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76화
하늘에서 뇌기를 양껏 흩뿌려 시선을 집중시킨 천애랑은 즉시 사자후로 크게 소리쳤다. 이번에는 사자후에 내공을 힘껏 담았다.
그리고 떨어지려는 몸은 운룡대팔식과 유사한 묘리로 허공을 박차 오르며 시간을 벌었다.
“당가에서 지독한 독무가 퍼져 오고 있다! 내독성이 없거나 호신강기를 펼칠 줄 모른다면 몸이 녹아내릴 독이니 즉시 피해라! 시간이 없다!”
천애랑은 말을 마치고 허공을 몇 번 박차면서 바닥에 내려섰다.
천애랑의 주위에 있던 행인들은 신선과도 같은 천애랑의 이적을 보며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렸다.
바닥으로 내려와 주위를 둘러본 천애랑은 인상을 썼다.
몇몇은 뇌신(雷神)이 임했다며 자리를 피하는 게 느껴졌지만 아직 다수의 행인들은 우왕좌왕하며 전혀 피하지 않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쯧.”
이럴 거라 생각했던 천애랑은 옆에 있는 당가의 소가주를 불렀다.
소가주는 천애랑의 엄청난 무위에 놀라 입을 벌리고 있다가 천애랑이 부르자 화들짝 놀라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이곳에서 네 얼굴 모르는 사람 있어?”
천애랑의 질문에 소가주 당상호는 삐그덕대며 고개를 저었다.
가문에선 아버지이자 가주인 당천금과 그의 심복 당가십이가 너무 무서워서 당정아와 함께 외부로 많이 돌아다녔던 당상호였다.
“없, 없을 겁니다.”
당상호의 대답에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지금 즉시 내가 하늘에서 했던 것처럼 소리 지르면서 시전 사람들 대피시켜.”
“예, 예?”
천애랑이 인상을 썼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대피시키라고. 당가에서 나온 독에 민간인들이 대거 죽으면 당가는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해. 소가주나 되는 놈이 그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저기 거지들이 유심히 보고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천애랑의 시선을 따라 개방의 거지들을 본 당상호는 번쩍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즉시 소리 지르며 사람들을 종용했다.
“당가의 소가주다!”
당상호를 알아본 몇몇의 인물들 덕에 당상호의 설득은 추진력을 얻었다.
금방 멀어지는 당상호의 등을 바라본 천애랑은 어느새 다가온 방덕을 보았다.
“오랜만이오.”
조금 전 다급히 소리치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천애랑의 차분한 인사에 방덕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못 본 사이 상당한 거목이 된 것 같구만.”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 방덕이 오랜만에 본 천애랑의 인상이었다.
“아아. 그대는 못 본 사이 냄새가 더 심해진 것 같소. 너무 가까이는 안 왔으면 좋겠소만.”
말과 함께 반 보 뒤로 물러나는 천애랑을 보며 방덕은 미간을 찌푸렸다. 반가움과 격세지감을 느끼던 감동이 쏙 들어갔다.
방덕이 혀를 차며 물었다.
“에휴. 그나저나 당가에서 갑자기 독무가 퍼져 오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천애랑은 대답 대신 당가의 정문 방향을 가리켰다.
시전에서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사천 성도에 사는 누구라면 아는 당가의 정문과 외벽이 보였다.
방덕이 눈에 내공을 집중하자 그곳의 벽을 넘어 스멀스멀 안개처럼, 또는 구름처럼 다가오는 흐릿한 무언가가 보였다.
그 속도 또한 제법 빨라 자신의 짧은 안목으로도 심상치 않은 형세였다.
“이게 무슨?”
천애랑은 방덕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고 멀리서 다가오는 독무를 바라본 채 말했다.
“혹시 하오문주가 보냈소?”
두서없는 질문이었지만 방덕은 새삼스레 천애랑을 보았다.
생각보다 천애랑이 상황을 읽는 눈이 뛰어나다 느껴졌다.
그리고 긴급한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여유에 그가 달리 보였다.
