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60화
천애랑의 시선이 소림방장의 팔에서 찬호로 향했다.
마기의 영향인지 찬호의 흰자위가 모두 검게 물들어 있었다.
찬호는 천애랑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소림방장에게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찬호의 검 끝에서 이 밤보다 더 어두운 흑색의 강기가 뻗어 나왔다.
“아미타불.”
소림방장은 마보자세를 취한 후 남은 오른팔을 강하게 내질렀다.
백보신권.
소림의 72절예 무공 중 하나로 백보의 거리를 격하고 공격할 수 있다는 권법이었다.
강대한 내공을 방출할 수 있는 강인한 신체의 근육과 내공의 운용이 필요한 최상승의 권법이었다.
세간에서 소림사 고수를 생각할 때 많이 떠올리는 무공 중 하나이기도 했다.
마치 거대한 주먹처럼 쏘아진 백보신권의 기운이 찬호의 흑색 강기와 부딪혔다.
콰아앙!
강대한 기운들의 충돌로 두 사람의 신형이 밀려났다. 그 틈에 지휘웅이 뛰어들었다.
“합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소교주 말처럼 빨리 끝냅세.”
화르륵!
소림방장을 공격하는 지휘웅의 주먹에서 불꽃이 일었다.
소림방장은 마보자세 그대로 태극처럼 부드럽게 손을 휘저었다.
그의 몸짓에 지휘웅의 강대한 공격이 허무하게 흘려졌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묘리였다.
소림방장이 한 손으로 두 사람의 공격을 잘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애랑의 눈에는 매우 위태해 보였다.
“어디에 한눈을 파는 겐가!”
그때 드라쿠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며 홍혈지를 날렸다.
천애랑은 마주 탄지공을 날려 홍혈지를 상쇄시켰다. 그리고 손톱을 치켜 휘두르는 드라쿠의 공격에 마주 주먹을 내질렀다.
대기의 결에 무지막지한 내기를 담았다.
콰드득!
엄청난 강도의 주먹질에 드라쿠의 긴 손톱이 깨져 비산했다.
드라쿠의 손톱에도 막대한 강기의 기운이 있었지만 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하늘을 밟은 천애랑의 강기와는 질적 차이가 났다.
“크으윽!”
드라쿠가 일시적인 고통에 인상을 쓰고 재차 공격을 했다. 그의 깨진 손톱은 어느새 다시 자라 있었다.
‘채혈에 재생까지…….’
엄청난 이능이었다.
천애랑은 까다로운 드라쿠를 보며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소림방장이 혼신의 힘으로 찬호와 지휘웅의 공격을 막고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소림방장과 모르는 사이였다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수 있겠지만 무려 대환단을 직접 찾아서 준 사람이지 않은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천애랑의 홍채가 순간적으로 흰자위와 같이 희게 변했다.
상단전이 극성으로 개통되고 사고가 빨라졌다.
시공간이 느려지며 주변 공간에 대한 절대적인 감각이 제 몸처럼 느껴졌다.
드라쿠, 소림방장, 찬호, 지휘웅. 이들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후우, 아직은 부담인가.’
천애랑은 과부하가 걸리는 감각을 짓누르며 뇌전의 기운을 끌어왔다. 천애랑의 눈이 금빛으로 변했다.
파지직.
천애랑의 몸에서 전류의 파편이 일었다.
번쩍!
아까의 뇌룡강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각이 천애랑의 전신을 감쌌다.
상단전이 완전히 개통되고 뇌기를 다루는 지금의 시공간에서 천애랑은 신과 같았다.
지금 천애랑의 시간선 앞에선 상대방의 그 어떤 쾌속도 우선하기 어려웠다.
천애랑은 드라쿠의 사혈들을 뇌기를 담아 강하게 때렸다.
막대한 뇌기의 잔상이 마치 용처럼 긴 꼬리를 만들었다.
“커억!”
드라쿠가 공격해온 빠른 속도보다 더 빠르게 튕겨 날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드라쿠의 신형이 뇌전의 파편들과 함께 격하게 꿈틀거렸다.
