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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80화 (80/200)

기공술사 80화

나지막한 어투였음에도 흑풍대주의 목소리는 상당한 거리를 격하고 성벽 위로 또렷하게 들려왔다.

흑풍대주의 심오한 내공에 설엄은 놀라면서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호승심이 들었다.

“그렇네만. 이 많은 인원이 볼 것도 없는 이 먼 곳까지 어인 일로 찾아왔는가?”

빙궁주 또한 흑풍대주처럼 내공으로 목소리를 전달했다.

대신 더 긴 문장을 말함으로써 무(武)의 경지를 더 뽐냈다.

이에 설화와 빙궁의 전사들이 기세 좋게 흑풍대주를 노려봤다.

흑풍대주는 이런 북해빙궁의 태도를 무시하며 예의 차가운 태도로 할 말을 했다.

“북해의 얼음이 꽤나 차갑다고 들었다. 마도천하 아래서 따뜻함을 찾아보는 게 어떤가.”

“뭐? 크하하하하하!”

흑풍대주의 말에 빙궁주가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곤 비웃듯이 말했다.

“설원의 늑대가 어찌 개새끼의 아래에 들어갈까. 세상이 비웃을 일이다.”

솨아아아아------

빙궁주의 말에 시종일관 차가운 평정심을 유지하던 흑풍대주의 몸에서 스산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살기가 빙궁 전사들을 덮치자 모두 움찔거렸다.

수십, 수백의 살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매우 농도 깊은 살기였다.

그 모습에 빙궁주는 이빨이 보이게 웃으며 마주 기운을 풀었다.

고오오오오------

빙궁주의 기운에 바람소리와 비슷한, 어찌 보면 늑대 울음소리와도 비슷한 공명음이 일었다.

이에 빙궁을 덮쳤던 흑풍대주의 살기가 밀려났다.

빙궁주 설엄이 흑풍대주 살기의 저항력을 음미하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개새끼가 꽤나 이빨이 날카롭구나.”

“후회할 것이다.”

흑풍대주는 사납게 빙궁주를 노려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히이잉.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점점이 멀어지는 흑풍대주의 뒷모습을 빙궁주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흑풍대가 향하는 곳엔 기병들이 절도 있게 진형을 정렬해 있었다.

눈으로 세지지도 않는 기병들의 중심엔 흑풍대주와 같이 흑색 일변의 인물들이 보였는데, 멀리서도 느껴질 만큼의 날 선 기도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얼핏 보이는 흑풍대의 수는 300명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에게선 거의 3천이 다 되는 나머지 기병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명불허전이구만.”

설엄이 감탄 섞인 혼잣말을 했다.

옆에서 설엄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설화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흑풍대주라는 자, 적만 아니면 신랑으로 삼고 싶은데요? 생긴 것을 보아하니 나이도 그렇게까지 많아 보이지 않는데 말이죠.”

종잡을 수 없는 딸의 화법에 설엄은 잠시 인상을 쓰고 멍하니 있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깔깔거렸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에휴. 헛소리 말고 준비나 해라.”

설엄은 고개를 흔들어 딸의 끔찍한 농담을 머릿속에서 지워내고는 최종적으로 수비의 상황을 점검했다.

그리곤 그는 가장 높은 망루로 올라갔다.

넓은 설원을 가운데에 두고 양 진영에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적막을 깬 것은 흑풍대주 초여운이었다.

그는 찬호의 검과 동일한 광석으로 만들어진 검은 창을 들어 올리며 찌르듯이 전방을 가리켰다.

“돌격.”

나지막하고 짧은 그의 말에 흑풍대를 제외한 기병들이 일제히 내달렸다.

폭풍과도 같은 질주에 혈교에서 합류한 3천여 기병들의 붉은 피풍의가 일제히 펄럭이며 장관을 만들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붉은 깃털들이 북해빙궁을 포위하듯 일제히 횡으로 산개했다.

너무 많은 기병 숫자에 자연스레 층층이 열(列)이 생겼다.

빙궁주 설엄은 생각보다 더 많게 체감되는 적의 수를 보며 집중을 했다.

“모두 준비!”

빙궁주의 말에 전사들은 전방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시위에 장전했다.

설엄은 적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사전에 작업해놓은 얼음해자를 피하기 위해 첫 번째 열의 기병들이 말과 함께 뛰어오르려는 순간 설엄은 크게 외쳤다.

