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58화
불안정한 황권 속에서 황실은 여전히 사치향락으로 물들어 갔고 쟁투는 더욱 심해졌다.
치안은 무너지고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황실 안팎으로 성행했다.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는 세상. 각자의 이익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그렇게 큰 도시부터 작은 고을의 관리들까지 약탈에 약탈을 거듭하며 스스로의 잇속을 더욱 탐하여 갔다.
민생은 도외시 되었고 더욱 어두워졌다. 평범한 백성들에게 삶은 붉은 색이 되었다.
황실과 관리들의 향락과 권위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를 위해서 피땀 어린 농작물과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일상사가 돼버렸다.
심한 경우 건장한 남편이나 젊은 아내, 심지어 어린 자식들마저 빼앗기는 일도 벌어졌다.
분노했다.
백성들의 분노가 커질수록 새로운 하늘을 외치는 홍건적의 세력은 더욱 커져만 갔다.
피는 더욱 흘렀고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홍건적을 은밀히 지원하는 무림맹 또한 바빠졌다.
전국적으로 많아진 전투를 지원함은 물론이고 치안이 무너진 틈을 타 횡행하는 산적들과 수적들, 그리고 사파와 왜군들까지 상대해야 했다.
민생의 안녕을 국가가 아닌 민간 세력들이 담당하니 힘에 부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장강수로채.
장강을 중심으로 거대한 세를 불려가는 수적들의 단체였다.
물과 관련된 무공을 익히고 약탈을 일삼는 이들 때문에 장강 주변의 치안이 말이 아니었다.
장강의 생활권을 공유하는 호북성과 호남성의 정도 무림문파들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바빠졌다.
그러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수적들을 상대하기엔 해당 지역 무림인의 수가 부족했다.
물 위에서 싸워야 함은 물론 무공을 익힌 수적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어쭙잖은 수준의 무림인은 논외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호북 위에 위치한 하남의 소림사까지 장강수로채 소탕에 대한 구원요청이 가게 되었고, 이에 응한 대규모의 무승(武僧)들이 소림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 먹물처럼 짙게 물든 소실봉 숲 소림사의 밤. 어두움과 하나가 된 인영이 은밀하게 스며들었다.
* * *
환영유령보보(幻影幽靈步步).
총 72가지의 보법으로 이루어진 살막 최고의 은신법이다.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 각 24개의 발자국으로 이루어졌으며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극악의 내공운용과 움직임이 필요했다.
중반부까지는 살막의 모든 살수들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했으며 그 정도만 되어도 절정 고수의 기감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후반부까지 익힌다면 초절정 이상의 경지도 속일 수 있었다.
극성으로 익히면 별다른 보법을 밟지 않고도 완벽한 은신을 가능케 했고, 이 경지는 현 살막에선 막주, 부막주와 특급살수 5명 정도만 가능한 경지였다.
물론 은신술의 경지와 무공의 경지를 동일 수준으로 보기엔 무리는 있겠지만 살막의 이들은 은신술 한해선 무림에서 최고수준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살막은 막주인 유소소와 부막주인 유소호를 제외하곤 특급, 상급, 중급, 일반으로 살수들의 등급을 나눈다.
대개 후반부를 익히는 이들을 상급, 후반부의 끝을 본 이들을 특급으로 분류했다.
유소소는 천애랑에게 환영유령보보를 가르치면서 후반부까지 익히는데 최소 일 년의 시간을 예상했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소림사에 은밀히 침투해야 하는 극악의 목표 난이도와 화경 이상의 무위를 가진 천애랑이기에 말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을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첫 일주일간 십 수번의 시범과 내공운용을 살피더니 곧장 따라하고, 스스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더니 일주일 만에 중반부를 넘어섰다.
그리고 배움 한 달째가 됐을 땐 완벽히 후반부를 펼쳤고 지금은 일시적으로 극성의 환영유령보보를 펼칠 정도였다.
초승달이 어둡게 물든 밤 완전한 쌍고검을 휘두르던 유소소는 소림사로 향한 천애랑이 무사하길 작게 기도했다.
그녀의 주위로 오색찬란한 검기가 운무(雲霧)처럼 흩날렸다.
* * *
소림사는 숭산 소실봉(少室峰) 숲속(林)에 위치해서 소림사(少林寺)라고 불렸다.
당연 소림사에 나무들이 많았는데 천애랑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이용해서 혹시 모를 은신술의 부족함을 보완하며 나아갔다.
최종 목적지는 탑림.
소림사 가장 안쪽 숲에 고승들의 사리를 모아둔 탑들의 숲이었다.
그 수백의 탑들 속에 대환단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이동 중이었다.
환영유령보보의 효과가 확실한지 경계를 서는 무승들은 물론이고 예민한 쥐들마저 그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은 허탈할 정도로 무난하게 탑림에 도착한 천애랑은 즉시 문제점에 직면했다.
‘탑이 너무 많은데…….’
