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81화
설엄은 우선 측면 성벽을 기어오르는 무인들을 향해 각 한 방씩 화살을 날렸다.
쒜에엑---!
콰광!
아직 회복되지 않은 단전의 내공 때문에 설엄의 화살은 처음보다 위력이 약해져 있었다.
그래도 성벽에 오른 무인들을 날려버리기엔 충분했다.
“끝내 움직이지 않는다라…….”
설엄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흑풍대를 일별했다.
“모두 마을로 후퇴!”
설엄의 명에 빙궁의 전사들이 일제히 성벽을 내려와 시가전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마을로 후퇴했다.
설엄 또한 망루에서 뛰어내려 마을 건물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잠시의 적막이 찾아왔다.
성벽을 두드리던 적의 움직임이 조용해지더니 공격이 성문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아무런 방해가 없으니 성문은 금방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빼꼼히 열리기 시작하던 성문은 결국 부서져 열렸다.
성문을 통해 이내 적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저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 말에 내린 무인들을 필두로 기병들이 따라 들어왔다.
“후우.”
설엄은 짧은 심호흡과 함께 내공을 차분히 끌어올리고선 화살에 집중했다.
우우웅!
화살촉에 모이는 기의 파동이 심상치 않았다.
잠시간 회복한 내공을 바탕으로 설엄은 적들이 들어오는 정문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연이어 마지막 남은 화살 2개도 마저 쏘았다.
쎄에에에------!
강맹한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크아악!”
“아악!”
“피해!”
콰광!
설엄의 화살을 검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무인들도 있었지만 강기의 묘리가 담긴 화살을 막아낼 순 없었다.
“쏴라!”
혼란은 끝이 나지 않았다.
설엄의 명에 따라 건물 곳곳에 숨어있던 빙궁의 전사들이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화살들을 쏘아대자 순식간에 정문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사람과 말들의 시신이 정문 앞과 곳곳에 쌓이자 기병들의 기동성이 오히려 저하되었다.
그러자 마교 무인들은 말에서 내려 가까이 있는 건물들 사이로 산개, 은폐했다.
완전한 시가전이 시작되자 빙궁 전사들은 건물 사이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면서 치고 빠지기 시작했다.
설엄도 좁은 골목에서 방해되는 활을 치우고 적수공권으로 적들을 상대했다.
“죽어라!”
끊임없이 몰려드는 적들에 의해 빙궁의 전사들은 한 사람당 기본적으로 4~5명 이상을 쉼 없이 상대해야 했다.
“무너뜨려!”
설엄은 명과 함께 건물들을 무너뜨렸다.
다른 전사들도 합심하여 일제히 건물들을 무너뜨리자 다시 한 번 전장에 혼란이 찾아왔다.
쿠루루루릉---
“퇴(退)!”
사전에 작업해놓아 쉽게 무너지는 건물들을 뒤로 하고 설엄과 전사들은 내성 방향으로 조금 물러났다.
화살 공격과 지리적 움직임, 건물의 붕괴까지 이어지자 마교 무인들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잠시의 소강상태 이후에 마교 무인들이 다시금 접근을 시작했다.
이에 설엄과 빙궁의 전사들은 재차 적들을 각개격파하다가 건물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반복했다.
설엄은 지지부진 이어지는 시가전의 양상에 미소를 지었다. 시간을 끈다는 목적을 착실히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적의 숫자가 한 번에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성문과 기병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환경, 말이 없는 적들은 빙궁의 전사들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경지라는 것들이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주 요인이 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더는 무너뜨릴 건물이 얼마 남지 않았고 곧 내성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자신들이 이 정도까지 가까이 왔음에도 내성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니 내성에도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후방의 침투라도 막고 있는 것인가.’
설엄의 생각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지지부진 흘러가는 시간을 더는 참지 못한 흑풍대가 정문을 통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흑색 일변의 무인들이 등장하자 전진에 애를 먹던 다른 무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일제히 길을 텄다.
철저한 상하관계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경지의 차이도 느껴졌다.
가장 중심에서 오연하게 걸어 들어오는 흑풍대주를 차치하고서도 그의 측근에 있는 흑풍대는 최소 절정의 경지 이상은 되는 듯했다.
개중엔 초절정으로 추측되는 기운들도 여럿 있었다. 아마 저들이 흑풍대를 전설로 만드는 핵심 전력들이리라.
“흐음…….”
