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71화
쿠콰아앙------!
폭발과 굉음 속 모든 것에 정적이 흘렀다.
거대한 숲도, 숲의 생물들도, 슬그머니 차오르던 독무지대의 안개도, 야수족들을 공격하던 사파연합도, 야수족들도, 맹건도, 당정아도. 마지막으로 당가십이가 있는 곳 모두가 정적에 휩싸였다.
시체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의 당가십이들.
그나마 숨이 붙어 있는 것은 일(一) 뿐이었는데 그조차도 사지가 사라져 내공으로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쿨럭! 감히… 당가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한다면…….”
죽어가는 와중에도 협박조로 말하는 일(一)에게 천애랑은 천천히 다가가 차갑게 내려다봤다.
“과한 오지랖이군. 너야말로 감히 내 사람들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한 것이 건방지군.”
“오만방자한….”
천애랑은 일(一)의 말을 무시하며 잠시의 소강상태에 의해 야수족들과 대립하고 서있는 사파연합을 바라봤다.
얼핏 보아도 50명이 넘는 인원. 그 나름대로 정예들을 모아온 느낌이었다.
죽은 이들이 있어 현재는 20여 명에 불과한 야수족들의 수적 열세가 확연히 느껴졌다.
“모두 동작 그만!”
천애랑의 거대한 사자후에 우왕좌왕 상황 파악을 하던 사파인들이 모두 몸을 움츠리며 시선을 모았다.
“난 기공가주 천애랑이다! 그리고 여기 이들은 나의 맹우 남림야수왕과 그 야수족들이다!”
천애랑은 모여든 시선들을 오연하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난 나의 사람을 건드리는 이는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그 대가를 받을 것이다! 여기! 이 당가의 버러지들처럼 말이지.”
천애랑은 말과 함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一)의 머리를 강한 진각으로 밟아 터트렸다.
콰직!
섬뜩한 장면에 모두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조용히 침을 삼켰다.
운남 사파연합. 그 수장들도 이 장면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들이 비록 고독에 당해 당가의 명을 따른다지만 기본적으로 저 무시무시한 당가십이의 무력 앞에서 굴복한 것도 있었다.
자신들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경지의 당가십이를, 심지어 그 으뜸에 서있던 일(一)의 처참한 최후를 보며 두려움에 빠졌다.
사파연합 수장들은 사생결단 결판을 낼지 도망갈지를 가늠할 때 천애랑의 말이 이어졌다.
“마지막 자비다! 모두 즉시 물러나라! 돌아가서 나의 방문을 기다려라! 그리고 속죄를 청하든지!”
쿠구구구구구------
천애랑의 중심으로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기의 바람이 휘몰아치며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사파연합은 날카로운 칼날들이 온몸을 스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게 아니면 나를 맞이할 전쟁 준비를 하든지!”
콰가가가가가가가!
천애랑으로부터 대지가 갈라지더니 사파연합인들과 야수족들의 경계를 갈랐다.
그리고 언제라도 사파연합의 인원들을 집어삼킬 듯 내기의 잔향이 대지를 잘게 진동시켰다.
이에 몇은 두려움에 떨며 털썩 주저앉았고, 남부의 토속신앙이 있는 몇은 신이 진노했다며 그대로 부복했으며, 몇은 무기를 떨구고 망연자실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사파연합의 수장들은 천외의 경지에 있는 천애랑의 신위(神威)를 보며 더 이상의 전투의지를 일으킬 수 없었다.
“물러나겠습니다. 신룡(神龍)이시여.”
사파연합의 다섯 수장들은 지극히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천애랑의 재가(裁可)를 기다렸다.
천애랑은 이들을 보며 기운을 거두었다.
“가라.”
천애랑이 별달리 힘을 주어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사파연합은 지상최대 과제를 받은 것처럼 재빠르게 물러났다.
사파연합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야수족들에게서 작은 한숨 소리가 가득 터져 나왔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크윽.”
“이봐. 괜찮아?”
야수족들이 서로를 챙길 때 맹건이 천애랑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크하!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
맹건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천애랑에게 감사를 표했다.
천애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팔각사를 잡으려 하다가 생긴 일이니 내 책임도 있지. 죽은 부족원들은 유감이다.”
“크흠! 죽은 놈들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약육강식이라는 야생의 이치를 잘 아는 우리다. 이 정도로 쉽게 나약해지진 않아. 그리고 그대의 맹우를 대하는 자세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우리 야수족들 또한 그대와 기공가의 절대적 맹우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남림의 모든 신께 맹세하지.”
맹건의 말에 야수족들도 크게 동조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천애랑에게 깊은 경의를 표했다.
그 모습에 천애랑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맹건이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자주 웃어라. 나만큼은 아니어도 미소가 좋은 녀석이구만. 그나저나 저놈들을 다 안 죽이고 보낸 이유가 있겠지?”
천애랑은 사파연합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대답했다.
“그래. 남림에서부터 독무지대로 포위하듯 다가오는 많은 인원들이 있었어. 경지가 높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역시나.”
맹건도 어렴풋이 느꼈던 바라 혀를 찼다.
부상당한 몸만 아니라면 자신의 부족원들을 죽인 녀석들을 살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천애랑이 그런 맹건을 보며 말했다.
“너도 느꼈다면 말이 편하겠군. 저들이 약하다곤 하나 그건 순전히 우리 기준이지. 여기 살아남은 이들에겐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아마 많은 희생이 추가됐겠지.”
맹건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천애랑이 맹건의 마음을 헤아리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고선 당정아에게 다가갔다.
