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75화
내당도 가주전과 비슷하게 독무(毒霧)의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독무지대의 끈적함이 떠올랐는데 아무래도 독의 성분 중 이런 작용을 하는 것이 있는 건가 싶었다.
천애랑의 시선 속으로 내당 인원들이 소란에 놀라 건물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들 중엔 당가의 소가주 당상호도 있었는데 그의 옆엔 당정아가 있었다. 아마 당상호를 설득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천애랑은 잠시 방향을 틀어 당정아에게로 갔다.
갑작스레 나타난 천애랑을 보며 당상호와 그 외 당가인들이 놀라 쳐다봤다.
천애랑이 나타난 방향이 가주전 쪽이기에 이들은 경계심과 당혹감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천애랑은 주변의 자잘한 시선들을 무시한 채 급히 당정아에게 말했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지독한 원념을 남기고 가더군. 자신의 가문 사람들은 물론 당가 밖 민간인들까지 동귀어진 할 셈인지 그 여파가 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외당 밖 시전으로 갈 것이다. 이 독무가 무슨 독인지는 모르나 농도가 짙어지면 내 호신강기도 녹일 정도였으니 참고하도록. 그리고 고독의 위치는 듣지 못했다.”
“이 무슨……!?”
당상호가 당혹감 속에서 인상을 썼다.
가주전 쪽에서 나타난 것도 황당한데 반말까지 하고, 그 내용은 쉬이 인지하기가 어려운 정보들이어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당정아는 동생인 당상호에게 손짓하고선 천애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감사드립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수습 후에 따로 자리를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애랑은 상황판단이 빠른 당정아를 보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소가주 좀 빌려가자.”
천애랑은 당정아의 대답과 당상호의 동의를 확인하지 않고 즉시 당상호의 뒷목을 잡았다.
“뭐, 뭐야?!”
당상호는 반응할 새도 없이 금나수로 뒷목을 붙잡히자 발버둥을 쳤다.
그 모습에 천애랑은 살기와 함께 뒷목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커, 커억!”
뱀의 시선을 받은 생쥐처럼 당상호는 움직임을 멈추고 떨리는 눈빛으로 천애랑을 올려다봤다.
“당가를 살리고 싶다면 조용히 따라라. 나 좋자고 하는 거 아니니 귀찮게 하면 내가 편한 방법을 강구하겠다. 그게 네놈의 다릴 부러뜨리거나 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살기로 번들거리는 천애랑의 눈빛에 당상호는 거만함을 떨 생각도 못 한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을 지켜라.”
천애랑은 당정아에게 짧은 당부를 남기고선 소가주를 쥐고 몸을 날렸다.
뒤늦게 당정아의 근처로 모이는 당가의 장로들과 무사들은 어리둥절 상황파악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모든 독과 의술을 연구하는 만독각의 각주 당염이 놀란 표정으로 다급히 당정아에게 뛰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만독각주는 연신 주위에 퍼져가는 독연을 보면서 인상을 썼다.
당정아는 만독각주를 보며 반색했다. 만독각주 당염은 독에 한정해서는 당가 제일의 지식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만독각주님은 지금 독이 어떤 것인지 아시는 겁니까?”
당정아의 물음에 만독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는 있습니다. 제가 개발을 했었으니까요. 색과 냄새, 그리고 형태를 보아하니 유아독존독(唯我獨尊毒)이 확실하군요. 그런데 이건 피아식별이 안 되는 지독함 때문에 금지한 무공일 터인데?! 이걸 아는 이도 가주님과 당가십이 정도나 되고 말이죠…….”
당정아는 만독각주의 말을 들으며 혀를 찼다. 더 듣지 않아도 가주가 탐욕으로 익혔음을 알 것 같았다.
당정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주님은 죽었습니다. 소가주는 시전의 민간인을 구하기 위해 갔습니다. 고로 이 시간부로 당가의 모든 통솔권은 저 당정아가 가집니다.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으니 만독각주님은 즉시 인원들을 꾸려 내당과 가주전의 해독작업을 시작하세요.”
단호하고 정확하게 지시를 내리는 당정아의 패기 있는 모습에 만독각주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만독각주가 당정아의 말을 따르자 혼란에 빠졌던 다른 장로들과 당가 무인들은 당정아를 의지하듯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당가칠영(唐家七英)은 무사들을 데리고 즉시 외당의 인원들을 대피시키세요. 외당은 상대적으로 내독성이 약하니 해독보다 몸을 피하는 데 중점을 두세요.”
당가칠영은 내당의 당가 씨족 자녀들 중 미래가 촉망되는 일곱 명의 후기지수들이었다.
이들은 현재 외당의 무사들을 통솔하며 외당을 관리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알겠습니다.”
평소 당정아의 배려를 많이 받았던 당가칠영은 두말없이 당정아의 명을 따라 움직였다.
“해독에 참여하지 않는 내당 인원들은 식솔들을 챙겨 즉시 당가를 벗어나세요. 당석호 장로님과 당인풍 장로님이 신경 써 통솔해 주세요.”
“그리하지요.”
당가 전반의 살림을 맡던 내각 각주 당석호와 부각주 당인풍 장로가 당정아의 명에 따라 즉시 몸을 움직였다.
얼추 명을 다 내린 당정아는 만독각에서 여러 해독약들을 챙겨 나오는 만독각주를 따라 가주전으로 향했다.
지독한 독무(毒霧)의 독기(毒氣)에 해독하는 작업이 복잡하게 이뤄졌고 그 시간 또한 많이 소요될 것 같았다.
당정아는 가주전으로 가는 길이 지난하게 느껴졌다.
이 길의 끝에 어떤 과거와 어떤 현재와 어떤 미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이 그 끝에서 무엇이든 담대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 조금 염려되었다.
