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공술사-64화 (64/200)

기공술사 64화

운남성(雲南省).

북고남저의 지형으로 북쪽은 고산이 많고 남쪽 끝은 정글과 독천으로 뒤덮인 다양한 기후의 땅이었다.

중원을 기준으로 거리가 멀고 고산이라는 천애 방어지형을 중원과 마주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자치왕권을 유지며 살던 곳이었다.

물론 여러 나라들의 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중원과 거리가 멀다는 부분 때문에 반란과 독립이 자주 일어났다.

운남은 중원인들이 변방이라고 비하하는 용어로 남만이라고 불렀고, 한무제의 통일왕조인 한나라의 시기에 처음으로 치하에 들어가 익주에 편입되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제갈량이 맹획의 10만 반란군을 잠재우면서 촉한의 통치에 있었다.

그 뒤 혼란의 시기들을 지나 현 원나라의 시조인 쿠빌라이 칸이 운남의 대리국(大理國)을 멸망시키며 또다시 원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는 황권이 흔들리자 운남은 관리들의 폭정이 횡행했고 그 결과 무법지대와 비슷한 분위기가 되었다.

민간 치안을 담당해줄 굵직한 정도무림문파들도 없다 보니 혼란을 틈타 성장한 사파들이 득실거렸다.

사천의 경계를 지나 이곳 운남 북쪽으로 진입한 마차 한 대와 12마리의 말이 고산들 앞에서 진행을 멈추었다.

더 이상 마차로는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마부의 말에 마차 안에서 젊은 남녀가 내렸다.

천애랑은 당정아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높고 험난한 산악 지형에 마차는 물론 말들도 데려가기 어려워 보였다.

12마리의 말에 타고 있던 이들은 가주 당천금을 은밀히 호위하던 당가십이들이었다.

당가의 아가씨인 당정아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따라왔는데 그들의 천애랑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곱지 않았다.

천애랑은 당가를 떠나기 전을 떠올렸다.

*  *  *

당가주 당천금은 고작 이 주 만에 나타나 팔각사를 잡으러 떠나겠다는 천애랑을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내심으론 매우 놀란 상태였다.

“정녕 팔각사 내독성 훈련이 끝난 것인가?”

천애랑은 당천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덕분이오. 그리고 여기 훈련을 시켜준 선생이 워낙 유능한지라.”

천애랑의 말에 당천금이 눈을 좁혀 당정아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당정아는 눈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부녀지간의 모습은 아니란 말이지.’

천애랑은 무언가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시선을 당천금에게서 느꼈다.

담가의 가주 담하웅이 담대혁이나 담소연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완벽하게 결이 달랐다.

당가의 가풍이라고 치부하기엔 꽤나 꺼림칙한 부분이 느껴져 천애랑이 생각에 잠기는데, 당천금이 예의 권위적이고 무덤덤한 무표정으로 천애랑에 말했다.

“그래. 혹 우리가 더 도와줄 것이 있겠는가? 말만 하게.”

당가주의 말에 천애랑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여기 당 소저를 길잡이로 부탁드리고 싶소. 괜찮겠소?”

천애랑은 처음으로 당천금의 무표정이 깨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당천금은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이리 깊이 고민을 하는 것을 보니 의아함은 더욱 증폭되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천애랑은 당천금과 당정아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관찰했다.

“그러시게.”

당천금은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으면서 손을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그렇게 천애랑과 당정아는 가주전을 벗어나 잠시간의 준비시간을 가지고 당가를 벗어나려 했었다.

그때 마부가 있는 마차와 함께 12명의 당가십이가 합류했다.

*  *  *

천애랑과 당정아가 마차에서 내리자 당가십이도 따라 말에서 내렸다.

호위라면 응당 새로운 지역에서 주변을 탐색하고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할 텐데 저들은 그저 따라다니기만 하고 있었다.

심지어 당정아를 지키고자 한다면서 되려 감시의 눈초리만 강할 뿐이었다.

