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79화
천애랑이 사천과 운남을 드나드는 사이 나라의 정세 또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었다.
마교가 혈교를 흡수함으로써 대대적인 세력 개편에 들어갔는데, 그 중엔 정계와의 유착을 정리하는 작업이 있었다.
혈교와 선이 닿아있었다 하더라도 마교와 말이 통하는 인사들은 마교와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이 작업을 위해 드라쿠가 황실로 가서 혈교의 전력이었던 요향과 음살단을 굴복시키고 통제했다.
그리고 토그테무르를 죽이고 새로이 황제가 됐었던 쿠실라가 죽었다. 대내외적으로는 병사로 알려졌다.
그 후 마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던 재상 툴루이의 주도 아래 어린 황자였던 타루크가 새로이 황제로 등극했다.
어수룩하고 어린 타루크 황제를 올바르게 교육하고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재상 툴루이가 섭정에 가까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황제와 재상에게 청탁하고 싶은 관리들이 늘어났고 황실엔 더욱더 공정함과 청렴함은 없어졌다.
뇌물을 마련하기 위한 착취는 더욱 성행했고 내리갈굼처럼 아래로 갈수록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마교는 황제와 재상이라는 황실의 가장 거대한 권세를 얻은 김에 확실하게 황실 전체로 그 영향력을 확장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는 팽풍궐, 황실 내에서는 팽 태감이라고 불리는 환관과 내시들의 수장이 확고한 중립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팽 태감의 천외천 무위와 황실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세력은 그 어느 무림세력과의 결탁 없이 황실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팽 태감의 권태와 같은 무심함이 마교가 황실 내에서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이긴 했다.
반면 황실의 변화 및 문란에 의해 홍건적의 세력은 급성장하는 중이었다.
그러한 홍건적엔 3대 군벌이 있었는데 이들의 수장은 장사성, 진우량, 주원장이었다.
장사성은 풍부한 재정을 가지고 있었고, 진우량은 병력이 강대했다.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주원장은 새로운 활로를 찾았는데 그것은 강남의 선비들이었다.
장강 이남의 비옥한 토지는 원나라 재정의 8할을 차지함에도 북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몽골족들은 강남의 사람들을 무시해왔다.
몽골족들이 황실의 주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판에 안 그래도 한족들이 소외를 받아왔었는데, 강남의 한족들은 이보다 더한 차별을 받아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강남의 선비들은 불만을 품은 채 자의적, 타의적으로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담대혁에게 이와 관련한 전권을 부여하고 강남의 학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보다 나은 치료를 위해 송소걸이 의각원으로 옮겨짐으로써 담가에 계속 남아있을 이유가 없던 담대혁은 명을 받는 즉시 움직였다.
담대혁은 단숨에 ‘강남 4대 선생’으로 유명했던 송렴, 유기, 장일, 섭침을 품에 안으며 순식간에 강남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간 학문을 사용할 공간이 없었던 강남의 학자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움직이며 주원장에게 간언하고, 무지하여 숨죽이고 있는 백성들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이의 일환으로 주원장은 ‘명분을 뚜렷이 내세우고 민심을 잡으라.’는 강남 학자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명목상 송나라 후예라는 소명왕 한림아를 우대했다.
한족(漢族)의 나라를 세워야 하며 자신은 이를 이루고자 한다는 명분을 학자들과 백성들에게 알리는 행위였다.
그리고 주원장은 ‘절대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마라. 백성을 괴롭히는 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처단하겠다.’는 엄명을 내려 단숨에 민심을 휘어잡았다.
그렇게 단숨에 주원장은 홍건적 3대 군벌 중 가장 강해졌다.
* * *
북해빙궁은 광활히 펼쳐진 설원 위에 세워진 성이었다.
인근에는 북해라고 불리며 식수가 되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성벽은 모두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특수한 공법을 통해 매우 뛰어난 강도를 자랑했다.
그리고 엄동설한의 바람을 막기 위해 외성벽은 높게 지어졌다.
북해빙궁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내성 깊숙이에 궁주전이 있는 것을 제외하곤 전사들과 주민들 간의 거주지 제한은 딱히 없었다.
빙궁의 전투가 가능한 전사들은 약 300명 정도였고 주민들은 1500명 정도였다.
전체 마을 주민의 수에 비해서 전사들의 비율이 높은 이유는 북해빙궁의 모든 자녀들이 의무적으로 무공을 익히기 때문이었다.
북해빙궁은 절대적으로 인원이 부족한 곳이었기에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가 빙공(氷功)이라는 무공을 익혔으며, 그중 자질이 뛰어난 이들은 전사가 됐다.
전사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주민들이 익힌 빙공(氷功)은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해주기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빙공의 영향인지 북해빙궁 모든 이들의 머리카락 색은 은색 빛을 띠었다.
이 때문에 화끈한 성격을 가진 북해빙궁 사람들의 성향과는 다르게 외부에선 북해빙궁의 사람들을 차갑다고 여기고 기록해왔다.
현재 북해빙궁의 주민들은 빙궁주의 명에 따라 내성으로 대피를 하고 있었고 전사들은 전쟁을 준비했다.
전사들은 외성벽과 성벽 바깥에 열심히 물을 뿌렸다.
당장 꽁꽁 얼은 땅을 파서 해자처럼 만들기는 요원하니 임시방편으로 그런 역할을 하고자 함이었다.
뿌리는 족족 미끄럽게 얼은 땅들은 무림인에겐 큰 의미가 없을지언정 그들의 수족인 말들에게 유효한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적들이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것도 상당 부분 방해해줄 것이다.
북해빙궁주 설엄은 외성벽의 망루 위에 올라가 먼 곳을 응시했다. 무수히 많은 말발굽 소리와 기파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희미함은 점점 선명함으로 바뀌었다.
