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61화
마교의 인물들이 물러난 후 소림엔 고통스런 침묵이 잔존했다.
소림 역사 속에서 외침이 왜 없었겠냐마는 이처럼 적의 수괴가 직접적으로 공격해 온 것은 근 백 년 동안 없던 일이었다.
소림의 인물들이 사상자들과 불이 붙은 전각을 수습하는 동안 소림방장은 천애랑 등 손님들을 맞이했다.
소림방장이 약왕전에서 간단히 치료를 받은 후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자리했다.
“부상이 심한듯한데 쉬셔야 하지 않겠소.”
천애랑이 방장의 잘린 팔을 보며 말하자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네. 내 칠십 평생을 수발드느라 고생한 왼팔이 먼저 휴식을 취한 것일 뿐이네. 그리고 소림을 구해준 인물들을 대함에 소홀해서야 되겠는가.”
“늙은이가 강단이 있군.”
하오문주의 거친 말에 소림방장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하오문주라 하였는가. 오늘의 도움에 소림을 대표해 감사를 표하네.”
“별로 감사받을 생각 없소. 오늘은 하오문주가 아닌 딸의 아비로서 잠시 들른 것일 뿐이니. 그리고 내가 딱히 한 것은 없소.”
“천 시주가 구하고자 한 형제의 아비가 그대인가 보구려.”
하오문주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천애랑을 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해석한 천애랑이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보였다.
“여기 어르신이 선뜻 도움을 주셨소.”
하오문주는 새삼스럽게 소림방장을 보고선 팔짱을 풀고 포권을 취했다.
“내 딸을 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어 감사하오.”
소림방장은 마주 포권이나 합장을 취할 수 없어 반장을 하며 하오문주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소림방장은 자신의 뒤를 향해 말했다.
“거기 어두운 시주들도 불편하게 그러지 말고 이리 편히 앉으시게나.”
천애랑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편히 앉아.”
천애랑의 말이 떨어지자 소림방장의 후방위 구석에서 은신을 하고 있던 유소소와 유소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둘은 소림방장을 경계하듯 양 측면 방향으로 나뉘어 앉았다.
그 모습에 소림방장이 미소를 지으며 천애랑을 보았다.
“든든한 부하들을 두었구만.”
천애랑이 고개를 저었다.
“가족이오. 실상이 어쨌든 부하란 표현보다는 가족이 더 좋더이다.”
천애랑의 말에 유설화와 유설호의 눈이 작게 떨렸다.
“아미타불.”
소림방장이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그대들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네. 그대들이 없었다면 저 마교도들에 의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소림의 기둥이자 역사가 담긴 장경각과 약왕전이 큰 피해를 입을 뻔했다네. 만약 그랬다면 소림은 봉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야.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고 말이지.”
천애랑은 소림방장의 말을 듣고 보니 좀 전의 일들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인지했다.
“마교가 소림을 공격한 이유를 아시오?”
천애랑은 소림방장에게 질문을 던지고 하오문주에게도 시선을 보냈다.
소림방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앞서 말한 것처럼 소림의 봉문이 그들에게 가장 큰 득이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네.”
“소림의 봉문이 큰 득이 된다?”
천애랑의 의문에 하오문주가 대답을 이어받았다.
“옛 정마대전을 치를 때 마교가 한 가장 큰 실수가 사전에 방해물들을 정리하지 않은 것이었다네. 그 덕에 정도 무림맹은 은밀히 마교의 후방을 공격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지. 만약 마교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50년 전 그때, 중원은 마도천하가 되었을 것이네. 아마 이번 소림에 대한 공격은 그런 작업의 일환이지 않을까 짐작한다네.”
소림방장은 하오문주의 대답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방장은 눈을 감았다. 50년 전 그 날의 전쟁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만약 오늘 소림이 봉문을 했더라면 정도 무림엔 큰 혼란이 왔을 터였다. 모골이 송연했다.
소림방장은 새삼 시절인연을 떠올리며 천애랑을 보았다. 모든 상황이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오늘의 결과였다.
“천 시주는 이제 어찌 움직이시려는가.”
소림방장의 질문에 천애랑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동생을 구할 다른 영약을 구하러 갈 것이오.”
