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78화
태풍이 지나간 후 땅이 더 단단해지듯 천애랑의 눈에 지금의 당가도 그러할 것처럼 보였다.
‘가주와 당가십이를 죽인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지만.’
천애랑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죽일 것처럼 굴던 만독각주와 당가의 무인들이 이제는 은인을 모시듯 환대를 하는 모습에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은 저들의 가주와 주요 전력을 죽인 사람인데 이렇게 명확한 행동의 선을 보인다는 것이 놀라웠다.
자신을 포함해 무림인이라는 족속들이 다소 이상한 신념적 부분이 있긴 하지만 당가인들은 생각과 행동의 선이 명확하고 즉각적인 느낌이었다.
적이라고 규정하면 지독하게 달려들고 은인이라고 규정하면 다른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천애랑은 애초에 당가로 돌아오면서 환대를 바라지 않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은 당가의 중요 인물들을 죽인 이이기에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했었다.
물론 생각이 그렇다고 해서 공격적인 대우를 얌전히 받아줄 마음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당가로 굳이 돌아온 이유는 확실한 결착을 맺고자 함이었다.
“고독을 찾았다고?”
천애랑은 당정아를 따라 가주전으로 향하면서 물었다. 이들의 곁에는 만독각주와 당가칠영이 있었다.
만독각주는 가주전 지하비고에 있는 확인하지 못한 독들의 상태를 확인할 겸 함께 움직이고 있었고, 당가칠영은 당정아의 보좌를 위해 따르고 있었다.
새로운 당가에서 많은 역할을 해야 하는 당가칠영에게 동기부여를 주기 위한 당정아의 배려였다.
실상 그간의 소외 탓에 당가칠영은 지금 가주전을 처음 가보는 것이었다.
그 외 다른 당가 무인들은 잔독의 해독과 독에 의해 파손된 건물들과 재산들, 대피했던 사람들을 챙기기 위해서 각자의 맡은 구역으로 흩어졌다.
고득을 찾았냐는 천애랑의 질문에 당정아가 대답했다.
“예. 가주전 지하에 있었습니다.”
이에 천애랑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고독을 발견하지 못해 운남 사파연합이 와해된다면 그것대로 피곤해질 일이었다.
“확인만 하고 하오문주에게 연통을 넣을 테니 혹시나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하면 부탁을 좀 하지.”
“그러지요.”
만독각주는 한걸음 물러나서 천애랑과 당정아의 관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애랑을 관찰했다.
옛 된 얼굴이지만 경험 많은 무인들처럼 표정에 여유가 있었고 자신의 무위에 대한 자신감이 걸음걸이와 태도에서 은은히 비춰졌다.
당가의 최고 고수였던 가주를 단신으로 죽였다는 것만 봐도 자신이 가늠하기 어려운 경지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잠룡인가.’
만독각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청년은 아직 세상이라는 하늘에 본격적으로 날아오르지 않았을 뿐 이미 성체가 된 용이었다.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 자연을 다스리며 주체적으로 나는 신룡이 곧 될 것이다.
아직은 그 진가를 아는 이들이 적겠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그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일으킨 바람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그의 바람과 함께 하는 이는 하늘을 날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그 바람에 날아가 떨어질 것이다.
그런 잠룡이 선연인지 악연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당가에 왔다는 것이 하늘이 허락한 자연의 흐름이라면 자신들은 그의 바람에 승선할지 아니면 거부할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정아를 보아하니 이미 용풍(龍風)에 승선한 듯했다.
만독각주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당가에서의 상황은 빠르게 정리가 되어갔다.
천애랑은 가주전에서 고독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하오문주에게 연통을 넣었다.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서 아마 하오문주가 직접 고독을 가지고 운남 사파연합의 장들을 만날 것이다.
그 사이 방덕이 시전의 상황들을 정리하고 소가주와 함께 왔었다.
개방의 소방주나 되는 이가 갑자기 찾아오자 만독각주는 긴장을 했었다.
심지어 방덕이 ‘당가주의 만행을 추궁하고자 온 것 아니니 너무 긴장 마시구려.’라고 첫 운을 띄우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내 이어진 방덕의 설명에 만독각주와 함께 있던 당가칠영, 뒤늦게 당가주의 만행을 알게 된 소가주 모두가 놀람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당가가 내부단속만 잘한다면 이번 사건은 시전까지 퍼졌던 독에 대해서만 여론이 조성될 예정이었다.
당가의 실험과정에서 큰 실수가 있었고 이에 가주가 가문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민간으로까지 피해가 갈 위기가 있었으나 당가와 기공가주가 합심하여 그 피해를 막아냈다.
당가는 이에 큰 책임을 통감하며 보상과 민생을 살피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이런 내용으로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었다.
민생을 살피고 여론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당가의 많은 재산이 소모되겠지만 중대한 죄를 지우고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절대 손해가 아닌 상황이었다.
만독각주는 방덕의 이야기를 듣고선 식은땀을 흘렸다.
천애랑과 방덕 둘 다 내색은 안 했지만 만약 당가가 천애랑을 공격해 적대관계가 되었다면 그들은 당가를 지켜주는 것이 아닌 파멸시키는 여론을 형성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천애랑은 그런 만독각주를 보며 내심 만족을 했다.
당가 내에서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눈치까지 빠르니 앞으로 당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후 천애랑과 방덕은 며칠간 당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당가에선 둘을 귀빈으로서 최대한의 편의를 봐주었지만 그렇다고 술이나 귀한 음식들이 차려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뭐가 됐든 가주가 죽은 것이기에 당가 전체는 상가와 같은 정숙한 분위기가 유지됐다.
