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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72화 (72/200)

기공술사 72화

운남의 성도 곤명(昆明).

아무리 관과 질서가 무너졌다고 한들 사람이 사는 곳은 일정한 규칙과 흐름을 갖는다.

입는 것,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즉, 의식주와 관련된 것들은 어느 지역에서나 필수적인 것들이고 누군가는 이러한 의식주를 제공한다.

이런 의식주를 제공하는데 도가 트인 곳을 하나 꼽자면 아마 하오문일 것이다.

가장 밑바닥 인생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일자리를 제공하고 그들을 정보원으로서 활용하는 곳.

그래서 하오문은 어디에나 있었고 이곳 운남의 곤명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나 운남은 기존의 체계가 무너져 혼란이 가득한 곳. 그 틈을 하오문주가 파고들었다.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필요한 정보들을 이용하며 운남의 기존 상권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운남 곤명의 객잔, 주루, 홍등가, 포목점 등 하오문이 관계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하오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운남의 주요 도시들에도 지점을 내면서 거침없이 사업을 확장해갔다.

당장은 적자가 컸지만 천애랑이 남림야수왕과 함께 남림을 평정하고 운남 사파들마저 제압한다면 운남의 사업체들은 새로운 질서 아래 큰 수익을 가져올 것이다.

추후 남림야수왕과 남림, 독무지대의 금광에 대해 새로 협상을 한다면 더 큰 수익원이 생길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도박에 가까워 보였지만 하오문주 송강은 자신이 지켜본 천애랑이라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송강은 지금 운남 곤명에 마련한 임시 사무실에서 천애랑의 팔각사 사냥 성공에 대한 서신을 받아 읽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대단하군. 대단해. 역시 대단해!”

송강은 흡족하게 웃으며 천애랑이 쓴 서신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 서신 말미에 쓰인 몇 가지 사안에 놀람과 함께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당가라……. 사안이 작지 않구만. 사파들을 먼저 정리한다고 하니…… 그 시간 동안 개방의 소방주를 만나야겠군. 에고. 긴 여정이니 서둘러야겠어.”

*  *  *

천애랑은 맹건과 함께 남림 인근에 모여 있던 사파연합의 수장들을 만나러 왔다.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서 무엇인가를 꾸미고 있을 줄 알았던 이들이 먼저 접근을 해왔었다.

운남 사파연합이 임시로 마련한 막사의 주변으로는 천라지망을 펼쳤다가 복귀해 모여있는 사파인들이 있었는데 그 수가 거의 천에 달했다. 이조차도 일부만 온 것이었다.

엄청난 인원수가 천애랑과 맹건을 둘러싸듯 길을 열었는데 그 중심으로 천애랑과 맹건은 표정 변화 없이 태연하게 걸어 들어갔다.

오히려 이 둘의 기세에 지켜보던 사파인들이 긴장을 했다.

막사 안에는 달랑 의자 7개만 놓여 있었고 다섯 명의 사파연합 수장들이 일어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천애랑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수장들이 주뼛거리며 인사를 했다.

천애랑은 스윽 막사 안을 둘러보고선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맹건도 뒤따라서 천애랑의 옆에 앉았다.

둘의 존재감에 막사 안의 공기가 금방 후덥지근해졌다.

“전쟁을 준비한 것 치고는 너무 허술한 것 같은데?”

천애랑이 가볍게 살기를 일으키며 말하자 사파연합 수장들은 진땀을 흘렸다.

팔각사를 죽이고 당가십이를 홀로 죽인 천애랑의 말이 단순히 허세가 아니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천애랑만 해도 허튼 생각이 안 드는데 그 옆에서 눈을 부라리는 남림야수왕의 존재감 또한 엄청났다.

저 꿈틀거리는 엄청난 근육들이 당장이라도 야수족의 복수를 하겠다며 뻗어 올 것 같아 수장들은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다섯 수장 중 신평창가의 가주가 나서서 신중히 입을 열었다.

평소 관과 거래를 하는 등 그나마 이들 중 협상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라니요. 만부당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것은 서로의 오해를 풀고 미래 개선점을 찾고자 함입니다.”

“오해……?”

맹건이 미간을 좁히며 되묻자 신평창가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공손히 말했다.

“예. 우선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평창가주의 공손한 말을 듣고선 천애랑은 맹건의 의사를 묻고자 그를 쳐다봤다.

그런 천애랑의 시선을 받은 맹건은 알아서 하라는 의미로 턱짓을 했다.

“말해.”

천애랑의 대답과 함께 신평창가주는 사파연합과 당가와의 관계, 자신들과 자식들이 고독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

그 때문에 당가의 명령을 따라 야수족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들에 대해서 차분히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천애랑은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그래서 어쩌란 거지? 그딴 이유로 우리 친우들의 죽음을 이해해 달라 뭐 그런 소린가?”

심기가 불편한 천애랑을 보며 신평창가주는 다급히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희의 행실에 대해서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서로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천애랑은 맹건을 보았다. 시종일관 인상을 쓰곤 있지만 이야기를 끊지 않고 천애랑에게 대화의 흐름을 일임하고 있었다.

맹건이 감정적으로 나설지도 모르고 그래도 상관없다 생각하고 왔는데 꽤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의외이긴 했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나 보지.”

신평창가주는 다른 수장들과 함께 준비해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지는 간단했다.

운남 무림의 주인으로 남림야수왕과 야수족을 인정한다는 것.