웬만한 무인들은 즉사할 위력이었지만 무지막지한 체력과 재생력 때문에 드라쿠는 죽음을 버티고 있었다.
천애랑은 곧장 지휘웅에게 이동해 손등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쿠다당!
지휘웅은 팔 장(24m)이나 날아가서야 바닥에 떨어졌다.
천애랑의 움직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즉시 찬호에게 다가가 뇌기를 가득 담은 발경을 내질렀다.
그러나 천애랑의 공격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찬호의 검이 엄청난 속도로 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애랑은 뻗은 손을 급히 거두면서 축지법으로 몸을 회피했다.
찬호의 검은 뻗을 때 만큼이나 빠르게 회수되면서 다시 천애랑을 공격했다.
천애랑은 대지의 결에 내기를 쏘아내 찬호의 지반을 폭파시켰다.
찬호는 무너지는 신체균형에 당황하지 않고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일전에 주원장 병영에서 고 노인에게 했던 것과 유사한 검식이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엄청난 속도에 막대한 마기가 추가됐다는 점이었다.
쒜에에엑------!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찬호의 검이 빠른 속도로 천애랑에게 다가갔다.
천애랑은 손에 뇌전 가득한 수강을 두르고 찬호의 검을 힘껏 쳐냈다.
이화접목과 사량발천근의 수를 사용해 기회를 만들고 싶었지만, 뇌룡의 시간선에서도 엄청난 쾌검을 뽐내는 찬호의 검이 그러할 여유를 죽이고 있었다.
까가강!
검과 손이 부딪힌 공간에서 강렬한 기파가 발생했다.
천애랑은 지체하지 않고 신룡지탄 난사를 쏘아 보냈다. 지근거리에서 쏘는 것이기에 정확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찬호에게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
찬호의 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둘러지며 모든 탄지공을 쳐내었다.
천애랑과 찬호는 격한 공방 후 잠시 숨을 돌리며 서로를 쳐다봤다.
“애랑.”
“찬호.”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른 채 뒷말을 잇지 못했다.
둘 모두 복잡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격하게 흔들리는 뱃머리를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분노, 슬픔, 그리움, 만족감 등 복잡한 감정들에 휘감겼기 때문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형제였던 둘은 지금 처음으로 무공을 겨루었다.
둘은 격하게 공수를 교환하던 순간에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교류를 느꼈었다.
그 교류 속에서 서로의 감정들이 느껴지는 듯해 더욱 마음이 복잡했다.
가장 가까이서 마음을 나누었었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가장 멀리 위치했기에 둘은 다시 기수식을 잡았다.
둘의 감각은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되었다.
그 외 벌어지는 상황들은 여백의 미처럼 서서히 지워져갔다.
새하얀 도화지 위 존재하는 단 두 사람의 움직임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과 발, 검과 형이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일필휘지 붓이 움직였다.
때로는 얇게, 때로는 굵게 도화지 위에 선이 그어졌다. 어지러이 돌기도 하고 담대하게 뻗어가기도 했다.
한참을 뒤엉켜 움직이던 둘의 사이로 단풍잎이 흔들리며 떨어져 내렸다.
둘의 신형이 멈추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둘만 보이는 도화지에는 붉은 단풍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찬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는 천애랑도 마찬가지였다.
“소교주!”
지휘웅이 드라쿠를 들쳐업고 찬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휘웅의 외침에 찬호와 천애랑 둘만의 공간이 꿈결의 나비처럼 사라졌다.
찬호와 천애랑은 급히 눈물을 훔쳤다.
“자네 괜찮은가.”
소림방장이 지휘웅과 찬호를 경계하며 천애랑의 옆으로 다가왔다.
천애랑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상황이 묘했다.
무승들과 향화객들을 공격하고 살육하던 마인들이 도리어 시신이 되어 널려 있었고 남은 마인들은 후퇴하듯 찬호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백여 명이 넘던 마인들은 어느샌가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
천애랑은 곧장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매우 익숙한 기운이 어둠 속에서 다가 왔기 때문이었다.