그러나 당정아는 이내 정신을 바로 잡았다.
자신은 이 길의 끝에 목숨을 걸었다.
패륜의 죄악을 짊어지고 자신과 당가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었다.
혹시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 없다며 사양하던 천애랑에게 단검을 쥐여줬다. 반드시 사용해 달라고.
당정아의 몸에서 빛이 났다. 독무를 뚫고 퍼지는 옅은 빛에 앞서가던 만독각주가 놀라 뒤돌아봤다.
“허허…… 이 상황에서 벽을 넘는가.”
당정아는 가주전으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절정의 벽을 넘어 초절정에 들어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책임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오롯한 책임감만을 되뇔 뿐이었다.
천애랑이 자신의 사람들을 지극한 책임감으로 대하는 것처럼 자신 또한 그러하리라는 다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만독각주는 작은 상념에 빠져 걸음을 멈추지 않는 당정아를 보며 만독각 무사들을 재촉했다.
“아가씨의 길이 끊어지지 않게 모두 서둘러라! 우리가 곧 당가라는 것을 보여라!”
만독각주의 말에 만독각 무사들이 기세를 드높이며 행동을 더욱 빨리했다.
평소 만독각의 사람들은 독의 가문 당가에서 독을 연구하는 만독각이야말로 당가의 핵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암기를 관리하는 암각이나 훈련을 담당하는 무각 등 다른 이들이 뭐라 하든 말이다.
오랜 시간 고여 있던 당가가 격동의 시간을 맞이했다.
* * *
천애랑은 순식간에 외당을 가로질러 시전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경계무사들은 소가주가 비키라고 소리치자 당황하면서도 그 명을 착실히 따랐다.
왁자지껄하게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밝은 시전의 풍경은 당가의 어두움과는 상반되는 이질감을 만들고 있었다.
시전의 밝은 불빛들 때문에 이곳에선 당가의 어두운 밤하늘이 희석되어 보였다.
당가의 하늘을 짙게 물들이며 다가오는 독무는 천애랑조차도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그런 밤하늘의 구름처럼 느껴졌다.
천애랑은 소가주를 내려놓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모두 대피하시오!”
근처 민간인들이 타격을 받지 않을 정도의 내공을 섞어 소리쳤는데 시끄러운 시전의 소음 사이로 쉽게 묻혔다.
천애랑은 점점 외당을 잠식하며 속도와 기세가 줄지 않는 독무에 인상을 썼다.
경공조차 익히지 않은 이 수많은 사람들이 무사히 대피하려면 시간이 없었다.
천애랑은 인근 건물들의 벽을 밟아 도움닫기 하며 건물들보다 높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전신을 개방해 대자연의 기운을 힘껏 끌어들였다.
경지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는 강제적인 방법에 몸에 강한 부담과 충격이 몰려왔다.
천애랑은 이런 고통과 부자연스러움을 잠시 무시하고 모아진 기운을 모두 뇌기(雷氣)로 치환했다.
파지직!
혈도라는 강의 길에 엄청난 양의 물들이 범람하듯 거친 내공이 혈도를 쏘다니며 고통이 일었다.
일반적인 무인들보다 혈도가 넓고 강한 천애랑이 아니라면 시도하지도 못하고, 시도하더라도 혈도가 터져 폐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후우.”
천애랑은 가벼운 심호흡으로 흐름을 조절했다.
그간의 경험들과 성장이 이 정도의 변수는 처리할 수 있게 요령과 마음가짐을 주었다.
천애랑은 혈도의 끝자락과 내기를 즉시 방출할 수 있는 주요 혈자리들에 뇌기(雷氣)를 꾸역꾸역 쌓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내기가 뇌기로 치환되고 준비됐다 느껴지는 순간 결박을 일제히 풀었다.
하늘로 뛰어오르고 잠시 몸을 움츠리는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번쩍!
콰르르르릉!
움츠렸던 몸을 활짝 핀 천애랑을 중심으로 뇌기가 뇌전(雷電)과 뇌성(雷聲)이 되어 시전 위의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게 비추었다.
갑작스런 천둥번개에 시전의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리의 음식을 먹던 사람들, 물건을 고르던 사람들, 기예단을 구경하는 사람들, 주루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 객잔에서 식사하던 사람들, 잠을 자던 사람들, 시비가 붙어 멱살을 잡고 있던 사람들, 골목에서 은밀한 연애를 하던 사람들 등 사천 성도의 야간시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천애랑에게 모였다.
그들 중에는 개방의 소방주 방덕과 개방의 거지들도 있었다.
“뭐, 뭐여? 천 가주 아냐?”
방덕은 하오문주와의 만남 뒤로 즉시 당가가 있는 사천 성도로 와서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
하오문주가 제공한 당가주에 대한 정보들과 교차검증을 하면서 당가주의 부도덕함 등에 대해 현장 확인 중이었다.
만약 정도 무림에서 절대적으로 금기시하는 독인녀와 고독의 증거가 확실하다면 무림맹의 이름으로 당가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을 통제할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금기와 관련된 피해가 민간으로까지 퍼져 심각한 경우엔 당가를 봉문 시키거나 해체 시킬 수도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또한 기공가주 천애랑이 당정아와 함께 당가주를 처단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니 방덕이 무림맹의 이름을 등에 업고 그 뒤의 혼란을 정리해달라는 하오문주의 부탁이 있었다.
천애랑에게 빚이 있던 방덕은 부탁을 거절할 이유도 생각도 없었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늘 방덕은 대부분의 조사를 마치고 사건 후의 여론을 선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인근 개방도들을 모아 관련된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아직 성도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천애랑을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자 했다.
“그런데 천 가주가 왜 저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