운도 지친 하루였는지 옆에서 조용히 술을 입에 대고 있었다.
주원장 병사들의 희생이 적었던 것엔 두 사람의 노력이 매우 컸었다.
“원장이는 그 날 이후로 자네에게 마음의 짐을 갖고 있었다네. 마침 강남의 일이 잘 풀렸던 지라 여력이 생겨서 이렇게 올 수 있었다네. 아! 그리고 나는 자원해서 온 것이라네.”
천애랑은 고 노의 시선 속에서 일전에 이루지 못했던 대화의 연결을 느꼈다. 이에 천애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된다면.”
천애랑의 말을 이해한 고 노는 급한 마음을 비우고 가벼운 미소를 지어 화답했다.
“고맙네. 기다리겠네.”
북해빙궁주 설엄은 대화가 한 순배 도는 것을 지켜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크게 포권을 취하고 정식으로 감사를 표했다. 손안에는 술이 채워진 술잔이 가볍게 찰랑거렸다.
“이 자리의 모든 영웅들께 이 설 모가 다시 한 번 크게 감사를 표하오. 북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기꺼이 도움을 준 그대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북해의 얼음이 단단한 것처럼 북해 사람들의 신의 또한 단단하니 그 보답으로 머무는 동안 제발 편히 머물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을 하시오. 북해가 내어줄 것이 있다면 그 또한 기꺼이 내어드리리다.”
빙궁주 설엄은 마지막 말에서 시선을 천애랑에게로 던졌다.
천애랑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겠다는데 당연 마다할 이유 없고 안 준다고 했으면 꽤나 불편한 상황이 될 것이었다.
설엄은 활짝 웃으며 손에 쥔 술을 크게 털어 마셨다.
“흐아! 슬픔은 슬픔대로 두고 이렇게 모인 것도 매우 흔치 않은 만남과 인연이니 술로써 가까워져 봅시다! 오늘만큼은 내 보물인 빙화주(氷花酒) 창고를 기꺼이 열 것이오.”
설엄의 주도적인 태도에 장내의 분위기는 금세 술판이 되었다.
빙화주를 몇 순배 맛본 모용단과 고 노가 극찬을 하자 설엄은 껄껄 웃으며 그들이 죽마고우라도 된 양옆에 붙어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화운도 빙화주의 맛이 흡족한지 과묵한 태도를 조금은 벗어던지고 간간이 저들의 대화에 끼며 어울리고 있었다.
천애랑은 술을 음미했다. 그리고 저들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무림인이라는, 또는 넓은 범주로 무인이라는 족속들은 전투와 피, 그리고 슬픔과 같은 여러 것들을 저리 술 한 잔에 축하하고 또는 잊어가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마 바깥의 무인들도 지금쯤 빙궁주가 제공한 술을 마시며 삶을 이어갈 힘을 얻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피를 보며 살아갈 수 있는 건가.’
일반인들이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광경과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수행이 가능한 것을 보면 참 무인들도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천애랑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백두산에서 하산한 이후로 어느덧 이 손에도 많은 피가 묻었다.
그런데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죽여야 할 적들을 잘 죽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놓친 적들에 대한 아쉬움마저 있었다.
‘이게 맞는 건가.’
천애랑은 오랜만의 술 때문인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상념들이 있었지만 편안히 받아들였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싶었다.
그리고 죽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천애랑에겐 오늘이 좋은 날이었다.
‘드디어 소걸이를 치료할 수 있는 모든 재료의 약을 모았다.’
소림의 대환단, 팔각사의 화룡단, 그리고 북해빙궁의 빙백단으로 이어지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중원 동쪽에서 시작해 남쪽 끝과 북쪽 끝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 속에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젠 이곳에서 며칠 몸을 추스른 후 의각원으로 가서 신의들과 함께 약을 만들면 된다.
‘드디어.’
소걸이를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친 몸 상태임에도 힘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천애랑은 이내 욱신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무리해서 상단전을 사용한 후유증이었다.
상단전을 극성으로 개통하고 사용하는 제공권은 후폭풍이 심해 항시 부담이었다.
‘그래도 성과가 있었다.’
이런 상단전 사용의 후폭풍을 줄이기 위해서 천애랑은 틈이 나는 대로 꾸준히 훈련을 해왔었다.
