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83화
천애랑의 말에 모용단은 자신의 애마와 천중모용대를 더욱 채근했다.
모용(慕容)이 새겨진 하얀 경장과 피풍의가 펄럭이며 더욱 속력을 내었다.
무림 최고의 기병인 흑풍대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북방에서 항시 말을 타고 다니며 도적들을 상대했던 모용의 기병들도 만만치 않았다.
광활한 설원 위 흑과 백의 추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 도망치던 흑풍대가 돌연 양쪽으로 갈라져 선회했다.
그 방향전환의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천중모용대가 미처 반응할 경황이 없었다.
순식간에 천중모용대가 흑풍대가 갈라진 길을 따라 달리게 됐다.
그와 동시에 양 날개 너머로 선회하고 다시 합쳐진 흑풍대가 천중모용대 뒤를 잡게 되었다.
모용단은 흑풍대의 엄청난 기동전술과 수행능력에 적잖이 당황했다.
말이라는 존재가 무림인들처럼 급격한 방향전환이 불가능한 것이 당연함에도 흑풍대는 마치 그렇게 말을 다루었다.
“크악!”
뒤를 잡힌 천중모용대의 후미가 흑풍대에 의해 당하기 시작했다.
말의 특성상 직진으로밖에 달릴 수가 없기에 비슷한 조건이라는 가정하에 후방에서 추격해오는 이가 공격에 더 유리한 것은 당연했다.
모용단은 인상을 쓰면서 전략을 강구했지만 현 상황에선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보다 더 속력을 낼 수도, 바로 뒤로 돌아 공격을 받아칠 수도, 산개해서 적의 공격을 피하기도 어려웠다.
심지어 산개를 한다면 개개인의 무력이 매우 강하다 알려진 흑풍대에 의해서 각개격파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장애물이라도 있다면 방향전환들로 적을 혼란시킬 시도라도 해보겠지만 여기는 허허벌판 설원이었다.
지금 당장으로썬 그저 최선을 다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으악!”
또다시 흑풍대에 당한 천중모용대원의 비명이 들리자 모용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천애랑이 모용단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단화대협. 그대로 달리다가 상황을 봐서 적을 공격하시오.”
천애랑은 모용단의 어깨를 가볍게 집고 일어서며 말의 엉덩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천 가주!”
천애랑의 갑작스런 행동에 모용단이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천애랑은 어느새 다른 천중모용대원들의 어깨를 가볍게 밟아가며 후미로 가고 있었다.
천애랑은 달리면서 시선은 가장 선두에 있는 흑풍대주에 고정했다.
흑풍대주 또한 달려오는 천애랑을 지켜봤다.
둘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흑풍대주는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흑풍대주의 애마는 주인의 강한 허리 비틀림에 놀라며 투레질을 했다.
까앙!
흑풍대주의 검과 천애랑의 손바닥이 강하게 부딪혔다.
천애랑은 이화접목의 수로 흑풍대주의 검을 끌어당기며 발경을 날렸다.
파앗!
흑풍대주는 발경을 날리는 천애랑의 손바닥을 받아치며 말에서 몸을 높이 띄워 충격을 흡수했다.
천애랑은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흑풍대주를 향해 신룡지탄을 날렸다.
그러자 흑풍대주는 검으로 쳐냈고, 자연스레 더욱 천애랑과 거리를 벌리게 됐다.
천애랑은 멀어진 흑풍대주를 바로 쫓아가지 않았다.
천애랑은 달리는 말 위에서 양손에 광폭환을 만들어 적진의 중심들을 향해 던졌다.
콰과과광!
대처하지 못한 폭발에 질서정연하던 흑풍대의 진열이 무너졌다.
그제야 천애랑은 천근추로 흑풍대주의 애마를 강하게 밟으며 뛰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흑풍대의 말들을 노리고 뇌기를 강하게 발산했다.
파지지지직!
히이이잉!
갑작스런 전류에 말들이 놀라 소리치며 앞다리를 크게 들어올렸다. 흑풍대에 완벽한 혼란이 찾아왔다.
“날개 산개! 회(回)! 쐐기돌파!”
모용단은 천애랑의 행동과 추격이 느슨해진 결과를 지켜보고선 즉시 명을 내렸다.
천중모용대는 흑풍대가 그랬던 것처럼 양쪽으로 나뉘며 크게 돌았다.
다만 차이점은 후방을 점하기 위함이 아니라 양쪽에서 공격을 하고자 함이었다.
천중모용대는 말 등에 바짝 엎드린 상태로 오직 돌파를 위한 기마술을 부렸다.
콰드득! 콰드드득!
천중모용대가 기마전술 중 가장 돌파력이 좋다는 쐐기형으로 흑풍대의 양 옆구리를 찌르며 교차하자 말발굽에 밟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전마 자체가 무기였다.