천애랑이 낮게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지.”
스르륵.
어둠 속에서 잠행복을 입은 유소소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완벽한 극성의 환영유령보보였다.
“반갑다는 표현으로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렇다면…….”
천애랑의 의문에 유소소가 한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천애랑이 그곳을 보자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남은 마교 잔당들을 죽이는 유소호와 특급살수들이 있었다.
유소소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가주님이 걱정되었는데 하오문주가 저흴 보냈습니다.”
천애랑은 유소소의 미소가 지금 순간엔 꽤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때 천애랑에게로 살막의 살수처럼 흑색 잠행복을 입은 청년이 다가왔다. 단번에 누군지 알아챘다.
“직접 오셨소?”
천애랑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씨익 웃으며 축골공을 펼쳤다.
으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청년의 몸이 더욱 커지며 천애랑이 익히 봤던 중년 남성의 하오문주로 돌아왔다.
“천면수라!”
마인들 사이에서 고함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휘웅도 천면수라를 알아보며 거칠게 인상 썼다.
“천면수라? 이 개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우리 앞에 나타났지?!”
천면수라에게 당한 기억이 있는 마인들은 이를 갈며 하오문주를 노려봤다.
천면수라가 변장했던 마교 장로의 천마보고와 기밀누출 사건 때문에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은 이들이 이곳 마인들 사이에서도 제법 있었다.
하오문주는 그런 마인들에게 이를 다 드러내고 웃었다.
“아이고~ 반갑수다. 그때 살아남은 이들이 많았나 보네? 덕분에 난 배따시게 잘 지냈는데?”
하오문주의 능글맞은 말에 마인들의 욕설과 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천애랑은 하오문주의 말투를 보며 송소걸이 떠올랐다.
하오문주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어떤 호로 새끼가 내 딸에게 독을 썼냐? 소교주 너냐?”
찬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 개새끼가 감히 어디라고 주둥이를 나불대?!”
지휘웅이 어깨에 들쳐 멘 드라쿠를 대충 마인들 사이에 던지고는 내기를 끌어올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러나 그런 지휘웅을 찬호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찬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살폈다.
정면에 대립한 천애랑과 소림방장, 그리고 하오문주와 살막주, 다수의 살수들, 태세를 정비하는 소림의 무승들. 저 중 화경 이상 경지인 자들만 셋이었다.
자신들 또한 화경이상의 경지가 셋이지만 드라쿠가 전투불능인 상태였다.
아래 무인들의 수와 수준이 밀리진 않지만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소림의 봉문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한들 큰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그나마 남은 이득은 소림방장의 한 팔 정도이려나.
찬호는 천애랑을 봤다. 모든 변수의 중심엔 천애랑이 있었다.
찬호가 무심하게 말했다.
“물러난다.”
“소교주.”
지휘웅이 후퇴라는 명에 아쉬운 듯 찬호를 불렀다.
“우호법.”
찬호의 단호한 말에 지휘웅이 혀를 찼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네. 쯧.”
그리고 명을 내렸다.
“모두 물러난다!”
“존명!”
마인들은 상관의 명에 어떠한 의구심도 없이 즉시 후퇴를 위한 방진을 형성했다.
“소림방장! 한 쪽 팔은 잘 갖고 계셔. 이번엔 기회가 없었지만 다음엔 내가 남은 팔을 친히 뽑아 줄 테니까. 그리고 기공가 네놈도 다음에 두고 보자.”
“아미타불.”
지휘웅의 말에 소림방장은 염불을 외며 반장을 했다.
마교도들이 일사불란하게 물러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더 큰 피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물러나는 마교처럼 소림 또한 더 이상의 피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장의 복수를 꿈꿀 순 있으나 소림방장의 부상과 지금의 저들을 상대할만한 절대고수들은 모두 외인이라는 점 때문에 소림의 선택권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찬호는 물러나면서 뒤돌아 천애랑을 쳐다봤다. 천애랑 또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찬호를 쳐다봤다.
둘의 눈동자엔 찢겨진 붉은 단풍잎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