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63화
당가주와의 대면은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신상정보에 대한 흔한 대화는 고사하고 그저 서신만 읽고선 축객령처럼 쫓겨나듯 자리가 파해졌다.
당정아가 대신해 천애랑에게 당가주의 성격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불필요한 대화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라…….”
천애랑이 고개를 저었다.
“괘념치 않소. 그나저나 독에 대한 훈련이라…….”
당가에 오면서 생각했던 가설들 중 한 가지이기는 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의 가능성으로 생각했던 것은 당가의 정예들이 팔각사 사냥에 도움을 주고 화룡단을 제외한 부산물의 소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팔각사라는 것을 보진 못했지만 거대한 뱀이라고 하니 그 사체가 갖는 가치가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독에 대한 내성훈련만 시키고 다른 도움에 대해서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당가주가 다소 팔각사 사냥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상대방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명을 내렸었다.
독단적인 성격과 함께 소림방장의 소개장에 대한 체면치레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천애랑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고 있자 당정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 가주님. 진정 독에 대한 훈련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천애랑은 당정아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았다.
“하겠소. 그것이 화룡단을 구하기 위한 가장 빠르거나 확실한 방법이라면.”
“독을 훈련한다는 것은 저희 당가에서도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나 팔각사의 여덟 독의 훈련은 심한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나서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천애랑은 당정아에게 강한 시선을 보냈다.
“훈련을 시켜주시오. 내 동생을 살리기 전엔 죽을 생각은 없으니 내 목숨일랑 걱정 마시오.”
천애랑의 강한 의지에 당정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형제라는 분은 참 좋으시겠네요. 목숨으로 지켜주고자 하는 이가 있으니까요.”
당정아의 눈은 부러움과 극심한 쓸쓸함으로 가득 찼다.
* * *
당가의 뒷산. 사람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 동굴에서 천애랑과 당정아, 두 사람은 즉시 훈련에 착수했다.
“실은 팔각사의 여덟 가지의 독을 완벽하게 구현하진 못합니다. 팔각사가 독을 뿜을 때는 영기(靈氣)가 섞이니까요. 다만 기록들에 의존해 최대한 재현해 놓은 독들이 있습니다.”
당정아는 말을 하면서 마련된 탁자 위에 밀봉된 병들을 조심히 올려놨다.
“팔각사의 뿔은 촉각, 청각, 후각, 시각, 공간감각, 방향감각을 방해하는 독들과 환각을 일으키는 미혼독, 마지막으로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일으키는 춘독이 있습니다. 모든 독들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독무지대에 퍼져있는 독은 미약한 산공독으로써 치명적이지는 않으나 지속적으로 흡입할 경우 내공이 흩어져 체력이 떨어짐은 물론 팔각사를 상대할 여력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듣는 천애랑은 역시나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팔각사 자체만으로도 강적이라는데 어디 하나 만만한 독들이 없었다.
“물론 각 독에 맞는 해독제들이 있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영기가 섞인 팔각사의 독을 완벽히 해독한다고 볼 수 없을뿐더러 그 지속시간이 짧을 겁니다.”
“알겠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시오.”
“팔각사의 독 여덟 가지와 독무지대의 독 한 가지. 그리고 고통에 대한 내성을 기를 당가의 독 한 가지를 훈련할 것입니다. 먼저 고통에 대한 훈련부터 시작하시죠. 그래야 다른 독들의 고통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럼 우선 가부좌를 틀고 편히 앉으세요.”
천애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르자 당정아는 여러 병들 중에서 단장(斷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병을 들었다.
“오보단장독이라고 불리는 독입니다. 오보를 걷기 전에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주는 당가의 극독 중 하나입니다. 고통을 주는 독들 중에선 수위에 꼽히는 독이니 이 독을 이겨낸다면 어지간한 독의 고통은 눈 아래로 내려다보게 될 것입니다. 최대한 훈련 시간을 단축시키고 싶다고 하신 천 가주님의 의견을 반영했습니다. 그런데 내공을 쓰지 않고 견뎌야 합니다.”