저항하는 흑풍대에 의해 천중모용대원이나 그 말들이 크고 작은 검상을 입기도 했으나 흑풍대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회(回)! 쐐기돌파!”
모용단의 명에 흑풍대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던 천중모용대가 재차 말머리를 돌렸다.
동시에 부상자는 뒤로 빠지고 멀쩡한 이들이 자연스럽게 선두의 자리를 채우며 진형을 유지했다.
천애랑으로부터 시작된 아비규환의 힘이 천중모용대에 이어지면서 흑풍대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설원 위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메아리쳤다.
이런 흑풍대와 천중모용대의 상황과 별도로 천애랑은 흑풍대주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쉬시쉭!
흑풍대주의 검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고 천애랑은 그걸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검강의 파편이 그 궤적의 공기를 뜯어내듯 거칠게 날뛰었지만 천애랑의 호신강기에 한 줌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천애랑은 흑풍대주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금나수를 펼쳤다.
파팟!
천애랑의 손이 흑풍대주의 검을 든 손목을 잡으려 하자 흑풍대주는 팔을 접어 피했다.
그는 그대로 검을 역수로 바꿔 쥐어 짧게 휘둘렀다.
천애랑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검을 피했다.
동시에 흑풍대주의 다리를 노리고 깊게 신룡선풍각을 펼쳤다.
흑풍대주의 균형이 순간적으로 무너졌다.
천애랑은 곧장 몸의 탄력을 이용해 신룡승천각으로 흑풍대주를 차올렸다.
빡!
공격을 허용한 흑풍대주가 허공에 뜬 상태로 재빨리 몸의 균형을 잡으며 난화흑풍검(亂花黑風劍)을 펼쳤다.
난화흑풍검은 본래 난화흑풍창이 본류였으나 흑풍대주가 북해빙궁주에게 창을 던져버렸기에 부득불 검으로 기술을 펼치는 것이었다.
특색은 엄청난 위력의 강기를 쉼 없이 쏘아내는 것이었다.
천애랑은 흑풍대주의 흑색 검강에 마주 수강을 날렸다.
까가가가강!
둘의 공간에서 무지막지한 기의 충돌이 일어났다.
천애랑은 엄청난 횟수의 수강을 날렸음에도 이를 초과해서 날아오는 흑풍대주의 검강을 보았다.
천애랑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그러자 흑풍대주의 검강이 허공에서 방향이 틀어져 다른 곳을 강타했다.
천애랑이 대기의 결을 조작해 공간을 순간적으로 일그러뜨린 것이었다.
그러자 인근에 있던 다른 흑풍대가 봉변을 당했다.
“크아아아!”
“피해!”
흑풍대주는 바닥에 착지하고선 재빠르게 호흡을 조절했다.
난화흑풍의 술은 공격력이 좋은 대신 내기의 소모가 너무 컸다.
하지만 천애랑은 틈을 주지 않고 뇌룡강림과 축지법으로 흑풍대주에게 단숨에 다가왔다.
신룡군림보(神龍君臨步).
천애랑의 진각에 흑풍대주는 미처 호흡과 내기를 정비하지 못하고 막대한 내기의 압력을 받아내야 했다.
압(壓).
“크윽!”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을 짓던 흑풍대주의 표정이 격하게 일그러졌다.
흑룡아(黑龍牙).
흑풍대주의 몸에서 광폭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나오며 천애랑을 할퀴어 왔다.
“흐읍?!”
천애랑은 몸을 찢어발길 듯 덮쳐오는 흑풍대주의 기운에 놀라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충분히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천애랑은 거칠게 찢어진 앞섬을 내려다보곤 흑풍대주를 바라봤다.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키는 흑풍대주에게서 불길해 보이는 흑색 내기와 살기가 함께 넘실거리고 있었다.
‘엄청난 살기.’
흑풍대주의 살기는 내기랑 만나 유형화가 된 것인지 ‘파가각’ 소리를 내며 주변 바닥과 눈을 난자하고 있었다.
‘저 살기가 유형화되어 공격거리를 늘린 건가.’
천애랑은 일어선 흑풍대주의 공격을 대비했다.
만약 흑풍대주가 공격을 해온다면 머리로 가늠한 회피 범위보다 더 크게 피하고 뇌전으로 행동의 제약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숨에 바람의 결을 이용한 날카로운 수강으로 적의 목을 베고자 계획했다.
하지만 흑풍대주는 천애랑의 예상과는 다르게 천애랑을 크게 피하고선 흑풍대와 천중모용대가 격전을 벌이는 장소로 날 듯이 뛰어갔다.
“이런!”
예상과 다른 흑풍대주의 행동에 천애랑은 인상을 썼다.
손안에는 급히 휘둘러 취한 흑풍대주의 옷 조각과 살점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살을 내주고 다른 행동을 취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반응이 늦어버렸다.