천애랑의 눈앞으로 탑 수백 개가 펼쳐져있었다.
탑림(塔林)이라고 했을 때 조금은 짐작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탑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저 수백 개의 탑들 중 대환단의 위치를 찾는 것이 관건으로 보였다.
‘그래도 해야지.’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천애랑은 곧바로 탑림 수색을 시작했다.
다양한 크기의 사리탑에서 신기한 구슬들이 나왔다. 하지만 대환단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젠장.’
천애랑이 인상을 썼다.
200개는 살핀 것 같은데 확인 안 한 사리탑이 아직도 까마득히 남아있었다.
마음은 급한데 쉽게 일이 풀리지 않자 짜증이 올라왔다.
‘침착하자.’
천애랑은 심호흡을 하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뭐가 됐든 대환단이 이곳에 확실히 있기만 하면 된다.
잠시 몸의 긴장을 풀던 천애랑은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놀라며 재빨리 축지법과 환영유령보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천애랑이 피한 자리에 키가 작은 노승이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그리고 노승은 천애랑이 감쪽같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허.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
천애랑은 노승이 하는 양을 관찰했다.
은신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내공이 만만치 않으니 탑을 수색할 땐 풀고 있긴 했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기감은 넓게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노인이 지척까지 와서야 알아챘다.’
누군지는 모르나 소림의 인물일 것이며 매우 고강한 실력을 가진 것이 확실했다.
노승은 갸웃하다가 점차 또렷하게 천애랑의 위치를 쳐다보았다.
천애랑은 노승이 자신의 은신술을 파훼했음을 느끼는 즉시 노승에게로 몸을 날렸다.
목격자가 생기면 피곤해질 것이기에 제압하고자 손을 뻗었다.
쉬이익---!
환영유령보보의 은밀함과 함께 뱀처럼 휘어지며 들어가는 금나수가 노승에게 닿았다.
바위를 부술 악력으로 노승을 잡아 당겼다.
“……!?”
그러나 노승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여전히 뒷짐을 진 상태로 허허롭게 웃고 있었다.
오히려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시주는 뉘신가?”
천애랑은 대답하지 않고 발경을 날렸다.
쿠웅!
천애랑은 여전히 그대로 있는 노승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발경을 날렸으나 오히려 반탄력에 의해 손이 얼얼했다.
“허어…… 오랜만에 느끼는 통증이로구만.”
노승은 무슨 벌레가 물었냐는 듯이 덤덤히 말했다.
천애랑은 노승의 지근거리에서 탄지공을 날렸다.
신룡지탄. 회룡(回龍).
극도의 내공 압축과 회전력을 가미한 공격이었다.
까앙!
노승의 몸은 도대체 어떻게 돼있는 것인지 철갑주도 그대로 으스러뜨리고 뚫어버릴 위력의 탄지공을 튕겨내었다.
천애랑은 연이어 통하지 않는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내공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드드드드득!
천애랑과 노승의 주위일대가 진동을 했다.
신룡군림보.
일전 주원장을 만날 때 펼쳤던 무공으로써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공간의 압력을 높여 일대를 장악했다.
압(壓).
천애랑이 노승에게 양 손바닥을 펼치자 주위를 짓누르던 압력이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흐읍!”
처음으로 노승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노승은 짧은 호흡과 함께 눈을 감고 합장을 했다.
쿠구구구!
카드드드드득!
보통의 사람이라면 압사할 내공의 공간에서 노승은 다소 평온하게 공격을 견디고 있었다.
천애랑은 혀를 차며 노승과의 거리를 벌렸다.
신룡군림보는 공격력은 좋으나 내공소모가 극심해서 탈진되는 듯한 내공의 허탈감을 느끼게 했다.
노승의 방어력은 천애랑이 처음 경험하는 천외의 영역이었다.
가장 공격력이 높은 뇌기(雷氣)를 써야하나 고민할 때 노승이 감았던 눈을 떴다.
“후우…. 역근경으로 금강불괴를 얻은 후 처음 느끼는 충격 여파일세. 시주는 참 대단하구만.”
노승은 잘게 떨리는 전신의 근육들에 놀라며 천애랑을 보았다.
역근경(易筋經).
달마대사가 남겼다는 전설적인 심법이다.
단순히 내공만 쌓는 것이 아닌 무공에 적합한 신체로 개조시킬 수 있는 효능이 있어 무림에서 최고의 심법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역근경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극성으로 익히면 드물게 금강불괴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천애랑은 순식간에 차오르는 내공을 느끼며 노승을 살폈다.
제압은커녕 저 금강불괴인지 뭔지 때문에 쉽게 결착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진 최대한 소음을 줄일 수 있는 공격들만 했지만 저 노승을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선 필시 큰 소란이 뒤따를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우면 아마 소림사에서의 작전은 미궁으로 빠질 것이었다.
그래서 천애랑은 대화를 시도했다.
