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62화
그곳엔 어두운 녹색의 무복을 입은 젊은 남녀가 있었다.
이들 또한 독이나 암기를 위한 것인지 옷의 다른 부위에 비해서 소매 폭이 넓었다.
소가주가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천애랑에게 다가왔다. 그는 주변의 상황을 살피며 서늘한 눈빛을 지었다.
그 눈빛에 외당 무인들이 몸을 움츠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무슨 일이지?”
소가주의 말에 문지기가 극심한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늦어지는 대답에 소가주의 볼이 움찔거리자 문지기가 바닥에 부복했다.
소가주는 심기가 극도로 불편할 때 볼이 푸르르 떨렸고 그럴 때마다 사달이 났기에 문지기가 다급히 행동한 것이었다.
당가가 독과 암기로 유명하다고 하나 독이라는 것이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체질이 필요함은 물론이고 수백, 수천 가지의 독을 훈련하기 위해선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그래서 당가에서도 독에 대한 훈련을 선택과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내당에 위치한 당가 씨족들 위주로 이루어졌다.
갓난아이 때부터 서서히 독에 익숙하게 만들고 걸음마를 떼고 학습이 가능한 시기부터는 백독지체, 천독지체, 만독지체로 이어지는 독인(毒人)을 만들어 간다.
그 과정에서 폐인이 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작은 부작용을 하나씩 가지기도 했다.
당가의 소가주인 당상호는 한쪽 볼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독인이 되면서 얻은 부작용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자의와 상관없이 볼이 푸르르 떨렸다.
“소림방장의 서신과 함께 가주님을 만나겠다고 온 청년을 안내 중이었습니다.”
문지기는 벌벌 떨면서도 맡은 바 말을 다 했다.
소가주는 문지기의 말을 듣고는 천애랑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엔 사천 제 일 세가의 소가주라는 거만함이 담겨 있었다.
“가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소가주 당상호는 아버지인 당천금을 항상 가주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이는 절대적 권위로 지배되는 당가의 분위기와 당천금의 차가운 가르침이 큰 영향을 미쳤다.
천애랑은 소가주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주 쳐다봤다.
적막이 길어지자 소가주의 볼이 또다시 떨렸는데 그때 천애랑이 입을 열었다.
“당가는 손님을 대하는 방식이 원래 이따위인 건가. 아니면 당가는 소림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그게 아니면 소림방장이 우스운 것인가. 그것 또한 아니면 소림방장의 친우인 당가의 가주조차 우스운 것인가. 문지기부터 소가주라는 이까지 문제가 많구만.”
천애랑의 날 선 말에 소가주의 볼이 격하게 흔들렸다.
소가주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만지듯 연신 꿈틀거렸는데, 그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소가주의 손을 잡았다.
여인과 소가주가 눈을 마주치자 소가주의 불안한 신색이 급격히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여인은 소가주를 뒤로하고 좀 더 앞에 서며 천애랑에게 포권을 취했다.
일반적인 여인들의 인사법이 아닌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의 인사였다.
“당가의 여식이자 소가주의 누이인 당정아라고 합니다. 당가의 결례를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공자의 신분부터 밝힘이 좋을 듯합니다. 서신의 존재는 저희가 바로 확인할 수 없음이기에 오해가 더 쌓이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과를 함과 동시에 당가의 행동취지에 대해 합리성을 불어넣는 당정아를 천애랑은 눈에 이채를 띠고 보았다.
전반적인 어조는 사과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신분을 밝히지 않는 천애랑에 대한 질타였다.
가문의 정치는 소가주라는 놈보다 이 여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천애랑은 상대방의 정중함에 마주 포권을 취하며 소개를 했다.
“천애랑. 기공가의 가주요. 그리고 당가주에게 볼 일이 있으며 소림방장의 소개장이 담긴 서신을 가지고 있소.”
“기공가!”
천애랑의 소개에 외당 무인들이 감탄했다.
사천의 여러 이익집단들은 청해와 신강을 잇는 비단길의 무역을 애용했다.
직접적으로 사업을 하든 비단길을 이용해 들여온 수입물품들을 이용하든 사천에서 이 비단길과 무관한 이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는 당가도 마찬가지였는데 비단길이 위치한 신강이 마교의 세력권이다 보니 마교의 정세에 대해 다른 정도 문파들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20년 전 기공가에 의해 마교의 세가 쇠락했을 때를 당가인들은 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상호와 당정아도 다른 무인들처럼 놀란 눈을 했다.
“놀랍군요. 그 유명한 기공가의 가주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가주님께는 제가 안내를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지? 상호야?”
당정아가 주도적으로 나서니 상황이 부드럽고 빠르게 흘러갔다.
당정아의 말에 당상호는 천애랑이 불편한 듯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별다른 말 없이 자신의 거처로 가버렸다.
외당 무인들은 당정아의 지시에 다시 각자의 근무지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천애랑과 당정아만 남았다.
천애랑은 당정아의 안내를 받으며 그녀를 관찰했다.
높지 않은 코에 크지 않은 눈, 얇은 입술과 함께 반듯한 얼굴선이 단아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일반적인 남자보다 키가 큰 편이었는데 몸매가 피풍의의 밖으로도 드러날 정도로 큰 굴곡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리고 독 때문인지 손이 입고 있는 옷처럼 어두운 녹색 얼룩으로 물들어 있었다.
외모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나가면서 마주치는 당가인들의 따뜻한 시선이었다.
소가주를 두렵게 바라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들에 의문점이 생겼다.
“사람들이 그대를 꽤나 따르나 보오.”
천애랑의 말을 들은 당정아는 각자의 할 일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게 가족이니까요. 그저 가족으로 대한 것뿐이죠.”