설엄은 침음을 흘렸다. 숫자도, 평균적인 경지도 밀리는 상황에 잠시 작전을 고민했다.
그때 흑풍대주의 목소리가 무너진 마을 전체를 울렸다.
“늑대라고 해놓고 꽤나 여우 같은 짓을 하더군.”
북해빙궁주 설엄은 흑풍대주가 자신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몸을 숨겼던 건물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몸을 드러내기 전 전음으로 인근 전사들에게 후퇴를 명했다.
시가전에서도 사상자가 늘어 현재는 40명도 채 남지 않은 전사들이었다.
자식들처럼 훈련시키고 지내왔던 전사들 하나하나의 죽음이 빙궁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빙궁주는 최대한 전사들의 희생을 막고 싶었다.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동안 전사들이 후퇴하면 자신도 내성으로 몸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습을 드러낸 빙궁주는 피와 흙으로 점철돼있었다. 그의 하얀 모피도 매우 지저분했다.
그러한 빙궁주를 흑풍대주는 그저 차갑게 쳐다봤다. 비웃음 등의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인정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많은 무림인들은 허영심에 가득하지. 나려타곤은 수치스럽다, 검이 최고다, 암기는 비겁하다, 갑옷은 겁쟁이다, 활은 약하다, 결과보다 아름다운 과정이 중요하다, 세 외의 세력은 무지한 야만인들이다. 이런 생각들을 말하지.”
설엄은 조용히 흑풍대주의 말을 들었다. 시간을 끌어야 하는 입장에서 굳이 상대방의 말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흑풍대주가 자신의 애병인 창을 지그시 바라봤다.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는 적들은 모두 죽었다.”
흑풍대주가 다시 빙궁주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전쟁에 있어서 이런 어리석은 생각 따위가 낄 자리는 없다. 생(生)과 사(死),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전쟁이야. 그 방법으로는 오직 살(殺)만 존재할 뿐이니 아름다운 과정 따위가 낄 자리는 없지. 살기 위해, 또는 적을 죽이기 위해 나려타곤이 필요하다면 해야 하지. 그렇지 않나? 빙궁주여.”
빙궁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크흐흐. 이런 미친 생각을 하는 무림인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맞는 말이네.”
이에 흑풍대주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도 마찬가지야. 어떤 종류와 방식을 사용하든 결국 적을 죽이고 내가 살면 될 일이지.”
“그것도 맞는 말이지.”
빙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외세력도.”
흑풍대주의 목소리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중원정벌을 하는 데 있어서 무시해도 되는 무지하고 약한 야만인들이라고 폄하하지만 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암과 같아서 가만히 두면 언젠가 주인을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전에 싹을 자르는 게 좋다고 말이야.”
설엄은 자신들에게 왜 지금과 같은 전쟁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았다.
왜 흑풍대가 과할 정도의 전력을 이끌고 와서 자신들을 공격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저들이 생각하는 자신들의 미래는 결국 죽음뿐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를 그렇게나 중요하게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네만 별로 달갑지 않은 상황이로군.”
설엄은 흑풍대주의 말을 차갑게 받아쳤다.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이던 흑풍대주 초여운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지금 이 모습을 마교의 대계를 늦추는 어리석은 놈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놈들이 무시하던 세외의 북해빙궁이 무지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고 생(生)과 사(死)의 전쟁을 잘 아는 진정한 전사라는 것을 말이야.”
흑풍대주의 눈이 순간 진득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이들을 살려두면 결국 우리의 대계에 위험이 되리라는 것을 말이야.”
흑풍대주가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창을 날렸다. 다른 흑풍대도 일시에 들고 있던 창을 힘차게 날렸다.
쎄에에에에에에------!
“이런! 피해!”
설엄은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흑풍대주의 창을 빙백신장으로 간신히 쳐내었다.
“크윽!”
설엄은 엄청난 반탄력에 피가 터진 손을 신경 쓸 겨를 없이 주위를 살폈다.
쿠콰쾅! 카가강!
“컥!”
“으악!”
콰광!
“크헉!”
북해빙궁주 설엄은 보았다.
자신의 주위에 있던 건물들이 흑풍대의 창들에 의해 반파되었음을.
그리고 산산조각 난 건물들처럼 자신과 적들을 막아오던 빙궁의 전사들이 모두 창에 맞아 죽었음을.
북해빙궁주는 슬픈 눈으로 죽은 전사들을 위로했다.