“노승은 누구요?”
천애랑이 퉁명스레 말을 하자 노승이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벙어리는 아니었구만? 본 승은 과분하게도 소림의 방장을 맞고 있는 오각대사라고 한다네. 그러는 시주는 뉘신가?”
천애랑은 눈앞의 노승이 소림방장이라는 것에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러나 노승의 무위를 떠올리며 이내 수긍을 했다.
“천애랑이라 하오.”
노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 여유로운 미소로 말했다.
“그래. 천 시주께선 무슨 번뇌가 있기에 이곳까지 오셨는가?”
천애랑은 소림방장이 참 신기한 노인이라 생각했다.
어찌 보면 지금 자신은 불법침입자이자 소림방장을 다짜고짜 공격한 불한당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저리 별다른 감정동요 없이 여유로울 수 있는지 의아했다.
질문에서도 질타는 일절 없고 걱정과 현묘함이 가득했다.
천애랑은 소림방장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을 할지 고민을 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거짓을 말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의동생이 생사를 오가고 있소.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선 소림사의 대환단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이곳에 왔소.”
“허어…… 의협이로다. 아미타불.”
소림방장이 천애랑을 향해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천 시주는 날 따라오게나.”
방장의 예측불가한 말과 행동에 천애랑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여러 상황 가능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방장의 등이 점점 멀어지기에 천애랑은 그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
방장은 잠시 두리번거리면서 사리탑들을 살피더니 매우 평범해 보이는 사리탑으로 갔다.
그리고 사리탑의 중앙부를 열고는 작은 함을 하나 꺼냈다. 그는 이를 천애랑에게 건넸다.
‘설마 대환단?’
천애랑은 방장이 탑에서 꺼내 건네준 함을 얼결에 받아 살짝 열어봤다.
이곳 소림사의 숲처럼 청량한 향이 정신을 맑게 했다.
천애랑은 다급히 함을 닫고 놀란 눈으로 방장을 쳐다봤다.
“이걸 왜 저에게…?”
방장은 뒷짐을 지고 그저 허허롭게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그 약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살려야지.”
천애랑은 복잡한 눈으로 대환단이 든 작은 함을 꼭 쥐며 쳐다봤다.
소걸의 치료에 한걸음 나아간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소림방장을 혼란스런 눈빛으로 봤다.
“소림의 보물이지 않소? 이렇게 누군지도 모르는 외인에게, 특히나 탑림을 훼손하고 그대를 공격한 나 같은 놈에게 선뜻 줘도 되는 것이오?”
소림방장은 따뜻한 눈빛으로 천애랑을 보며 답했다.
“착한지고.”
“그게 무슨…….”
천애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모습에 소림방장이 허허롭게 미소 지었다.
“아미타불.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내 면벽동에서 불현듯 시절인연이란 화두에 막혔더니 옛 선배들의 따뜻한 조언들이 떠오르더란 말이지. 그래서 옛 선배들의 향취도 느끼며 머리도 식힐 겸 이곳 탑림에 온 것이라네.”
소림방장이 탑림을 둘러보곤 다시금 천애랑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때마침 자네를 만났지 뭔가? 머릿속에 천둥이 내리쳤네. 모든 것엔 인과가 있는 법이지. 내가 갑자기 뜬금없는 화두를 맞닥뜨린 것, 이곳에 온 것, 자네를 만난 것, 자네가 대환단이 필요한 것, 대환단이 있는 위치는 소림에서도 두 사람을 제외하곤 나만 알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인연과 인과처럼 이어지지 않는가?”
“…….”
천애랑은 이해하기 어려운 소림방장의 깊은 마음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소림방장은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대환단이 소림의 귀물이라고 하여도 생명보다 귀하겠는가. 물론 아무렇게나 쓰일 순 없는 노릇이네만 자네라면 좋은 인연과 인과로써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네.”
폭우가 내리치는 천애랑의 차가운 가슴에 작은 햇살이 비추었다.
천애랑은 소림이 무림의 기둥인 이유가 무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천애랑은 물끄러미 대환단의 함과 소림방장을 보곤 다소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
“내 절실한 마음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소. 그러나 다시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 말하고 싶소.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겠소. 대신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소. 내 개인적인 일이 끝난다면 반드시 소림에 은혜를 갚겠소.”
“허허, 시절인연이로다.”
천애랑의 말에 소림방장이 흡족한 듯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러나 소림방장의 표정이 돌연 심각하게 변했다.
이는 천애랑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멀리서 강대한 마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허어…… 어찌 집객당 쪽에서 마기가? 그리고 이렇게 농후한 마기들이라니? 천마와 장로들이라도 온 것인가.”
“찬호…… 그리고 드라쿠?”
천애랑은 멀찍이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들에 표정을 굳혔다. 다양한 기운들과 거대한 마기 셋이 느껴졌다.
파앗!
천애랑과 소림방장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즉시 최고 속도의 경신술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