“전원! 전투 준비!”
설엄의 말에 전사들이 성벽 위에 올라 화살을 활시위에 가볍게 얹고 대기했다.
활은 전쟁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무기임에도 무림인들은 대체로 잘 사용하지 않는 무기였다.
그 이유로는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의 움직임을 보이는 무림인들에게 활을 겨냥하고 쏘는 것도 어렵고, 쏜다 한들 보고 피하거나 쳐내기에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만약에 무림인이 내공을 이용해 활을 쏜다면 그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무림인들이 활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비효율성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활 익힐 시간에 검을 수련하는 것이 훨씬 경지 향상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무림인들이 직접적인 표현은 안 하지만 활을 쓰는 것은 멋있지 않다고 생각해 익히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와 생각들이 북해빙궁의 전사들이라고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자연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활을 배웠다.
광활한 설원 위에서 식량 수급을 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수렵이었다.
그중 개체 수가 가장 많은 것이 하늘을 나는 새들이었기에 사냥을 위해선 활이 필수였다.
호전적이고 용맹한 북해빙궁의 전사들은 압도적인 적의 규모를 보면서도 긴장된 기색이 없었다.
이는 빙궁주의 딸이자 공주로 불리는 설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화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개새끼들이 더럽게도 많네요.”
빙궁주 설엄은 괄괄한 입담을 선사하는 딸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억세도 어지간히 억세야지 대체 나중엔 어떻게 시집을 갈련지 막막했다.
심지어 본인보다 약한 남자랑은 혼인도 하지 않겠다고 해서 더 걱정이었다.
빙궁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어미를 닮은 설화의 외모는 약관이 되면서 더욱 꽃피었다.
그로 인해 북해빙궁의 뭇 남성들이 설화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지만 모두 두들겨 맞고 물러났다.
설화는 고백하는 이들을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두들겨 패고선 ‘약해 빠진 놈들이 허튼 생각이나 하고, 훈련이 부족하구나!’라고 외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설화에게 고백했다가 지옥훈련을 받은 전사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는 북해빙궁에서 유명했다.
타고난 오성은 어찌나 뛰어난지 어릴 때부터 북해빙궁의 전사들을 때려잡으며 성장한 딸이었다.
이제 약관을 지났음에도 화경초입에 발을 얹었으니 무림역사를 뒤져도 몇 없을 기록일 것이었다.
그래서 본인보다 강한 남자랑 혼인하겠다는 설화의 발언이 빙궁주는 심히 걱정이었다.
아마 딸보다 강한 남자는 대부분 노인네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뿐인 딸이고 아내가 딸을 낳다가 죽었기에 모든 외로움과 사랑을 설화에게 쏟긴 했었다.
북해에서 가장 귀하다는 빙백단과 설련실, 그리고 음양의 균형을 맞출 화양삼을 모두 먹였다.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줬음 하는 마음이었다.
빙궁주 설엄은 왠지 딸의 미래가 자신의 업보인 듯했다.
설엄이 아득히 도열한 적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 많이도 모였구나.”
“당장 나가서 때려잡죠.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을 것 같은데요?”
호기로운 설화를 보며 설엄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시간을 끄는 것이 우선이다.”
“하오문주라는 자를 믿으시는 겁니까?”
설화의 질문에 설엄이 멀찍이서 다가오는 기마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 자가 그냥 말했다면 의심부터 했을지도 모른다.”
설엄의 대답에 설화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설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거래가 되면 말이 달라지지. 거래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믿을만한 자이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 보는데요? 대체 어떻게 만난 사이예요?”
“젊은 시절 여러 이유로 중원에 갔다가 만났다. 그 뒤 인연이 되어 몇 번 거래를 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 거래는 내가 부탁했지만 절대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약속하더니 지키더군.”
“그게 뭔데요?”
설엄은 그때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십만대산 마교에 있던 화양삼.”
“……예?”
설화가 깜짝 놀라 되묻자 설엄이 계속 떠오르는 그때의 상황에 큭큭 거리며 웃었다.
“지금이야 하오문주지만 그때는 천면수라로 불렸을 거다. 뭐, 감쪽같이 변신해서 마교에 들어간 후 화양삼을 쓱 훔쳐 왔다던데? 겸사겸사 다른 마교 보물들이랑 기밀들도 훔쳤다고 자랑하더군.”
“허어……. 완전 멋있는 아저씨네. 당연히 나이가 많겠죠?”
재미난 추억을 음미하던 설엄이 뜬금없는 딸의 말에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 완전 늙었지! 너만 한 딸도 있을 게다!”
설화는 진지하게 화를 내는 아버지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농담입니다. 아버지. 하하하하! 어차피 저보다 약할 것 아닙니까.”
설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하오문주가 딸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에효…….”
설엄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아버지 이야기 덕분에 전쟁을 앞두고 쓸데없는 긴장은 풀린 것 같네요.”
설엄이 설화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횡으로 진열을 정비하는 기마대의 중심에서 흑풍대주가 말을 몰아 다가왔다.
그는 군인처럼 흑색 갑주를 입고 흑색 피풍의를 휘날리고 있었다. 말 또한 검은색이라 흑색 일변의 모습이었다.
또각 또각.
흑풍대주는 하얀 설원 위에 검은 먹물을 떨어뜨리듯 점을 만들어 내다가 해자의 역할로써 물을 뿌린 지점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바닥과 성벽상태, 북해빙궁의 전반적인 모습과 전사들을 둘러봤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흑풍대주의 모습은 마치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북해빙궁에 정보를 다루는 무언가가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의외로군.”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리던 흑풍대주 초여운은 북해빙궁주 설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대가 빙궁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