소림에서 사천으로, 사천과 운남을 오가고 북해빙궁으로 오기까지 긴급한 상황이 아닐 땐 상단전을 단련하고자 무던히 노력을 했었다.
물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실전처럼 한계치까지 상단전을 열어보지는 못했지만 오늘, 흑풍대주를 상대로 훈련의 성과를 확인했다.
‘오늘과 같은 밀도를 유지한 채로 제공권의 공간을 넓힐 수만 있다면…….’
천애랑은 갑자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잠시나마 다음의 벽이 보이는 듯했다.
아버지인 천석산이 완벽히 이루지 못했다는 기공 6단계의 실마리가 느껴졌다.
나를 완벽히 다스리는 것을 넘어 상대방까지 완벽히 다스릴 수 있다는 기공 6단계 경지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제공권으로 거리를 격하고 움직이는 생물의 심장을 쥐어 터트릴 수 있었다고 했다.’
천애랑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간 무(武)에 있어서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해 고민이었었는데 오늘 그 안개가 조금은 걷히는 기분이었다.
아직 어떠한 훈련과 그 기간이 필요할지는 정확치 않으나, 이 벽을 넘는다면 오늘의 흑풍대주처럼 다시는 마교의 인물들을 아쉽게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 죽여주마.’
천애랑은 기대의 미소를 띠며 각오를 다졌다.
“천 가주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신가요?”
천애랑은 들리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와 옆을 쳐다봤다.
어느새 옆자리로 다가온 설화가 미소 짓고 있었다.
“아. 별것 아닙니다.”
천애랑이 기분 좋게 미소로 화답했다.
천애랑의 미소에 설화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하하! 역시 마음에 드네요.”
“……?”
“천 가주님의 미소가 마음에 든다고요.”
설화는 호탕하게 말하면서 천애랑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천 가주님 덕분에 많은 목숨들이 살았습니다.”
가볍다가 갑자기 진중해지는, 종잡을 수 없는 설화의 말과 표정에 천애랑이 다소 멍하니 대답했다.
“누군가만의 공로가 아니오. 짐작하다시피 난 특정한 대가를 원하고 도움을 준 것이기도 하고.”
“하하하! 음흉하지 않고 이런 시원시원함이라니! 더욱 마음에 드네요.”
설화는 설엄처럼 껄껄 웃으며 시원하게 술을 마셨다. 술잔은 천애랑의 것이었다.
“캬! 좋다!”
“……무슨?”
천애랑은 빈 술잔을 내미는 설화를 당혹감 속에서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뭘 하고자 하는지를 몰랐다.
그 모습에 설화가 또다시 껄껄 웃었다.
“귀여운 면도 있고! 좋다!”
설화의 일방적인 화법 속에서 천애랑은 얼결에 설화가 쥐여주는 술잔을 받았다.
쪼로록.
그리고 손안에서 순식간에 채워진 술잔을 보았다.
‘북해는 이런 식으로 술잔을 공유하며 마시는 건가?’
빙궁주와 그 옆의 인물들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지만 천애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술을 들이켰다.
“햐~.”
아까 다른 이들과 나눠마시던 빙화주도 일품이었는데 지금 마신 술은 좀 더 청량한 시원함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더 차가운 느낌이 있었다.
‘아! 빙공으로 시원하게 만든 건가?’
천애랑이 설화를 쳐다보자 그녀가 미소 띤 얼굴을 살짝 들이밀었다.
“맛있죠?”
천애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에 설화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천애랑의 손에서 술잔을 가져갔다. 그리고 천애랑에게 빈 잔을 까닥였다.
“뭐해요? 한 잔 따라주세요.”
천애랑은 피식 웃으며 설화의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이래저래 좋은 날이 아닌가.
“줘보시오.”
천애랑은 다시 설화에게서 잔을 가져온 후 술을 따르고 화기(火氣)로 술을 데웠다. 그리고 다시 건넸다.
설화는 곧장 술잔을 받아 마셨다.
“캬아~! 따뜻한 술도 일품이네?! 좋다. 좋아!”
설화는 기분 좋은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돌연 ‘쾅!’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즐겁게 술을 마시던 빙궁주와 모용단, 고 노와 화운이 의아함의 시선을 모았다.
설화는 천애랑을 향해 호탕하게 웃으며 크게 말했다.
“천 가주! 나랑 혼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