“저들이 소가주를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다른 것 같던데?”
“제가 드릴 말은 없겠네요.”
당정아는 차분하나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짐작건대 무공도 그대가 소가주보다 높고 나이도 더 많으며 사람들이 더 따르는데 왜 그대가 소가주를 하지 않는 것이오?
이번의 질문엔 당정아의 표정이 잠시 굳었으나 이내 미소를 띠며 답했다.
“이번에도 제가 드릴 말은 없겠네요.”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기공가의 가주께선 당가에 방문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요?”
천애랑은 질문에 대한 답을 솔직하게 말했다.
당정아는 천애랑의 입에서 나온 화룡단을 구하기 위함과 당가 도움의 필요성, 소림방장의 소개장에 대해서 듣고는 놀란 눈을 했다.
“놀랍네요. 그리고 용감하시고요. 그런 자신감에 대한 실력은…… 있으시겠죠. 가주님의 손님에게 질문을 가로채는 것은 실례이나 너무나 궁금해 무례를 범했습니다.”
사과하는 당정아에게 천애랑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런 허례허식은 괜찮소. 그나저나 혹시 팔각사(八角蛇)를 본 적 있소?”
당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그것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당정아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운남 독무(毒霧)지대에 산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영물입니다. 목격담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십 년에 한 번이 될 정도로 매우 보기 힘든 생물이죠. 거대한 뱀의 머리에 뿔이 8개가 있어 팔각사라 불리는데 그 영물의 내단이 화룡단이라고 알려진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오문주에게 들은 정보와 비교해갔다.
“팔각사의 여덟 뿔에선 각각 종류가 다른 독이 뿜어져 나오는데 모두 극독이라 독에 내성이 없으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어도 독의 안개 때문에 팔각사를 찾기도 전에 위기를 맞이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듣던 천애랑은 의구점을 질문했다.
“그것이 영물이고 천고의 영약을 내단으로 품고 있는 놈인데 독에 강한 당가가 왜 사냥을 하지 않은 것이오?”
당정아 또한 어릴 적 팔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품었던 질문인지라 공감하며 답했다.
“어찌저찌 독무를 해결하고 팔각사 뿔의 독들조차 이겨낸다고 한들 남아있는 큰 문제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팔각사 자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합니다.”
“……?”
당정아는 천애랑의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보며 작게 웃었다. 자신 또한 어릴 때 저런 반응이었었다.
“팔각사의 무력을 무림인으로 비교하자면 화경 고수 두 명의 느낌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를 몰랐던 시절의 당가나 다른 세력들에서도 여러 번 사냥시도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넘을 수 없는 무력 앞에서 큰 사상자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정적으로 사냥을 보류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득보다 실이 커서 포기에 가깝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천애랑은 당정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궁금증이 다소 해결되었다. 그리고 각오를 굳게 했다.
화룡단을 얻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들 피해갈 문제도 아니었고 피해갈 마음도 없었다.
둘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가주전 앞에 도착했다.
“가주님. 정아입니다.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소림방장의 서신이 있다고 합니다.”
당정아의 외침에 가주전의 문이 시종들에 의해 양쪽으로 드르륵 열렸다.
다소 어둡다고 느껴질 분위기의 가주전 안쪽엔 높은 단상과 거대한 의자가 있었다.
그 의자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 남성이 턱을 괴고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방과 중년남성의 분위기가 매우 고압적으로 느껴졌다.
“들어 오거라.”
가주의 말이 떨어지기까지 당정아는 미동도 없이 기다리다가 가주의 말이 있고서야 움직여 들어갔다.
천애랑은 당가가 매우 권위적이고 딱딱한 곳이라고 느껴졌다.
천애랑은 당정아의 뒤를 따라 가주전 안으로 들어가며 전각 대들보와 기둥의 어둠들을 쳐다봤다.
“대단하군. 기껏해야 상호 그놈이랑 동년배인 것 같은데 당가십이(唐家十二)의 존재를 눈치채다니 말이야.”
가주의 말에 당정아가 놀란 눈으로 천애랑을 뒤돌아봤다. 그 시선에 천애랑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 식구 중에 은신술이 천하제일인 이들이 있어서 말이오.”
“크흐흐흐흐흐.”
가주 당천금이 저음의 웃음을 내었다. 당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당천금에게 천애랑의 말은 꽤나 도전적으로 들렸다.
“재밌는 젊은이로군. 그래. 소림방장의 서신이 있다 하던데 이리 주겠나?”
천애랑은 당천금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냐하면 당천금과의 공간에서 기운으로 은근히 접근을 막는 구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거리가 삼 장(9m)이었다.
무슨 의도일까 고민하다가 천애랑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서신을 허공섭물로 천천히 당천금에게 날려 보냈다.
무림인들에겐 그리 먼 거리는 아니기에 단순히 던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서신을 주고받는 모습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허공섭물로, 그것도 매우 천천히 보낸 것이었다.
매우 느리게 다가오는 허공섭물을 보며 당천금은 놀란 마음을 숨겼다.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과 깨달음이 있다면 허공섭물을 펼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느리게 운용하는 것은 격이 다른 행위였다.
당천금은 과연 자신도 저렇게 섬세하게 허공섭물을 펼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천애랑이 보낸 서신을 받아 펼쳤다.
빠르게 서신을 읽어 내린 당천금이 서신의 말미에서 눈썹을 치켜뜨며 놀란 눈을 했다.
“소림의 은인이라?”
당천금은 다시금 속독으로 서신을 읽어 재차 내용을 확인한 후 삼매진화로 서신을 불태웠다. 그리고 당정아를 향해 명을 내렸다.
“당정아 네가 전담해서 기공가주에게 팔각사의 여덟 가지 독에 대한 훈련을 진행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