천애랑은 또다시 저들 당가십이의 날 선 시선을 받았으나 애써 무시했다.

당가에서 이곳까지 약 10일간의 기간 동안 이어진 저들의 저런 행동에 사사건건 반응하기 귀찮은 것이 컸다.

그리고 저들의 태도가 어찌 되었든 당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예민하게 굴어 현재까지 순항하고 있는 화룡단의 취득과정을 방해받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아침 일찍 산을 넘어 이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부 아저씨는 가문으로 돌아가셔도 좋을 것 같네요.”

당정아의 말에 마부가 조심하라는 걱정과 함께 깊게 읍을 하고선 말들과 마차를 돌려 사라졌다.

마부를 떠나보낸 당정아가 주위를 둘러보자 당가십이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고 있지 않았다.

그간은 사천에서의 당가 영향력 아래 객잔에서 편히 숙식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늦은 시간 야영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니 모두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가십이는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가주의 직속 부대라고 할지라도 당가에서의 직급은 당정아가 더 높기에 당가의 규율상 당정아의 명을 따라야 했고 그러지 못할 경우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대들도 좀 돕지?”

보다 못한 천애랑이 당가십이에게 한마디 하자 돌아온 건 비아냥뿐이었다.

“우린 그대의 사냥놀이나 돕자고 온 것이 아니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친히 경계를 서주고 있는 것을 보고도 모르오?”

“킥킥.”

“크큭.”

당가십이의 비웃음에 당정아가 민망하게 천애랑을 보았지만 천애랑은 괜찮다는 눈신호만 보내고 장작을 줍는 등 제 할 일을 했다.

‘화룡단.’

천애랑은 머릿속으로 동생을 살릴 영약을 되뇌며 저들의 비아냥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산속에서의 밤은 그 어두움과 눈을 마주쳤다 생각하는 순간 순식간에 찾아오는 법.

천애랑 일행에게도 밤의 어두움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찌르르 거리는 풀벌레 소리에 타닥거리는 모닥불이 화음을 얹었다.

천애랑은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으며 송소걸을 생각했다.

‘어찌 무탈하게 잘 버티고 있으려나.’

무려 신의가 2명이나 붙어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매번 생각하면서도 쓰러지던 날, 품에서 거침없이 차갑게 식어가던 소걸이를 잊을 수가 없었다.

“또 동생 분을 생각하십니까?”

당정아의 물음에 천애랑은 사색에서 돌아왔다.

그는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어떤 고통 속에 있는 것일지 짐작이 안 가기에 더욱 걱정이오. 의형인 내가 더욱더 빨리 움직여야 그 고통의 시간이 줄 것인데 말이오.”

당정아가 육포를 찢어 천애랑에게 건네주며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천 가주님은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외인인 제 눈에도 보이는 것이니 스스로를 너무 채근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정아의 말에 천애랑은 실소가 나왔다. 자신은 소걸이 걱정뿐인데 그런 자신을 걱정해주는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이 묘했다.

오랜만에 분노와 걱정의 감정들에서 조금은 벗어나 그간 맺었던 인연들이 떠올랐다.

아마도 간만에 산속에서 모닥불의 밤바람을 쐬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고맙소.”

천애랑의 감사에 당정아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나저나 당가십이 분들이 안 돌아오네요.”

야영 준비를 끝내 돕지 않던 당가십이는 어두움이 내려앉자 주변을 둘러본다며 자리를 비웠었다.

천애랑은 당가십이가 뭘 하든 어떻게 되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당정아의 걱정에 기감을 확장시켜봤다.

‘어? 이것 봐라.’

기감 속에서 묘한 기척들이 감지되었다.

천애랑은 빠르게 탐색하고자 하는 의미로 기를 얇고 넓게 펼쳤는데, 오십여 장(150m) 너머에서 다수의 기척들이 포위하듯 빠르게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기척들은 확실한 목적이 있는 듯 주저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적이 오오. 태연히 있되 준비만 하시오.”