남을 위한 일을 당연히 해야 할 행동처럼 말하는 천애랑을 보며 소림방장이 미소를 지었다.
“착한지고. 혹 그 영약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천애랑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화룡단이오.”
소림방장은 잠시 놀라더니 진중한 눈을 했다.
“혹 사천을 거쳐 가려는 겐가?”
정작 화룡단의 위치를 모르는 천애랑은 조언을 구하는 눈길로 하오문주를 쳐다봤다. 하오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에만 있는 양반이 아는 것도 많소. 맞소. 운남 독지대를 가기 위해 천 가주가 사천당가에 들려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소.”
천애랑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곳이 됐든 어떤 것이 장애물이든 화룡단이 있기만 하면 된 것이다.
하오문주의 말에 소림방장이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다행히도 사천당가의 가주와 내 친분이 있어 서신을 써줄 수 있다네. 먼 과거의 인연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도움을 받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네만?”
하오문주는 천애랑에게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운남의 독지대에 가기 위해선 사천당가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소림방장의 서신이 있다면 그 도움을 받기가 훨씬 수월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시선을 받은 천애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준다면 감사히 받겠소. 그리고 대환단과 이번 도움에 대해서 나중에 다시 한 번 방문을 하겠소. 물론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난 뒤가 되겠지만 말이오.”
소림방장은 환히 웃으며 반장을 했다.
“아미타불.”
* * *
사천당가(四川唐家)는 아미파, 청성파와 함께 사천 대표 세력 중 하나였다.
정도 무림 오대세가 중 하나로도 불리며 독과 암기로 유명했다.
정도 세력으로 적을 두고 있지만 다른 정도 문파들과는 껄끄러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이유로는 당가의 주 무공과 무기가 독과 암기라는 점 때문이었다.
정도무림에서 이러한 독과 암기는 비겁하다는 인식이 기본적이었다.
또한 그 품행이 거침없어 타 세력과 많은 갈등이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느 세력도 당가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가풍의 지독함이었다.
은혜는 2배로 갚지만 복수는 10배로 갚는다는 당가의 가풍은 무림에서 매우 유명했다.
심지어 독을 다루는 가문이기에 당가와 척을 지는 곳은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까지 맘 편히 할 수 없는 생활이 펼쳐진다.
그리고 당가는 매우 폐쇄적이어서 시대적 흐름과 다르게 데릴사위도 많았다.
당가엔 내성과 외성이 존재했는데 내성엔 씨족인 당씨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외성엔 데릴사위나 당문에 큰 공을 세워 당씨 성을 받은 이들이 거주했다.
천애랑은 지금 당가 외성에 위치한 정문 앞에 서서 거대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당가(唐家)]
어떠한 미사여구도 없이 매우 굵직한 필체로 담백하게 적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필체의 선에서 무공의 흔적이 느껴졌다. 누군가 섬세한 강기로 단번에 글을 쓴 것 같았다.
‘대단한 고수로군.’
천애랑은 짧은 감탄을 마무리로 정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가만히 천애랑을 지켜보던 문지기 둘이 손을 뻗으며 앞을 막았다.
문지기들은 암기들의 수납을 위한 여러 주머니가 달린 복장과 함께 이것들을 가릴 용도의 피풍의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무림인들처럼 장검을 착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주 무기가 암기이기 때문일 터였다.
“멈춰라!”
문지기의 말에 천애랑은 순순히 멈추었다.
소림사처럼 당가에 화룡단이 있으면 모를까 화룡단의 위치는 다른 곳에 있다고 했다.
당가는 그곳으로 가고 화룡단을 얻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기에 도움을 받고자 온 것이었다.
문지기의 말이 다소 짧고 거칠다 한들 딱히 예민하게 반응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로 당가에 접근하는가.”
날 선 문지기의 말에 천애랑은 품에서 서신을 살짝 보이며 대답했다.
“당가주를 만나러 왔다. 이 서신은 소림방장의 것이다.”
천애랑의 입에서 두 거물이 거론되자 문지기들은 이 사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시선을 오가며 잠시 고민했다.
문지기가 말했다.
“그 서신을 주고 기다려라. 우리가 보고를 올리겠다.”