맹건은 천애랑과 당정아를 힐끗 보고선 혀를 차며 부족원들을 챙기러 갔다.
엄청난 전투의 흔적들로 폐허가 된 숲의 중심에서 당정아는 긴장된 표정으로 있었다.
천애랑이 분노하며 죽인 당가십이와 같은 당가의 사람이기에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 두려운 마음으로 쭈뼛거리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은 말해주겠지?”
천애랑의 질문에 당정아는 고개를 푹 숙이듯 끄덕이고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독인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자 가만히 듣던 천애랑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강하게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더러운 새끼들.”
천애랑의 입에서 거친 말들이 나왔다.
당정아는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조용히 천애랑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 자리의 사상자들을 만든 원인이 당가주와 당가십이에 있었다 한들 자신 또한 저들의 눈엔 똑같은 당가의 인물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죽은 야수족들을 위해서 천애랑이 자신을 죽인다고 한다면 달리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가문으로 돌아가 봐야 기다리는 것은 끔찍한 지옥뿐이니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애랑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차분하게 자세를 다잡는 당정아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당가의 인물이니 지금 상황에 대한 연대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 여인이 무슨 죄가 있나 싶었다.
오히려 불쌍했다. 그리고 자신은 당정아에게 훈련받음으로써 진 마음의 빚이 있었다.
“팔각사를 잡았다. 일전에 동굴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내가 도와줄 것이 있냐고 물었던?”
당정아는 새삼스런 눈빛으로 천애랑을 바라봤다. 천애랑이 어느덧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간 맹건에겐 반말을 하고 자신에겐 반 존대를 하던 게 어색했었다.
5대세가 당가의 아가씨인 자신에게 감히 반말은커녕 반 존대도 하는 사람이 없었고 자신 또한 존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었다.
하지만 천애랑과 맹건의 관계를 보면서 자신도 저렇게 자유로운 관계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고 호칭에 대한 부분도 괜히 저들과 어울리고 싶었었다.
그런데 천애랑이 맹건에게 대하듯 반말을 해주자 묘하게 지금 상황에 대한 죄책감이 줄어들고 마음이 충족되는 느낌을 받았다.
당정아는 묘한 감정 속에서 천애랑의 눈을 보았다.
이런 엄청난 이적을 행한 전장에서 허세라고는 티끌도 없는 그의 순수한 눈빛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아!”
순간 당정아는 그때의 대화와 상황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독인녀의 조건 중 처녀여야 한다는 부분을 깬다면 그런 수치스런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라는 극단에 몰린 생각들이 그때 잠시 정신을 지배했었다.
당정아는 헛기침을 하며 정신을 다잡았다.
“예. 정말 만약에 천 가주님께서 팔각사 사냥에 성공하신다면 그때 부탁을 드리겠다 했었죠. 그 부탁의 내용을 듣고서 도움을 주시지 못한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도 했고요.”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으니 부탁을 하라.”
당정아는 뜸을 들이며 고민을 하다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당가십이를 죽여주신 것과 저를 이 자리에서 살려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제 부탁을 들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다만”
당정아는 말을 하는 지금 이 순간이 힘겨운지 턱을 당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염치를 불고하고 말이 나온 김에 한 개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말하라.”
덤덤한 천애랑을 보며 당정아는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당가주 당천금을 죽여주십시오. 그의 탐욕은 결국 당가 전체에 이르러 당가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가문의 일원이자 자식으로서 외인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는 것이 피눈물이 나지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가문의 환부를 도려내는 것을 외인에게 부탁해 큰 짐을 지우는 파렴치한 저를 용서치 말아주십시오.”
말을 마친 당정아는 천애랑의 앞에서 황제를 알현하듯 극진하게 읍을 했다.
천애랑은 허공섭물의 묘리로 깊게 숙인 당정아를 일으켰다.
“그 부탁 받아들이지. 대신 거래조건의 저울이 그대에게 기우는 듯하니 나도 조건을 걸겠다.”
“무엇이든 말씀 하시지요.”
“향후 당가는 기공가는 물론 내 사람들에게 맹우에 가까운 우호적 태도를 취할 것.”
당정아가 눈을 크게 뜨고 천애랑을 보았다. 천애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어렵나?”
천애랑의 말에 당정아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을 조건이라고 말씀하셔서요. 최소 제가 살아있는 한 당가는 기공가와 절대적 맹우로서 함께할 것을 약조 드립니다.”
정중히 포권을 취하는 당정아를 보며 천애랑은 마주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허무맹랑한 대답이 아닌 자신이 지킬 수 있는 범위의 확실한 약조를 하는 당정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 * *
어느 정도 숨을 돌린 일행들은 상황을 정리했다.
현장에 있던 시신 중 야수족들의 시신을 골라 풍장(風葬)의 기원을 했다.
맹건이 나서서 부족 특유의 춤을 추기 시작하자 야수족들도 따라서 춤을 추며 모아둔 시체의 주변을 돌았다.
자연에 의해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자연 속에서 야수족의 친구들로 태어나길 기원하는 이들을 보면서 천애랑은 숙연히 같이 기도했다.
예전보다 죽음을 대하는 마음이 무뎌져 가는 현실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이들처럼 지나간 사람들을 추억하고 기원하고 싶었다.
이들이 기원하는 것처럼 부모님과 가문의 식구들, 할아버지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작은 기원이 살며시 미소 짓게 만들었다.
이들의 기원 덕분인지 일행들이 있는 곳은 독무지대 답지 않게 푸르른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