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77화
천애랑은 연속된 내공의 탈진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당가로 돌아왔다.
정문에 들어서자 아직 해소되지 못한 독무들과 해독을 위해 분주히 가루를 뿌리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대피를 했는지 다소 텅 빈 외당의 상황이 보였다.
그런 외당을 가로질러 내당으로 들어가니 이곳은 대부분 해독이 되었는지 해독된 독 특유의 쿰쿰한 잔향만 남은 채 독무는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천애랑은 묘한 분위기를 맞이했다.
당가칠영과 장로들, 100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내당에 들어오는 천애랑을 포위했다.
그들의 중심에서 당정아와 만독각주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만독각주님! 설명드렸지 않습니까!”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존중합니다. 이름만큼이나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유아독존독과 가주전에서 찾은 고독만으로도 가주님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는 당가 내부에서 해결할 일. 외인이 간섭한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는 것은 당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합니다.”
“제가 극구 부탁을 해서 이뤄진 일입니다! 천 가주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요! 오히려 가주님과 당가십이 때문에 자신의 사람들을 잃었다고요!”
“아가씨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림에서 은원이 있다면 은원으로 해결하는 법. 특히나 당가는 확실한 은원의 해결로 지금의 입지를 쌓았습니다. 그러니 당가 내에서 그것도 가주님을 죽인 저자를 살려둘 순 없는 노릇입니다. 대신 아가씨의 말과 여러 상황들에 대한 참작으로 저자만 죽이는 걸로 상황을 마치겠습니다.”
“만독각주님! 현재 최고 명령권자인 제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당정아가 분노하며 내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만독각주는 태연하게 당정아를 마주보며 그 기운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정중하지만 또박또박 명확한 목소리로 당정아에게 말했다. 마치 훈육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가씨. 가주님이 안 계시는 지금, 특히나 소가주님이 부재인 상황에서 아가씨의 명을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위기의 상황에서 당가가 뭉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하지만!”
만독각주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는 당가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당가의 내정에 외부인이 간섭하는 것은 절대적인 불가사항입니다. 아가씨 또한 당가라는 정체성을 잃지 마십시오. 당가가 과거 어떤 대우를 받아 왔었는지 잊지 마십시오. 당가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는지 명심하십시오. 만약 후에 제게 벌을 내리실 게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만독각주의 말에 당정아는 고개를 저으며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만독각주님. 당가는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 가주님은 당가의 폐단과 당가가 무림공적이 되는 것을 막아준 은인입니다. 복수가 아니라 은혜를 갚아야 한단 말입니다!”
당정아의 외침에도 만독각주는 고집스레 눈을 돌렸다.
가주전으로 향하던 당정아가 경지를 넘는 것을 따스히 바라보던 눈빛과는 달랐다.
만독각주는 다른 당가인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당가는 복수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복수는 반드시 갚는다! 저자가 감히 당가 내에서 가주님을 죽였다! 그래서 만독각주로서 명하니 저자를 참하라!”
만독각주의 갑작스런 외침에 당정아는 다급히 따라 소리쳤다.
“당가주의 적통으로서 명한다! 당가의 모든 이들은 즉시 행동을 멈추고 물러나라! 저 분은 당가의 은인이시다!”
서로 상반되는 명령에 현장에 있는 당가인들이 당황했다.
명령의 우위는 당정아에게 있지만 당가인으로서는 만독각주의 말이 더 당연하게 와 닿았기에 포위를 하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모습들을 본 천애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게 무슨 짓들이지?”
천애랑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내당에 모인 모두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내 사람들을 죽인 당가의 만행을 크게 묻지도 않고 부탁을 들어 주었는데, 심지어 당가가 민간에게 끼칠 참사까지 막아주고 오는 사람에게 참(斬)하라는 명령이라…….”
천애랑의 불쾌한 심정에 따라 내기가 꿀렁거리자 인근 무인들은 속이 더부룩해지는 걸 느꼈다.
“철저한 명령체계를 따른다면서 정작 가주 직을 대행하는 이의 명령은 무시한다라…….”
“크흐음.”
인근 당가인들이 침음을 흘렸다.
천애랑의 말 때문이 아닌 의지와 상관없이 출렁이는 단전의 불안정함에 식은땀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 약속이나 지킬 수 있겠나?”