“지금!”

쏴아아아아아아아------!

300여 개의 화살이 일제히 쏘아졌다.

엄청난 정확도와 위력을 가진 화살들에 1열의 기병들이 고꾸라졌으나 그 위를 2열이 뛰어 넘으며 그들의 매서운 행진은 이어졌다.

“자유 속사!”

설엄은 명령과 함께 망루 한쪽 기둥에 세워뒀던 거대한 활을 집어 들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키만큼 큰 활의 활시위는 천잠사에 특수한 공법이 더해져서 어지간한 힘으로는 당길 수도 없는 장력을 자랑했다.

그 강도가 높기로 유명한 천잠사가 들어갔기에 위급 시엔 휘둘러 무기로 사용해도 무방했다.

설엄은 하나하나가 창이라고 봐도 무방한 화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성벽 좌측으로 돌아가려는 적의 진행 방향 전방으로 활을 조준했다.

끼기기긱!

거친 마찰음이 들림과 동시에.

쒜에에에에엑!

화살이 강맹하게 회전을 하면서 목표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피해!”

기마대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크아악!”

설엄은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다음 화살을 시위에 걸며 우측으로 돌아가는 적들의 앞을 노렸다.

쒜에에에에엑!

콰과광!

화살 하나씩에 벌어진 폭발이라곤 믿어지지 않는 파괴력에 양측으로 돌던 기병들에게서 사상자가 생기며 진형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내 기병들은 크게 폭발범위 바깥으로 우회하며 접근을 이어갔다.

설엄은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양측으로 화살을 쏘았다.

쒜에엑!

콰과과광!

또다시 폭발에 의해 기병들이 주춤거릴 때 설엄은 활을 놓으며 설화를 보고 외쳤다.

“딸아 아비는 좌측으로 간다! 조심해라!”

“아버지도 조심하세요!”

설엄의 외침에 설화가 대답을 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설엄과 설화는 동시에 양 성벽 끝으로 달려가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한 마리의 새처럼 활짝 몸을 피며 뛰어내리던 설엄의 몸이 하얗게 빛이 났다.

그 빛은 그의 양손으로 모이고는 이내 선두 기병들을 향해 쏘아졌다.

“흐아아압!”

설엄의 손에서 극한의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콰자자작!

극한의 한기에 선두로 달리던 열 명 남짓한 기병들이 말과 함께 달리던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치 얼음 조각상처럼 전신이 굳은 기병들의 곁엔 그 한기의 여파로 신체 어느 한 부위가 얼은 말과 무인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북해빙궁을 무림사에 알린 대표적인 무공이자 빙공(氷功)의 최고봉에 위치한 빙백신장이었다.

설엄의 압도적인 무위에 성벽 좌측으로 우회 공격을 하려던 기병들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수많은 기병들의 기세에 멈췄던 흐름이 다시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더럽게 많기도 하군.”

화살 공격까지 포함해 기껏 30~40명 정도 전투불능을 만들었지만 그 뒤로 밀고 들어오는 수백의 기병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설엄은 재빨리 내기를 끌어모으고는 양손으로 설원 바닥을 내리쳤다.

쿠드드드드득!

설엄의 손에서 시작된 얼음 기둥이 다가오는 기병들을 향해 거대하게 솟아올랐다.

횡으로 넓게 펼쳐진 얼음기둥에 말의 발이 묶이자 말 위의 무인들이 검을 뽑아 들고 일제히 뛰어올랐다.

그 모습에 설엄이 비웃었다.

“크하하! 북해의 추위도 모르는 애송이들이 말이야!”

설엄은 다시금 내기를 집중시킨 양손으로 솟아오른 기둥을 강하게 후려쳤다.

얼음을 부수는 요령이라도 있는 것인지 설엄의 손짓에 따라 두꺼운 얼음기둥이 손쉽게 갈려 나갔다.

콰장창창!

얼음기둥이 물이 될 정도로 잘게 부서져 넓게 흩뿌려졌다.

이에 최소 2~300의 기병들이 갑작스런 물세례를 받았다.

“으흠?!”

“뭐지?”