방덕은 드라쿠로부터 구함을 받은 후로 개인적으로 천애랑에 대해 조사를 했었다.
죽었다고 생각해 잠시 그 조사를 멈추기도 했었지만 천애랑이 생존해 있다는 행적이 포착된 뒤로는 다시 조사를 이어갔었다.
강하지만 세상물정 모르던 풋풋한 천애랑에게서 이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유가 느껴졌다.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서 오는 노련함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절대적인 무(武)에 따른 자신감이 기반되어 있는 듯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가, 그토록 살아있기를 바라던 이가 기대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방덕은 감회가 새로웠다.
“이보시오. 표정 징그럽소.”
방덕은 감동을 와장창 깨는 천애랑에게 눈을 흘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그렇다네. 자네가 당가주의 만행을 친히 벌한다기에 그 뒤를 수습하러 왔지. 그나저나 저 독무는 뭔가?”
“당가주가 죽으면서 남긴 동귀어진의 수요. 모든 것을 녹여버릴 힘을 가진 것 같더군.”
방덕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당가주가 죽었다고?! 벌써? 천하의 당천금이?!”
천애랑은 대수롭지 않게 방덕을 힐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독무로 보냈다. 독무가 곧 시전으로 당도할 것 같았다.
“죽였소. 내 친우들을 죽이고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기에. 더 이상 담소를 나눌 여유는 없을 것 같군. 그대도 다른 거지들을 데리고 피하시오.”
방덕은 황망함을 느끼며 마땅한 반응을 찾지 못하다가 자기보곤 피하라면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천애랑을 보았다.
“자네는 피하지 않는 겐가?”
“나름 시전 초입쯤에선 끝나지 않을까 싶은 독무였소. 하지만 저 기세를 보니 그렇지 않을 것 같군.”
어느새 방덕의 눈에도 독무가 무서운 기세로 퍼져 다가오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천애랑의 말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자네가 이 독무를 막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보니까 그냥 자연재해 수준인데?”
천애랑이 피식 웃으며 독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당가와 시전을 잇는 대로의 중심이었다.
이 대로를 중심으로 시전의 길은 이어져 있으며 길의 양측으로 건물들이 세워진 구조였다.
천애랑은 현 상황에서 나름대로 피해를 최소화 시킬 수 있는 위치를 찾은 것이었다.
“해봐야지. 이제 집중해야 하니 물러나시오.”
방덕의 눈엔 지금 천애랑의 행동이 당랑거철처럼 보였다.
천애랑이 죽지 않았음에 방방 뛰며 기뻐했었는데 또다시 천애랑이 죽음을 불사하자 방덕은 혀를 찼다.
방덕은 멀찍이 기다리고 있는 개방도들에게 혹시나 시전에 남은 사람이 있다면 챙겨서 몸을 피하라 명하고 천애랑의 곁에 섰다.
“나도 돕겠네.”
천애랑은 자신의 옆으로 나란히 서서 기수식을 취하는 방덕을 보았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태극권처럼 양손을 뻗는 모습이었다.
천애랑은 그런 방덕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이런 게 자신이 생각한 정파의 행동이었다. 과욕에 점철돼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
“마음대로 하시오.”
천애랑은 심호흡을 하며 뇌기를 쓰느라 텅 빈 단전을 자극시켰다.
대자연의 기운을 유도하고 신체의 기능을 깨웠다.
제공권을 펼치며 감각의 날을 세웠다. 바람의 기운(風氣)을 한껏 느끼며 예열하듯 자극했다.
방덕 또한 항룡십팔장의 기수식과 함께 단전을 활성화 시켰다.
서서히 시간을 가지고 내공을 순환시키자 핏줄이 도드라지고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기(氣)를 사용함에 극한의 자유를 가진 천애랑이나 그에 준하는 화경의 고수들이 아닌 이상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방덕처럼 내공을 사용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경지가 높아질수록 내공의 운용능력과 속도가 빨라지지만 물이 끓고 식는 것처럼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타구봉법과 함께 개방 방주를 상징하는 절기였다.