남림을 잘 벗어나지 않는 야수족들의 성향을 고려해 사파연합은 지금의 영역을 인정받는 대신 조공을 바치겠다는 점.

여기까지가 사파연합 수장들이 남림야수왕과 그의 야수족에 대한 거래조건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맹건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크크큭. 왜 우리가 남림에서만 지낼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냥 너희들을 다 죽여 버리고 운남 무림을 지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냐?”

신평창가주는 진심으로 뿜어내는 맹건의 살기에 식은땀을 흥건히 흘렸지만 할 말은 했다.

“이 넓은 운남을 지금의 야수족 인원만으로 관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리란 것을 잘 압니다. 저희를 죽이더라도 저희 같은 세력은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끊임없는 전쟁이 이루어지겠지요. 그럴 바엔 대화가 되는 저희가 그런 세력들을 사전에 차단하고 이런 거래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남림야수왕님과 야수족들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다소 일리 있는 말에 맹건은 낮게 혀를 찼다. 그러나 죽은 야수족들에 대한 앙금이 풀리진 않았다.

맹건의 기색을 읽은 신평창가주는 바로 말을 했다.

“야수족들을 죽인 것에 대해 사과를 드립니다. 그 보상으로 독무지대를 정비할 때 500명의 인력을 대여해 드리겠습니다. 무공을 익힌 자들로 말이죠.”

맹건은 속으로 계산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팔각사라는 주인을 잃은 독무지대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을 했었다.

당정아는 독무지대에 나는 양귀비나 독초 등이 특상품들이라 제대로 관리만 한다면 큰 수익원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었다.

그런데 저들이 500명의 인력을 빌려준다면, 심지어 무공을 조금이라도 익힌 자들이라면 독무지대의 기틀을 다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또한 이번 전투로 잃은 동물들도 새로이 찾아내고 관리를 하려면 막대한 자금과 야수족의 인원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감정적으로 해결하고 싶었으나 현재 남은 부족원들의 미래를 위해선 족장으로서의 냉철한 판단도 필요한 법이었다.

맹건이 팔짱을 끼며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신평창가주는 이를 긍정의 신호로 해석하고는 천애랑에게 말했다.

“기공가주님께도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봐.”

“혹시 당가에서 고독의 약을 얻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천애랑이 당가의 독녀(獨女)인 당정아와 함께 있는 것을 알기에 나온 질문이었다.

사파연합 수장들은 절실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천애랑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야수족들과의 세력구도와 이권에 대한 거래보다 지금 당장 자신들과 자식들의 목숨을 옥죄이는 고독이 더 중요하고 급한 사안이었다.

“그대들의 고독을 나보고 해결해 달라? 그 대가는?”

천애랑은 사전에 당정아와 고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부분이 있었다.

고독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나 집단이 당가 정도밖에 없어서 극비처럼 다뤄진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과거 고독을 사용하는 방법은 자웅동체 상태인 고독을 상대방에게 먹여 고통을 주고, 양귀비 같은 아편류의 약제들로 일시적 고통을 줄여주며 고문하는 방법으로 사용했었다.

그런 과거 사실 때문에 고독은 자웅동체로 알려져 있었으나 현 당가주 당천금에 의해서 당가는 고독의 암수를 나누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 결과 알게 된 사실은 한 몸에서 나뉜 암과 수는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죽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나뉜 암컷에게서 나오는 액체를 가공하면 수컷 고독의 활동을 잠시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현재 사파연합 수장들과 그 자식들에게 있는 고독은 수컷 고독이었다.

그리고 이 고독들을 해결할 방법은 숙주가 죽는 경우 수를 제외하곤 당가에 있는 암컷의 고독을 죽이는 것이었다.

당정아는 고독의 개발에 참여했기에 이러한 사실들과 고독을 보관하는 장소를 알고 있다고 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말씀하시지요.”

신평창가주는 떨리는 마음으로 말하며 천애랑의 대답을 기다렸다.

천애랑은 천천히 눈앞의 신평창가주와 그 주위의 다른 수장들을 보았다.

“너희들이 현재 이곳 운남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했나?”

신평창가주가 대표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합체계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운남의 모든 영약들을 찾아내 내게 보내라. 방법은 하오문주를 통해서 알리겠다.”

천애랑의 말에 신평창가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가의 범위가 두루뭉술해서 명확한 행동 범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 저희가 가진 영약 전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천애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운남에서 나는 모든 영약이다. 만약 의도적으로 운남 밖으로 새나가거나 너희들이 숨기는 영약이 있다면 죽는다.”

천애랑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또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인신매매, 약탈 등 비인륜적이고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던 모든 활동을 금한다. 이를 어길 시에도 죽는다. 부하들이 비밀리에, 자의로 했다는 등의 변명은 필요 없다. 모두 관리하도록.”

사파연합 수장들의 얼굴에 당혹감의 그늘이 거칠게 내려앉았다.

너무 광범위한 조건인데다가 처벌이 죽음이라니 쉬이 이해하고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수많은 부하들의 범죄행위까지 죽음으로 책임을 지라고 하니 더욱 그랬다.

천애랑은 고민하던 사파연합 수장들을 보며 종지부를 찍었다.

“대신 너희들과 자식들의 고독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 약에 의존하는 해결이 아닌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사파연합 수장들은 천애랑의 마지막 말에 모든 고민을 내려놓고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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