검을 들고 설엄을 공격하려 했던 무인들과 뒤따르던 기병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설엄의 공격들이 무지막지했기에 당연히 강맹한 공격이 또 오겠구나 싶어서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런 기병들의 모습을 보며 설엄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북해에 온 걸 환영한다. 개새끼들아! 빙백신장!”

아까보다 더 강대한 한기가 설엄의 손바닥에서 광범위하게 뻗어나갔다.

솨아아아아아아------!

와드드드드드드드드------!

지척에 있던 무인들이 검을 든 상태로 얼음 조각상이 되었고 물을 맞은 기병들은 극강의 한기에 몸이 얼어갔다.

갑작스레 폐까지 한기가 차서 즉사한 무인들이 있는 반면 내공으로 몸을 보호해 빙백신장의 한기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무인들도 있었다.

설엄은 텅텅 빈 단전을 느끼며 재빨리 성벽으로 후퇴했다.

멋있게 내려온 것과는 상반되게 냉기의 접착력을 이용해서 기어오르듯 성벽을 올랐다.

설엄은 성벽 위로 올라오자마자 정문을 지키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연신 화살을 쏘아대는 빙궁의 전사들을 보았다.

몇몇은 기병들이 날린 창에 맞았는지 쓰러져 있어서 설엄의 입이 써왔다. 자식과도 같은 전사들이었다.

“아버지!”

마침 반대 방향에서 망루로 먼저 올라온 설화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 착검하며 설엄을 불렀다.

“다친 덴 없느냐?”

딸에 대한 설엄의 걱정 어린 말에 설화가 자신의 이두근을 두들겼다.

“그럼요.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습니다.”

허세 가득한 말과는 다르게 설화도 연이은 내공소모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설화의 허세에 설엄이 마주 미소를 지었다.

“흑풍대는?”

설엄은 망루에 오르며 흑풍대부터 찾았다.

흑풍대는 처음 그대로 정문의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쯧.”

그 모습에 빙궁주 설엄은 혀를 찼다.

적의 주 전력이 움직이지도 않았음에도 자신들은 지쳐갔고 밀려오는 적들은 하염없이 많았다.

방어의 집중을 위해서 자신과 딸이 측면의 이동을 잠시나마 지체시켰지만 그뿐이었다.

설엄은 적들의 죽은 기병들의 숫자를 가늠해보니 기껏해야 500명이나 될까 싶었다.

300명의 전사들로 막아낸 것이기에 고무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었지만 아직 적은 죽인 수의 5배 이상이나 남아있었다.

쿵!

화살과 얼음기둥, 빙백신장을 뚫고 성벽에 붙은 적들이 내공으로 외벽과 정문을 공격하는 것이 느껴졌다

쿠웅!

기병들이라 별다른 공성병기는 없었지만 모든 기병들이 무림인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 공성병기와 다를 바 없었다.

다행인 점은 성벽이 높고 미끄러워 아직까진 올라오는 적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외벽을 부수고 거칠어진 성벽을 따라 넘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또는 굳게 닫은 정문이 먼저 뚫릴 수도 있을 것이다.

설엄은 인상을 쓰고서 설화에게 명을 내렸다.

“딸아. 전사 200명을 데리고 내성으로 이동해라. 그리고 혹시나 후방으로 돌아서 넘어오는 적들을 조심하고.”

“예. 아버지.”

설화는 걱정 대신 믿음으로 명을 받고는 즉시 움직였다.

외성은 방어해야 할 면적이 너무 넓었는데, 그 면적에 비해 방어를 할 수 있는 전사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방어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최대한 시간을 끌며 외성에서 방어하는 것이 1차 계획이었고, 내성으로 후퇴해 방어하는 것이 2차 계획이었다.

내성의 위치는 외성의 안에서도 정문과 가장 먼 끝자락에 있기에 시가전까지 유도할 수 있다면 시간을 벌기 더 용이할 것이었다.

“후퇴하는 게 예상보다 좀 이르긴 하다만…….”

설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망루에 세워둔 거대한 활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는 몇 개 남지 않은 화살을 보며 최선의 공격을 가늠했다.

망루 주위 성벽 위엔 빙궁의 전사들이 60여 명 정도만 남아 필사적으로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방어가 이루어지지 않는 측면성벽에선 말을 버리고 올라오는 적들의 모습이 벌써 보이기 시작했다.

북해빙궁주 설엄은 묵묵히 화살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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