말을 마친 당정아는 독병의 뚜껑을 살며시 열며 그 독의 소량만을 내공으로 뽑아냈다.
“고통에 대비하세요.”
그녀는 독을 천애랑에게 가벼운 손짓으로 뿌렸다.
천애랑이 무언가를 대답하려는 찰나 매캐한 냄새와 함께 고통이 찾아왔다.
나긋한 당정아의 말과는 완벽히 상반되는 고통이었다.
“커억!”
천애랑의 고통스런 신음이 터져 나오자 당정아가 소리쳤다.
“정신을 유지하세요.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천애랑은 누군가 배 속에 손을 집어넣어 마구 휘젓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한 번씩 장기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도 느껴졌는데 그럴 때마다 극심한 어지럼증과 구토감이 몰려왔다.
“끄으으윽.”
천애랑이 거품을 물고 기절하려고 하자 지켜보던 당정아는 내공의 바람을 이용해 해독제를 천애랑에게 흡입시켰다.
“커, 커어억!”
천애랑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무려 일 각(15분)이나 버텼어요. 당가 무인들도 처음엔 반각도 못 버티는데 매우 잘하셨어요.”
천애랑은 속으로 욕이 나왔다.
최소 한 시진(2시간)은 지난 것 같았는데 일 각(15분)밖에 안 지났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공 없이 버티라는 것을 시작하기 직전에 알려줄 게 뭔가. 준비 없이 얻어맞은 느낌이라 더욱 고통스러웠다.
천애랑이 어느 정도 호흡을 정리하자 당정아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다시 해보죠.”
천애랑이 무어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오보단장독의 고통이 천애랑을 뒤덮었다.
“끄으으으!”
* * *
고통 속에서 2주일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천애랑은 오보단장독의 고통으로 나흘 동안 열 번은 기절했다.
그래도 꾸준한 훈련 덕분인지 이제는 오보단장독의 고통을 맨정신으로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천애랑의 모습에 당정아는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성취 속도라며 감탄을 했다.
그 뒤로 이어진 독들은 그래도 수월한 편이라고 천애랑은 생각했다.
당연히 말도 못 할 고통이 있었지만 오보단장독만큼은 아닌지라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었다.
촉각, 청각, 후각, 시각, 공간감각, 방향감각의 부재는 평상시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의 균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시간이었다.
그래도 광활한 대자연의 기에서 자아를 유지했던 기공 4단계의 경험이 감각의 부재 속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더 나아가 감각이 하나씩 부족할 때 움직임의 차이를 느끼면서 무공자세를 다듬었다.
당정아는 독의 내성을 기르는 훈련을 받으며 오히려 무공수련을 더하는 천애랑을 괴물처럼 보았다.
환각을 일으키는 미혼독은 천애랑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환술이 통하지 않는 기공가의 무공 경지가 내공에 의지하는 수준을 넘어 신안(神眼)의 수준으로 각인이 되었기에 잠깐의 고통만 참아내고 훈련은 끝났었다.
산공독은 감각과 고통을 이겨내는 훈련과는 결이 달라 산공독이 체내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감각훈련을 했다.
그리고 산공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고 산공독이 느껴지는 즉시 체내에서 밀어내는 훈련을 했다.
“이제 마지막이오?”
천애랑은 당정아가 집어든 춘(春)이라 적힌 독병을 보았다.
준비된 독 중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둔 독. 성욕을 증강시키고 참지 못하게 하는 독이었는데 팔각사가 존재하는 숲에선 이 독에 의해 많은 생물들이 번식한다고 했다.
자연의 입장에선 더욱 풍요롭게 되니 독이 아니라 약이 되는 셈이기도 한 특이한 독이었다.
“예. 천 가주님께서 그간 엄청난 성과를 얻으셨으니 이것 또한 쉽게 끝내시리라 믿습니다.”
당정아는 거침없이 독병을 열었다.
천애랑은 당정아의 손짓에 따라 흡입되는 독을 천천히 감상했다.
이번 독은 그전의 독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고통이 적었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을 이겨내고 나니 기묘한 독의 흐름이 느껴졌다.