다만 대외적으로 가주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새로운 가주의 선출 이후로 협의됐다.
그간은 방덕이 시전을 오가며 적당히 여론을 관리하고 있었다.
또한 독이 어찌나 지독하고 파괴적이었는지 멀쩡한 전각을 찾는 것이 어려울 지경이라 당가의 모든 인력은 이를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렇게 천애랑은 매우 바쁜 당가 내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강한 검도 무리해서 사용하면 날이 나가거나 휘어질 수도 있는 법.
천애랑은 이 시간 동안 차분히 지친 몸들을 달래며 회복에 집중했다.
며칠간의 대대적인 공사가 끝난 후 당가는 중대한 회의에 들어갔다.
공석이 된 가주의 자리에 대한 안건이었기에 외부인인 천애랑은 조용히 방에서 기다렸고, 방덕은 여느 때와 같이 개방도들을 살피러 시전으로 간 상태였다.
똑똑.
그때 휴식을 취하던 천애랑에게 당가 무인이 찾아와 가주전으로 안내를 했다.
안내를 따라 가주전으로 가니 여전히 천애랑과 당천금의 전투로 반파된 흔적들이 보였다.
다소 황량한 가주전 앞 마당엔 천애랑을 기다리는 인물들이 있었다.
천애랑은 가운데에 서있는 당정아를 보았다.
그녀의 양옆으로는 만독각주와 당상호가 있었다.
‘호오.’
천애랑은 저들의 서있는 위치에 대한 의미를 인지하고선 천천히 당정아를 향해 걸어갔다.
만독각주가 다가온 천애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만장일치로 새로운 가주가 된 당정아 가주님이시오.”
천애랑은 만독각주의 말을 듣고선 제일 먼저 당상호를 보았다.
의외였다.
권력이라는 것은 상향하고자 하는 성질만 있지 절대 하향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간 소가주로서 권력을 누려왔고 아마도 규율상 이대로 가주가 돼도 무방한 그가 이리 쉽게 양보를 했을 줄은 몰랐다.
천애랑의 시선을 받은 당상호는 예의 사납거나 얄미운 표정이 아닌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대가 여러 번의 위기에서 우리 누이를 구해줬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상호는 천애랑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하하…….”
완전히 예상 밖의 모습인지라 천애랑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에게서 누이를 많이 아낀다는 것이 느껴졌다.
거만하고 오만함이 가득한 작고 약한 당천금이라 생각했었는데 정말 의외의 모습이었다.
천애랑은 이어 당정아를 보았다.
당가에선 녹색을 좋아하는 가풍이 있는 것인지 지나오며 봤던 당가의 무인들처럼 당정아 또한 녹색의 단아한 무복을 입고 있었다. 꽤나 잘 어울렸다.
“가주의 취임을 축하하오.”
천애랑이 가주가 된 당정아에게 격식을 갖춰 인사하자 당정아는 환히 웃었다.
“감사합니다. 다 천 가주님 덕분입니다.”
당정아의 말에 천애랑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소. 그대의 당가라면 신뢰할 수 있겠지. 그대가 있는 한 당가는 기공가문의 맹우라고 믿겠소.”
“물론입니다. 그런데 곧장 떠나시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주로부터 다음 행선지에 대해 연락을 받았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소.”
천애랑의 사정을 아는 당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애랑을 당가의 손님으로 하염없이 붙잡고 싶었지만 그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당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략 어디로 향하시는지는 알 수 있을까요?”
천애랑은 짐작되는 방향으로 멀리 쳐다보며 대답했다.
“북해빙궁.”
* * *
북해빙궁.
늘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쪽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비문파이며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한 번씩 무림에 등장할 때마다 경악할만한 무위를 선보이기에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 문파이기도 했다.
이곳의 사람들이 사는 마을 자체가 북해빙궁이라고 보면 되는데 빙궁주가 이들을 다스렸다.
그리고 빙궁주와 빙궁의 전사들이 익힌 빙공(氷功)의 위력은 가히 천하일절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북해빙궁주 설엄은 인상을 쓰며 서신을 읽었다. 과거의 인연이 있던 하오문주의 서신이었다.
“마교의 흑풍대가 혈교의 기마대까지 이끌고 빙궁으로 향하고 있다?”
설엄은 마저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그 수가 무려 3천…….”
설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전원 기마병으로 구성된 흑풍대의 명성은 자신 또한 익히 들었었다.
예전 신강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던 문도 3천 명의 문파연합을 단 100명의 흑풍대가 괴멸시켰다는 소문은 이곳 빙궁까지 흘러왔었다.
당시의 흑풍대주가 열양공(熱陽功)을 익힌 고수라고 해서 더욱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흑풍대에 보병도 아닌 기마대로만 추가돼서 3천 명이라고 하니 설엄은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북해빙궁의 전사들을 모두 모아봐야 300명 정도밖에 되지 않기에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 무얼 걱정합니까. 북해의 전사에게 두려움은 부덕입니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빙궁주 설엄은 자신의 하나뿐인 딸 설화를 보았다.
척박한 환경의 북해빙궁 사람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억센 느낌이 있었는데 그중 자신의 딸은 더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설엄은 손짓으로 잠시 대답을 미루고 서신의 말미를 마저 읽었다.
“……기공가주와 구원군이 가고 있으니 농성을 하라? 그리고 대가는 빙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