천애랑의 말과 시선을 받은 당정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당정아는 이내 굳은 표정으로 각오를 다지며 대중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 들어라! 나의 아버지이자 가주였던 당천금은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다! 첫째! 들은 것처럼 아군은 물론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금지된 무공인 유아독존독을 끝내 사용한 죄! 만약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면 오늘 우린 많은 가족들을 희생했을 것이다. 천 가주가 즉시 시전으로 달려가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고 대비하지 못했다면 당가로 인해 사천 성도의 수많은 민간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정파로서의 가치를 잃었을 거다!”
당정아의 말에 당가칠영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외당의 인원들을 대피시키면서 멀찍이 목격한 천애랑의 뇌전과 사자후, 그리고 독무를 날려버린 신위.
그리고 그 덕분에 지켜진 민간인들과 외당의 식구들을 떠올렸다.
“둘째! 운남 사파연합의 수장들과 그 자식들에게 전 무림에서 금기하는 고독을 사용한 죄! 목적이 이해된다고 그러한 과정이 이해될 순 없는 법. 그간 우리가 정도 문파로써 인정받아 온 독(毒)의 명분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지금 이 사안만으로도 필히 무림맹의 추궁을 받을 것이다!”
당정아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대중들을 보았다.
만독각주는 인상을 쓰곤 있었지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당정아는 말을 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급속도로 차갑게 굳었다.
“셋째! 당가에서 절대 금기시 하는 독인녀를 딸에게 사용하려고 한 죄!”
독인녀라는 단어가 나오자 여기까진 몰랐던 만독각주는 물론 다른 장로들, 당가칠영이 화들짝 놀라며 당정아를 쳐다봤다.
독인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무인들은 그게 뭔지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독, 독인녀…… 정녕 사실이십니까?”
만독각주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장로들과 당가칠영도 비슷한 표정으로 시선을 모았다. 당정아는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십이가 남림에서 나를 독인녀로서 납치하려 했기에 그대들에게 도움을 청할 여유도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도움을 준 분이 천 가주다.”
당정아는 더욱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나는 기꺼이 패륜의 업을 짊어지고 당가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올바르지 않은 탐욕으로부터 나를!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소중히 아끼는 당가와 그대들을 지키고자 했다!”
당정아는 천애랑을 포위한 당가의 무인들을 가로질러 천애랑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천애랑을 등지고 뒤돌아 당가의 사람들을 봤다.
“당가를 구한 것 등의 모든 것들을 차치하고라도 천 가주는 나를 살려준 은인이시다! 당가의 법도에 따라 나 당정아는 목숨을 걸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니 천 가주를 벌하고자 한다면 나 또한 상대해야 할 것이다!”
만독각주와 내각 등의 장로들, 당가칠영과 내당무인들은 당정아의 굳은 의지를 느꼈다.
천애랑을 공격한다면 진심으로 자신들을 상대할 그녀의 의지를.
당가칠영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당정아에게 다가갔다.
“우리 당가칠영은 이번 사태에 대해 아가씨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당가칠영 중 가장 맏이이자 수장 역할을 하는 만독각주 당염의 아들 당철이 대표로 소리쳤다.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에 만독각주가 인상을 썼다.
당가칠영은 당가의 유망한 후기지수들이지만 예전엔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가문의 권력구조를 견고히 하고 싶었던 당가주는 장로들의 자녀들에게 한직을 내리거나 철저히 소외시킴으로써 견제를 했었다.
당가칠영 또한 당가주에 의해 가문 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잉여처럼 무공수련만 하고 지내다가 당정아의 적극적인 건의로 가문에서의 활동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당가칠영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대신 철저히 내당에서 거주하지 못하게 해 내당 인원들과 사적 교류를 못하게 막았었다.
그렇게 당가칠영은 외당의 경계 무사들을 점검하는 역할만 맡았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당정아의 관심과 배려로 외당의 무인 전반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당에서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가칠영은 당정아를 잘 따랐고 지금의 행동도 그러한 이유의 일환이었다.
추가로 천애랑이 민간인들을 살리고자 노력했던 것도 마음을 움직이는데 작용했다.
당가칠영이 당정아에게 붙자 내당 무인들도 슬그머니 당정아와 당가칠영 옆으로 가서 섰다.
