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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73화 (73/200)

기공술사 73화

사파연합과의 대화를 마친 천애랑과 맹건은 담소를 나누며 야수족의 진형으로 복귀했다.

“이걸로 이곳 사파의 정리가 된 건지는 잘 모르겠군. 그냥 죽일 걸 그랬나.”

천애랑의 말에 맹건이 웃었다.

“크하하! 지들이 어쩔 거야. 수틀리면 힘으로 해결하면 돼.”

광오한 맹건의 말을 들으며 천애랑은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야. 혹 문제가 생기면 내게 말해. 가능하면 해결하는 것을 도와주러 올 테니까.”

“크흐흐. 그 무엇보다 든든한 지원군이로군.”

“그리고 머리 쓰는 게 필요하면 하오문주를 만나. 하오문주도 이곳 운남에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서로 협력하면 수월할 거다.”

“그러지.”

천애랑은 야수족 진형에 도착한 즉시 당정아와 함께 사천으로 향했다.

매번 착실하게 보고하던 당가십이로부터의 연락이 끊겼을 테니 당가주가 수상함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끌수록 당가주가 대비할 시간이 많아지고 그를 죽이는 것의 난도가 높아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속전속결.

천애랑은 배웅하는 야수족들을 일별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산악 지형이 많은 험지를 지나 사천으로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  *  *

혈교의 교주인 혈마(血魔)의 거처이자 대 회의장소인 혈마전(血魔殿)에서 혈마는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가슴엔 길게 검상이 나있었고 검상에선 검은 연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혈뇌. 이 개새끼가!”

혈마의 입에서 피가 꾸르륵 거리며 말을 뭉그러뜨렸다.

혈마의 시선을 받은 혈뇌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혈교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소. 애초에 그대는 이 하늘을 담을 그릇이 안 되는 것을. 그간 연기를 하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오.”

“크으으으…… 감히… 마교 이 버러지들을!”

혈마의 눈이 혈마천심공의 영향으로 검붉게 변해갔다. 주화입마까지 더해져 그의 기운이 더 난폭하게 일었다.

촤악!

그러나 혈마의 행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머리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바닥을 굴렀기 때문이었다.

“가짜 따위가 기분 나쁘게 구는 걸 지켜볼 필요는 없겠지.”

찬호는 흑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착검했다. 그의 등 뒤로 아수라의 형상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혈뇌는 천외의 무위를 보인 찬호를 경외의 시선으로 보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소교주를 직접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아수라의 현상을 보아하니 천마신공도 극성까지 익힌 듯하고 경지도 극마를 확실히 수습한 느낌이었다.

마(魔)와 관련된 무공은 급과 종속관계가 존재했다.

급의 정점에 있는 것이 천마신공이었는데 천마신공의 공능 중 하나는 존재하는 모든 마공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극성으로 익히면 아수라의 형상이 떠오른다.

천마신공의 지배를 받는 마공 안에는 혈교주가 익힌 혈마천심공도 예외는 아니어서 혈마는 찬호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찬호가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익히지 않았다면 천마신공에 준한다고 평가받는 혈마천심공이 천마신공의 지배력을 벗겨내고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찬호의 경지와 검은 자비가 없었다.

이렇듯 모든 마의 정점에 설 수 있는 천마신공의 위력은 엄청나서 힘의 지배논리를 따르는 마교에서도 교주는 항상 천마신공을 익힌 이가 되어왔다.

그리고 천마신공은 교주인 천마가 지정한 이만 익힐 수 있었는데 소교주가 익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현 천마처럼 사제관계인 지휘웅과 함께 배운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지휘웅이 천마신공으로 기초만 다지고 대부분의 무공은 열왕공으로 익혔기에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드문 경우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의 정점에 있는 천마신공을 익힌 이가 많아진다면 권력쟁투의 시발점이 되기에 마교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관리되는 부분이었다.

당대 천마의 뒤를 이어 천마신공을 배울 소교주는 대체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이가 경합을 통해 쟁취하게 된다.

그리고 경합은 천마의 장자가 7살이 되는 시점부터 10년간 이어진다.

그 기간 동안의 경쟁은 철저한 방임으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선 참가자들끼리 세력을 꾸리거나 암투로 죽이는 것이 허용된다.

마교에 존재하는 여러 계파들이 권력구조를 바꿀 수 있는 극히 드문 기회이기에 사활을 걸고 임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가문을 부흥시킬 자식에게 총력을 쏟아 벌모세수를 해줌은 기본이었다.

결과적으로 현 소교주 경합은 천마의 아들인 마찬호가 승리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마교 역사상 손에 꼽히는 뛰어난 오성, 동료를 만드는 친화력과 지휘 능력, 적을 대하는 잔혹함까지 더해져 일말의 이의가 없는 완벽한 승리였다.

그렇게 찬호는 소교주 경합을 끝내고 천마신공을 배우기 전임에도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드는 기염을 토해냈었다.

“쯧.”

혈마를 죽인 찬호의 곁엔 드라쿠가 삐딱하니 서있었다.

혈마천심공 때문인지 혈마의 피는 검붉은 색이었는데 흡수해봐야 몸만 탁해질 것이 뻔해 드라쿠는 혀를 찼다.

천애랑에게 당한 것이 억울해서 어지간하면 흡수해 경지를 높이고 싶었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그때 혈마전의 정문으로 흑색 갑주를 입은 이가 흑색 피풍의를 펄럭이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찬호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보고를 했다.

“흑풍대주 초여운. 소교주님의 명대로 장내의 반항하는 이들을 정리했습니다.”

찬호는 그런 흑풍대주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들거리나 실력은 확실했던 전대 흑풍대주 지휘웅과는 달리 당대 흑풍대주는 군인처럼 질서와 충의를 중요시 여기는 이였다.