천애랑은 다가오는 기척들을 적으로 단정 지었다.

십여 장(30m) 안으로 들어온 기척들에게서 확실한 살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천애랑의 말에 당정아는 놀랐지만 차분하게 암기들을 매만졌다.

부스럭.

삼 장(9m). 작은 소리와 함께 적막이 찾아왔다.

당정아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기감을 펼쳐봤지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천애랑의 말과 덤덤한 그의 표정만 믿고 준비를 했다.

쉬익!

흑색으로 칠해져 어둠에 녹아든 작은 단검이 시작이었다.

탱!

천애랑은 손에 쥔 장작으로 날아오는 암기를 가볍게 쳐내었다.

쉬쉬식!

첫 암기를 신호탄으로 사방에서 별의별 암기들이 날아왔다.

탱! 탱! 탱! 탱!

장작에 부딪혀 힘을 잃는 암기들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져 내렸다. 그 수가 눈 깜짝할 새 20개가 넘었다.

천애랑이 전 방위적인 방어를 했기에 당정아는 손에 암기를 쥔 채 다소 놀란 시선으로 주위를 살필 뿐이었다.

촤르륵---!

암기의 포화가 끝난 후 쇄겸(鎖鎌)이 날아들었다. 한쪽 끝엔 낫, 반대편엔 추를 단 사슬무기였다.

천애랑은 들고 있는 장작에 내기를 실어 날아드는 쇄겸의 사슬 중간 부위에 던졌다.

촤라라락!

채찍처럼 날아오던 쇄겸의 날이 천애랑의 장작에 방향이 꺾이며 허공을 회전하다 떨어졌다.

그러나 이내 살아있는 뱀처럼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다시 쏘아졌다. 그리고 이번엔 하나가 아닌 8개의 쇄겸들이었다.

차라라라라라락!

방울뱀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천애랑은 탄지공을 날려 손쉽게 8개의 쇄겸을 파훼했다.

쉽게 무산된 공격에 어둠 속의 인물들이 당황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도망을 쳤다.

“잠시만.”

천애랑이 당정아에게 말을 함과 동시에 축지법으로 그들을 쫓아갔다.

“커억!”

이내 숲속에서 단말마가 들렸다. 반각(7분)도 지나지 않아 천애랑이 숲에서 8개의 시신들을 끌고 왔다.

천애랑이 끌고 온 시신들의 복색이 특이했는데 이들은 모두 이마부터 정수리까지 한가운데만 남기고 양쪽 머리를 민 상태였다.

그리고 가슴께와 하반신이 움직이면 다 보이는 매우 투박한 옷을 입고 있었다.

“왜의 해적들이네요.”

당정아가 이들을 알아보고 말을 했다.

“왜?”

천애랑의 의문에 당정아가 암기를 소매에 정리하면서 대답했다.

“바다 건너 섬나라에 사는 이들입니다. 식량자원이 부족한 탓인지 해적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운남 너머 바닷가에나 있을 법한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게 저도 의아합니다.”

‘한 놈은 살려둘 걸 그랬나.’

당정아의 설명을 들은 천애랑은 궁금증만 남기고 죽은 이들을 유심히 보았다.

모두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평소 상대했던 무림인들만 생각하고 탄지공을 날렸다가 다 즉사해버렸다.

‘이렇게 약할 줄 알았나.’

무기술이 제법인 것과 몸이 강한 것이 별개인 자들이었다.

그때 왜의 해적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반대 숲에서 당가십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천애랑의 발치에 있는 시신들을 보고 놀라 하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소?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걱정의 목소리와 표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걱정의 말이 당가십이에게서 나왔다.

천애랑은 고개를 모로 하고 당가십이들을 쳐다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천애랑의 행동에 당가십이의 얼굴들이 찌푸려졌으나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다.

그들 사이로 당정아의 간략한 설명만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