회음혈과 백회혈로 갈라져 퍼지는 독을 느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흐읍!”
독들이 해당 혈들에 닿는 순간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눈앞이 뿌옇게 일었다.
초점이 흐릿해지니 꿈을 꾸는 듯 몽롱한 기분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천애랑은 달뜬 호흡을 내뱉으며 정신을 붙잡고자 안간힘을 썼다.
덥썩!
천애랑의 손이 거칠게 당정아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런 천애랑을 당정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천애랑이 혼란한 기분을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가시오. 여기서. 당장!”
천애랑의 고통스런 말이 있음에도 당정아는 꿈쩍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끄으윽!”
천애랑은 참을 수 없는 성욕에 당장이라도 눈앞의 당정아를 품고 싶었다.
저 녹색 피풍의와 옷들을 벗겨 던져버리고 살 내음에 취해 지금의 욕정을 풀어내고 싶었다.
“끄흐으으읍!”
천애랑이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정신을 부여잡느라 부릅뜬 두 눈에서도 실핏줄들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터질 듯한 양물에 지치지 않는 심장은 이성의 끈을 휘둘러댔다.
참을 수 없는 성적 본능이 온몸을 잠식할 때 천애랑의 뇌리로 담소연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후우우…….”
천애랑이 두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왜 담소연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는 채 천애랑의 뇌리로 송소걸이 이어 떠올랐다.
항상 밝게 웃으며 장난을 많이 치던 아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누워있던 불쌍한 동생.
“후우우우…….”
천애랑의 심호흡이 더욱 깊고 길어지기를 반복했다.
“후우.”
천애랑이 숨을 정리하며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당정아가 서있었다.
“성취를 감축드립니다.”
당정아가 고개를 숙여 천애랑에게 인사를 하자 천애랑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리를 피하지 않았었냐고 나 때문에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천애랑은 따지고 싶었지만 당정아가 말한 표현에 대해서 먼저 답을 했다.
“……성취라니 무슨 말이오?”
당정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방품이라고는 하나 무려 영물이 품는 여덟 가지의 독을 이겨내셨으니 내공이나 감각에 발전이 있으셨을 겁니다. 한 번 내공을 움직여 보시지요.”
천애랑은 당정아의 말대로 오랜만에 내공을 일으켰다.
쏴아아------
청량한 내기가 순식간에 뿜어 나오며 동굴 안 답답했던 공기를 쾌적하게 만들었다.
천애랑은 자신의 성장한 감각에 감탄했다.
‘제공권이 가볍다.’
반경 내 절대적인 감각을 갖는 제공권을 펼침에 있어 더욱 자연스럽고 수월해진 느낌을 받았다.
팽풍궐과의 전투에선 엄청난 신체 부하가 뒤따라서 그 뒤론 훈련만 할 뿐 실전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감각에 대한 독들의 영향 때문인지 크게 성장을 한 느낌이었다.
“놀랍소.”
천애랑이 환히 웃었다.
“그렇게 웃으실 줄도 아시네요.”
마주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당정아를 보며 천애랑은 미소를 지우고 인상을 썼다. 그리고 못했던 말을 했다.
“그나저나 왜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오? 나 때문에 그대가 큰 봉변을 당할 뻔했소.”
천애랑의 질타에 당정아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지 그러셨습니까.”
“……?!”
예상치 못한 당정아의 대답에 천애랑이 당혹감을 가졌다.
“실언입니다. 무시해 주시지요.”
당정아가 고개를 흔들며 독병들을 정리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동굴 안에 내려앉았다.
천애랑은 그런 당정아의 등을 보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조심히 말했다.
“무슨 걱정이 있는 것이오? 내게 말을 하시오. 그대는 내게 은혜를 베푼 이이니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성심껏 돕겠소.”
천애랑의 걱정 어린 말에 정리하던 당정아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는데 당정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약, 정말 만약에.”
당정아가 꾹꾹 눈물을 삼키다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천 가주님께서 팔각사 사냥에 성공하신다면 그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또한 이야기를 듣고서 도움을 주시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당정아의 알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 앞에서 천애랑은 선뜻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