대대로 방주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데 항룡십팔장은 18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장법이었다.
원래는 28장으로 이루어졌었으나 축약과 소실 등의 과정 때문에 현재는 18개의 초식으로 전수되고 있었다.
방덕은 끌어올린 내기를 손바닥 끝으로 가볍게 밀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이고, 다시 밀었다가 거두어들이는 작업을 반복했다.
항룡십팔장 제 1초식인 항룡유회(亢龍有悔)였다.
흐르는 강에 작은 댐을 만들어 물을 모아 한 번에 터트리듯 강력한 내기의 방출과 위력을 가진 초식이었지만 그 섬세한 작업과 전투 중 기민하지 못하다는 조건 때문에 정면 돌파 시에 많이 사용했다.
즉, 실전에선 상대방이 피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고 사용하거나 허초들을 무시하고 정면승부를 볼 때 사용했다.
조건은 까다롭지만 적중이 가능할 시엔 항룡십팔장 중에서 가장 위력적인 초식이었다.
“후웁.”
방덕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독무를 바라보며 호흡을 정리했다.
천애랑 또한 남림 독무지대의 안개를 날려버릴 때처럼 모든 감각으로 바람의 결을 끌어모았다.
그때보다 준비시간이 더 있었고 팔각사라는 돌발적인 위험요소가 없었기에 더 많은 바람의 결을 모을 수 있었다.
천애랑과 방덕은 별달리 신호를 주고받진 않았으나 서로가 하고자 하는 바를 느끼며 일제히 기운을 방출했다.
“항룡유회!”
방덕이 큰 외침과 함께 굽혔던 무릎으로 추진력을 얻으며 양손을 전방으로 뻗었다.
“흐하압!”
천애랑도 큰 기합성과 함께 모든 내공을 바람의 결에 밀어 넣었다.
쿠와아아아아아------!
파파파파파파파------!
두 사람의 손끝에서 뻗어 나가는 강맹한 기운들이 대기를 찢어발기며 독무와 부딪혔다.
우우우우우우------
지상으로부터 하늘까지 뒤덮듯 다가오던 독무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둘의 공격 영향으로 눈앞의 독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처 해소되지 못한 외곽의 독무들이 흐물거리며 퍼져갔지만 그 속도가 굼벵이 기어가는 것 같았기에 긴급함은 많이 해소된 듯했다.
시전 사람들 또한 대피를 했을 것이기에 당가에서 저 독무를 해소시킬 시간은 충분히 번 듯했다.
한순간의 꿈이었던 듯 사라진 독무 사이로 둘이 서있는 시전의 입구에서 당가의 정문과 외벽이 활짝 보였다.
방덕은 텅텅 비어버린 듯한 단전의 허탈감에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 찍듯 주저앉았다.
항룡십팔장을 배운 후로 가장 최대전력으로 사용해본 항룡유회였다.
“허이구야. 죽겠다.”
방덕은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해냈다는 뿌듯함에 미소를 지으며 천애랑을 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신과는 다르게 오연히 서있는 그의 모습에 황당함과 경외심이 들었다.
“하하하! 대단하구만.”
방덕의 웃음을 들으며 천애랑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민간인들을 지켰다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방덕에게 말했다.
“후우. 쉽게 봤는데 대단하오.”
방덕은 천애랑의 말을 이해 못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천애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지답지 않게 근육질의 몸이기에 외공에만 특화된 줄 알았더니 상당한 내공기법이지 않소. 얼핏 용의 형상을 띠는 것도 멋있고.”
방덕은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인상을 쓰며 고민하다가 그냥 한숨을 쉬었다.
심호흡으로 탈진감을 조금씩 털어내면서 방덕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에고고.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다시 당가로 갈 것이오. 끝마무리를 지어야 하니까. 그러는 그대는?”
방덕은 엉덩이를 대충 툴툴 털며 대답했다.
“시전 쪽의 상황을 점검하고 나서 당가로 가겠네.”
방덕의 말에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가에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