그리고 그간 흑풍대가 그래왔듯 실패 따윈 없는 절대적인 임무수행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고했다. 이곳 혈마전을 임시 본부로 쓸 것이다. 이름은 천마전으로 바꾸고 회의를 준비하도록. 전쟁이 머지않았다.”

“존명!”

찬호의 말에 흑풍대주는 절도 있게 명을 받고선 흑풍대에게 지시해 상황정리를 시작했다.

*  *  *

천애랑과 당정아는 높은 지대의 영향인지 그간 운남의 후덥지근한 날씨에서 벗어나 간만에 쾌적한 봄 날씨를 느끼는 중이었다.

날씨가 감정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둘은 어두운 목표를 가지고 이동 중임에도 간만에 심적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더러 무슨 일로 푸른 산에 사느냐길래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한가롭다.

복사꽃이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내려가니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로다.

당정아는 쾌적한 날씨를 느끼며 시를 읊었다.

“좋은 시로군.”

천애랑도 기분 좋은 날씨에 간만의 여유를 느끼며 칭찬하자 당정아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복잡한 가문이나 세상을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자연에서 한가로이 사는 것도 좋아 보이네요.”

“왜? 그새 당가주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약해진 건가?”

“아니요.”

당정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아니 가주님의 삐뚤어진 집착과 광기는 이미 당가를 좀먹고 있으니까요. 당가십이가 죽고 제가 등을 돌렸단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광기는 폭발할 겁니다. 아마 가문 사람들은 물론 그 주변까지 많은 피를 흘리겠지요.”

천애랑은 당정아를 보았다. 말은 단호하게 하지만 잘게 떨리는 손을 꽉 쥐며 감추는 게 보였다.

‘그래도 아버지이니까…….’

천애랑은 당정아의 심정을 완전히 헤아릴 순 없었다.

가족이라는 가치가 소중한 천애랑에게 있어서 지금의 상황은 매우 이질적인 경우였으니까.

그녀의 각오와 매 순간이 얼마나 힘겨울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자신은 그녀의 고통을 제거해주면서 고통을 주러 가는 길이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천륜을 뒤엎는 패륜을 도우러. 천애랑의 복잡한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찰랑거렸다.

‘은(恩)과 원(怨)만 생각하자. 그리고 나와 내 사람들만 생각하자.’

천애랑은 광범위하고 혼란스런 생각을 일축했다.

역지사지. 사연 없는 무덤 없다고 모든 사람들의 사정을 공감하고 이해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당가주를 심판할 자격이 어디 있냐며 따진들 상관없었다.

패륜을 도운 그 결과가 소걸이를 살리고 마교에 복수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길이 지옥불이어도 기꺼이 걸을 것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당가주의 천인공노할 행동을 이해하고 옹호할 생각 따윈 없었다.

천애랑의 눈에서 홍염이 일렁였다.

“걱정 마라. 반드시 당가주를 처리해줄 테니까.”

*  *  *

당가주 당천금은 잠자리를 설쳤다.

뒤숭숭한 꿈자리에 몸을 뒤척이며 일어났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는 오밤중이었지만 다시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당가주는 가주전을 나와 달빛 아래 마당을 거닐었다. 당가십이가 없는 지금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가십이를 떠올린 당가주는 인상을 썼다.

평소 착실하고 주기적으로 보고를 하던 당가십이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모두가 초절정 고수인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 들지 않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은 언제나 불쾌했다.

팔각사를 사냥하러 들어간 기공가주와 남림야수왕, 야수족들은 이미 까마귀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었다.

이것은 기정사실이니 다른 중요한 사안이 신경 쓰였다.

이미 당정아와 함께 복귀 중이라는 보고가 와야 했는데 그러지 않는 게 자꾸 불길한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3일 전 사천 성도(成都)로 들어온 개방의 와개가 여간 신경 쓰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나 사천당가가 있는 성도(成都)에 들어와 놓고선 전혀 인사가 없다.

같은 정도무림을 상징하는 문파가 있는 지역에 들어오면 의례로라도 인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개방의 소방주가 아무런 행동도 없었다.

당가주는 평소라면 이런 소방주의 행동에 자존심이 가장 크게 상했겠지만 지금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더 컸다.

평소와 다른 형용할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당가주가 걸음을 옮기다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소리쳤다.

“누구냐?!”

당가주는 돌아오지 않는 공허한 어둠의 메아리 속에서 잠시 눈을 부라리다가 혀를 찼다.

“츳. 예민해진 건가.”

그만 방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던 당가주는 목에 닿는 차가운 칼날을 느꼈다.

당가주는 화경의 고수인 자신이 아무런 기척도 못 느꼈다는 것에 깜짝 놀라며 은밀히 손을 움직이려 했다.

“동작 그만. 움직이면 그냥 죽인다.”

당가주의 신형이 움찔거리며 멈췄다.

“……기공가주가 은신술과 암살에도 정통(精通)했을지는 몰랐군.”

목소리로 누군지를 맞춘 당가주의 등 뒤 어둠 속에서 천애랑이 스르륵 나타났다. 극성의 환영유령보보였다.

“고독의 위치는 어디에 있지?”

칼날이 목에 핏방울을 만들고 있음에도 당가주는 처음과 달리 태연해져 갔다.

천애랑이 어떻게 죽지 않고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곳은 자신의 영역, 당가였다.

“고독…… 사파의 쓰레기들과 무슨 거래가 된 건가. 그나저나 당가십이는 어떻게 되었지? 내 딸은?”

“크큭. 딸…… 딸이라. 가증스러운 호칭을 잘도 입에 담는구나.”

천애랑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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