이들의 다수들도 당가 주요 계파의 씨족들임에도 당가주의 견제 때문에 외당으로 밀렸다가 당정아의 노력으로 서서히 내당으로 돌아온 인물들이었다.
만독각주와 내각의 장로들은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여전히 굳은 의지를 보이는 당정아를 쳐다보았다.
“새로운 당가의 모습이 썩 괜찮지 않은가.”
내각의 각주 당석호 장로가 미소를 띠며 말하자 옆에서 듣던 내각 부각주 당인풍 장로도 동조를 했다.
“제 생각에도 좋아 보이는군요. 단순히 강압과 명령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인 충성이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만독각주님?”
만독각주는 어느덧 자신의 주위엔 만독각의 무인들 외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만독각의 무인들도 자신의 눈치를 보며 당정아의 곁으로 갈 것처럼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난리 통에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암각, 무각의 장로들과 그 세력들을 제외하면 현재 당가에서 영향력이 있는 모든 이들이 당정아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 모습에 만독각주 당염은 상념에 빠졌다.
이렇게 당가의 인물들이 자발적으로 뭉쳐서 의견을 피력했던 과거가 있었다.
당염은 그때 당시의 젊은 청년과 그의 옆에 있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50년 전 마교와의 전쟁에서 전대 가주가 죽고 젊은 나이에 가주가 되었던 당천금은 당가를 하나로 모았다.
당천금의 강력한 지도력과 높은 포부, 뛰어난 재능에 전후(戰後)에 혼란을 느끼던 당가의 인물들은 지금처럼 자발적으로 힘을 모으며 뭉쳤었다.
이를 바탕으로 당천금은 단숨에 당가를 강하게 만들고 5대세가의 반열에 올렸다.
당천금의 권력 아래 어떠한 분열도 없이 하나가 된 당가는 그렇게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당가 내부의 소통은 없어졌다.
당천금은 당가십이를 조직하고선 압도적인 권위로 당가를 내려다봤다.
과거 패기롭고 소통을 잘하던 젊은 청년은 사라지고 탐욕 가득한 노인만이 존재했다.
그래도 당염은 당천금이라는 불세출의 가주가 있기에 지금의 당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위해 묵묵히 일을 했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 아닐지라도, 가주가 어긋나고 있음을 알고 있더라도 최소한 자신만은 당가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자위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광경을 보며 만독각주 당염은 깨달았다.
당가를 위한다는 자신의 행동은 그저 회피였다는 것을.
자신은 그저 당천금이 세워둔 당가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당가를 위한 일이라며 책임감 있는 선택을 모면했다는 것을.
가주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음에도 그것을 꾸짖을 용기가 없었다는 것을.
최소한 이러한 고민들에 대해 당가 최고 어른 중 한명으로서 다른 장로들과 논의하지 않는 나태함으로 살았다는 것을.
그런데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고자 나선 이는 그저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가씨와 젊은 날의 가주와 같이 올곧고 패기로운 청년뿐이었다는 것을.
그러한 청년을 벌하고자 하는 것은 그간의 과오에 켜켜이 쌓아진 늙은 아집 때문이었다는 것을.
당염은 부끄러움으로 빨개지는 늙은 양심을 느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로는 당가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자신의 오래된 생각은 그저 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50년이 넘게 함께 했던 가주에 대한 복수의 감정을 쉬이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당염은 자신과 비슷한 세월을 보낸 내각주 당석호 장로를 보았다.
그의 눈 안에는 자신의 번뇌와 유사한 흔적이 있었지만 눈빛은 자신보다 더 가벼워진 자유를 비추고 있었다.
이는 그 정도만 다를 뿐 내각 부각주 당인풍 장로는 물론이고 당가칠영과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다 가주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분노하지만 그만큼 당가를 사랑하고 있음이, 그 미래를 위해 기꺼이 용기를 내고 있음이 느껴졌다.
당염은 젊은 날의 당천금처럼 주변을 끌어당기며 빛을 내는 당정아를 바라봤다.
그 빛을 보고 있자니 허탈하고 대견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허허. 그간 나이를 헛먹었나 봅니다.”
만독각주 당염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내며 당정아에게 포권을 취했다.
“이 늙은이 또한 아가씨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당염은 이어서 천애랑에게도 포권을 취했다.
“당가의 은인이여 혹 이 늙은이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