북해의 얼음이 아무리 차갑다지만 한 가족처럼 동고동락했던 전사들의 죽음이 가벼울 린 없었다.
북해빙궁주는 뜨거운 분노를 차갑게 끌어안았다.
북해빙궁주의 몸을 중심으로 한기가 거세게 몰려들었다.
휘이잉------
갑작스런 극한의 한기가 뚫린 정문으로 날서 들어오면서 흑풍대와 마교의 무인들을 자극시켰다.
“아직 그럴만한 기력이 있었는가. 허나 만용이로군. 간만에 전쟁을 아는 이라고 생각했는데 사(死)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니.”
핏발이 선 눈으로 폭주시키듯 내공을 일으키는 북해빙궁주를 보며 흑풍대주는 차갑게 반응했다.
“그래도 자연을 지배하는 듯한 이 무공만큼은 일품이로군.”
한기(寒氣)가 한풍(寒風)을 일으키더니 한설(寒雪)까지 만들어냈다. 돌연 북해빙궁의 위로 싸라기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때 내성에서 설화가 설엄에게로 다급히 뛰어왔다. 그녀는 갑작스런 싸라기눈을 보며 놀란 눈을 했다.
“왜 왔느냐.”
설화는 차갑게 분노하는 설엄을 보며 빠르게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전멸한 빙궁의 전사들과 흑풍대를 보니 대강의 상황이 그려졌다.
왜 적들의 후방 침투 시도가 돌연 잠잠해졌는지도 동시에 이해가 됐다.
“흑풍대…….”
설화는 침음을 흘렸다. 가까이서 마주하는 흑풍대 전체의 기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아버지. 내성으로 물러납시다.”
설화는 극한의 빙백신장을 준비하는 설엄을 말렸다.
선천지기까지 써가며 기를 모으는 아버지도 문제였지만 그런 모습을 태연하게 기다려주는 흑풍대주와 흑풍대가 더 문제였다.
생명을 건 아버지의 일격이 어쭙잖은 주변 무인들한테야 효과를 볼진 몰라도 흑풍대 저들에겐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라지 않았습니까. 지원군이 올 거라면서요!”
설엄은 딸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지 않는 지원군과 죽어간 전사들, 그리고 지쳐가는 몸 때문에 하오문주 서신에 대한 믿음에 회의감이 들었다.
“……딸아. 지원군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자리에서 양패구상이라도 이룰 것이니 필요하다면 주민들을 데리고 도망칠 생각을 하거라. 만약 그조차도 힘들다면 너라도 살아남거라. 그리고 북해의 긍지를 이어다오.”
최후를 준비하는 설엄을 보며 설화가 인상을 썼다.
“나약한 말 마세요, 아버지. 북해의 늑대는 가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버리지 않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스릉.
설화는 설엄의 옆에 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까짓거 죽더라도 우리의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 제대로 보여주죠.”
흑풍대주는 설화의 패기 넘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부견자 없다더니 좋다. 적이지만 경의를 표하며 모두 죽여주마. 흑풍대!”
“흑풍대!”
흑풍대주의 부름에 300명의 흑풍대들이 일제히 복명복창을 했다.
외침에서 나오는 내기의 공명이 이들의 사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이에 대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구구구구구
흑풍대주는 흑풍대 특유의 기세를 느끼며 명을 내렸다.
“섬멸하라!”
흑풍대주의 명에 흑풍대가 일제히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뒤에 시립해 있던 기병들도 검을 들고 뒤따랐다.
혈교 기병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혈교라는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흑풍대의 압도적인 무력과 지도력에 감응한 상태였다.
이들은 마치 원래부터 마교의 전사들인 것처럼 크게 외쳤다.
“모두 섬멸하라!”
“마도천하를 위하여!”
“으아아아아!”
광적인 굉음과 함께 빠르게 다가오는 적들을 보며 설엄과 설화는 죽음을 각오를 했다.
내궁 밖에서의 빙궁주와 공주의 결사항전 사태에 내성에서 농성을 준비하던 전사들이 다급히 뛰쳐나왔다.
흩날리는 싸라기눈 속에서 은빛과 검은빛이 강하게 충돌하려 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이들의 사이로 엄청난 속도의 금빛섬광이 떨어져 내렸다.
쿠르릉!
번쩍이는 빛을 인지한 다음으로 천둥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돌격하던 양 진형이 모두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 한 인영이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