천애랑의 반응이 늦은 만큼 전장의 비명이 많아졌다.
“크아악!”
“으억!”
흑풍대와 격전을 벌이던 천중모용대는 괴물 같은 흑풍대주의 등장에 크게 당황했다.
최초 몇 번의 돌격에선 말을 탄 천중모용대와 기마의 전술을 잃어버린 흑풍대와의 차이가 있어 천중모용대가 큰 이득을 가져갔었다.
하지만 개개인의 경지가 높은 흑풍대가 정신을 수습하자 이내 두 진형 간은 팽팽한 접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접전의 중심으로 흑풍대주가 뛰어들자 양상은 순식간에 흑풍대로 기울어 버렸다.
쿠르릉!
천애랑이 뇌룡강림으로 순식간에 모용단의 앞에 나타나서는 휘둘러오는 흑풍대주의 검을 받아쳤다.
흑풍대주는 자신의 검이 막히자 지체하지 않고 다른 장소로 몸을 날렸다.
마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전장의 승리만큼은 가져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듯했다.
“대원들을 챙기시오.”
천애랑의 말에 모용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모용단 그는 나름 초절정의 경지에서 꾸준히 정진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천애랑과 흑풍대주의 경지를 보니 말문이 막혔다.
천애랑은 즉시 흑풍대주를 따라갔다.
흑풍대주의 유형화된 살기의 검격에 또다시 천중모용대원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까앙!
흑풍대주의 이동을 따라잡은 천애랑이 그의 검격을 막아냈다.
흑풍대주가 지체 없이 다른 곳으로 몸을 날렸다.
까앙!
흑풍대주는 절대 천애랑을 상대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은 듯이 움직였다.
그러면서 약자만을 찾아 사냥했다.
천애랑은 빠르게 흑풍대주를 따라잡고선 그의 검을 막아냈다.
덕분에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천중모용대 대원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흑풍대주가 또다시 천애랑에게서 도망치듯 움직이고 천애랑이 쫓아가 막는 상황이 반복됐다.
천애랑은 연신 흑풍대주의 검을 막아내면서 인상을 썼다.
흑풍대주의 행동방식도 문제였지만 거센 강기의 충돌에 따른 강기의 파편들이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대체로 경지가 높은 흑풍대원들은 강기의 파편을 곧잘 막아내 몸을 지키는 반면,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천중모용대원들은 강기의 파편에 낭패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흑풍대주를 놔두고 흑풍대만 노릴 수도 없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흑풍대를 다 죽인다 한들 모용세가의 무인들도 전멸할 것이었다.
아무리 마교에 대한 복수가 중요한들 자신을 돕기 위해 멀리서 온 이들 모두를 희생시켜 얻을만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또 기회는 올 것이다.
“후퇴한다! 모두 피해라!”
천애랑과 동일하게 상황을 읽은 모용단이 다급히 외치며 대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콰과광!
천애랑은 흑풍대만 모인 곳에 냅다 광폭환을 던져 혼란을 야기 시켰다.
그리고 흑풍대주를 쫓으면서 상단전을 모두 개방시키고 모든 기운을 제공권으로 끌어모았다.
천애랑은 제공권의 공간을 최대한도로 압축시켰다.
제공권의 공간이 압축될수록 그 공간에 대한 지배력의 밀도가 높아졌다.
천애랑은 세 걸음(3步)의 공간만큼 제공권을 줄였다.
소림에서처럼 천애랑의 눈에 흰자위가 가득했다가 뇌기의 영향으로 홍채가 금빛으로 빛났다.
연신 천애랑에게서 도망치듯 움직이던 흑풍대주는 지독하리만큼 오싹한 기운에 놀라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넘실거리는 내기와 살기로 주변을 감지하던 흑풍대주의 초감각이 찰나에 사라지면서 아득한 감각의 무(無)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콰지직! 으드득!
전장을 울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흑풍대주의 왼팔이 어깨까지 통째로 뜯어져 날아갔다.
‘머리를 노렸건만.’
천애랑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즉시 몸을 돌려 천중모용대를 챙기는 모용단에게로 달려갔다.
흑풍대주를 확실히 끝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흑풍대주의 부상을 인지하는 순간 흑풍대원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흑풍대주에게 아득바득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좀 전의 제공권과 그에 따른 공격의 여파로 엄청난 피로와 탈진감이 느껴졌다.
천애랑은 거리를 벌리며 흑풍대주를 보았다.
그는 다른 흑풍대원의 응급처치와 부축을 받으면서 천애랑에게 진득한 살기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천애랑은 흑풍대주만 볼 수 있게 나지막이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다음엔 반드시 죽인다. 기다리고 있어라.’
천애랑의 입모양을 읽은 흑풍대주는 분노의 살기를 내뿜다가 역류하는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