문지기들은 조금은 오기를 피웠다.
소림방장과 가주의 이름이 거론된 이상 속히 보고하고 안내를 하는 것이 맞으나 젊은 놈이 당가 앞에서 오만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애랑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불가(不可). 내가 직접 만나서 줄 것이다.”
천애랑의 대답에 문지기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간 당가를 방문한 어느 누구도 감히 당가의 방침을 단칼에 거부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이 다소 부당하다고 할지언정 설득하려고 하지 저렇게 행동하진 않았었다.
문지기들은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감히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딴 행동을 취하는 것이냐?!”
열을 내는 문지기들을 보며 천애랑은 크게 호통쳤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기에 내 앞을 막는 것이냐? 문지기에 불과한 네놈이 감히 소림방장보다 직분이 높은 것이냐? 아니면 네가 당가주라도 되는 것이냐?!”
고래고래 큰소리를 내는 천애랑에 의해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상황을 보며 수군거리는 행인들이 늘어가자 당가의 문지기들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창피함보다 모욕감을 더욱 크게 느끼는 중이었다. 살면서 누군가가 당가인 자신들 앞에서 이리 크게 소리치는 것을 상상해본 적도 경험해본 적도 없었다.
“감히 당가를 욕보이고자 하는 것이냐! 내 대 당가의 일원으로서 네놈을 치도곤 내어 법도를 바로 세우리라!”
문지기는 말과 함께 품 안으로 손을 넣고선 이내 작은 침들을 쏘아냈다.
피피핏!
천애랑은 혈들을 노리고 쏘아진 침들을 가볍게 피하고서 문지기의 명치를 강하게 뻗어 찼다.
쾅!
천애랑의 발길질에 날아간 문지기는 정문에 강하게 부딪히며 쓰러졌다.
쓰러진 문지기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간신히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격통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초식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발길질 한 번에 쓰러진 동료를 보며 남은 문지기가 침을 삼켰다.
천애랑은 주저하는 문지기에게 다가갔다.
움찔.
천애랑의 행동에 문지기가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애랑이 다가간 만큼 뒤로 물러난 문지기는 정문에 등이 부딪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천애랑은 그런 문지기를 보며 낮게 말했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소림방장의 서신을 가지고 당가주를 만나러 왔으니 문을 열고 안내를 해라. 그렇다면 그대들의 무례를 없던 것으로 할 것이다.”
문지기는 천애랑에게서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절대적 명령처럼 느껴져 두려움과 함께 삐걱대듯 고개를 끄덕이곤 정문을 열었다.
천애랑은 열린 정문 사이로 다수의 무인들을 보았다. 정문의 소란을 느끼고 모인 것 같았는데 꽤나 기민한 행동들이었다.
‘다소 거만한 이들인 것 같긴 한데 훈련이 잘 돼있다.’
우르르 몰려온 이들에게서 일반적인 무인들과 암살자 사이의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문지기와 달리 검을 차고 있었지만 피풍의를 입은 것을 보니 마찬가지로 암기들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천애랑은 천천히 앞장서는 문지기의 뒤를 따라 정문에 발을 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팔방에서 살기를 느꼈다. 살기가 끈적하게 몸을 짓눌렀다.
‘…….’
아마 위압감을 주고자 하는 행동들인 것 같은데 가소로웠다.
천애랑은 걸음을 멈춘 문지기를 재촉했다.
“왜 걸음을 멈추는 거지?”
천애랑의 덤덤한 말을 들은 문지기는 간신히 침을 삼켰다.
자신은 외당의 무인들이 선별적으로 쏘아대는 살기의 여파에도 죽을 맛이었는데, 이 엄청난 살기를 직접적으로 받는 이가 저리 덤덤하니 놀라움과 걱정이 생겼다.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건든 것 같았다.
그때 정문으로 젊은 남녀가 걸어 들어왔다. 이 남녀를 알아본 외당의 무인들이 모든 행동을 멈추고 눈이 보이지 않도록 깊게 고개를 숙였다.
“소가주님과 아가씨를 뵙습니다!”
천애랑은 갑자기 사라진 살기와 크게 인사하는 당가 무인들의 행태를 보며 이들이 인사하는 남녀를 뒤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