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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57화 (57/200)

기공술사 57화

유소호의 굳건했던 자세가 휘청이듯 흐트러졌다. 그리고 살막문주에게 속삭였다.

“누님…… 이건……?”

유소소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탁자 위의 검을 바라보았다.

천애랑이 말했다.

“쌍고검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살막문주 그대가 이 검을 찾고 있다지?”

“어디서 얻었습니까?”

살막문주 유소소가 최대한 감정의 동요를 죽이며 물었다.

“알 것 없다.”

천애랑의 단호한 말에 유소호가 불쾌함을 표하는 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천애랑이 비웃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하오문주의 의견에 따라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솔직한 말로 그대들이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지. 무엇보다 쓸데없는 걸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진 않군.”

천애랑은 가면 틈으로 보이는 유소소의 눈을 직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우선 나는 살려야 하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 그러기 위해선 소림사에 위치한 대환단이 필요하고 하오문주의 의견은 그대들에게 은신술을 배워 훔치라는 것이었다. 그대들에게 그럴 능력이 있나?”

가감 없이 말하는 천애랑을 보며 유소소가 침음을 흘렸다.

이런 협상의 자리라는 것은 서로의 정보를 최대한 감추면서 서로의 패에 대한 수 싸움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 자리에 있는 유소소 또한 당연히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달콤한 미끼를 확실히 내밀면서 본인의 패를 저리 다 펼치니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심지어 그 내용은 너무나 터무니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꽤나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는군요. 가주님은 정녕 소림사 내부에 있는 대환단을 우리에게 배울 은신술로 훔치겠다고 하는 겁니까?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당신에게 은신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소소의 말에 천애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천애랑의 몸에서 은은하나 강대한 기운이 삽시간에 뿜어져 나와 작은 건물 내부를 가득 채웠다.

유소소와 유소호는 순식간에 자신들을 옥죄여 오는 기운에 작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대들의 은신술이 없다 하더라도 대환단은 힘으로라도 얻을 것이야.”

“하! 미친놈이로군.”

유소호가 어이없는 비웃음을 내비치자 천애랑의 표정이 사늘하게 변하며 주변의 기운들이 요동쳤다.

그그그극.

강렬한 기의 파동과 함께 유소소와 유소호의 팔방으로 기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하오문주는 보았다. 살막 남매들 주위로 손가락 크기만 한 십수 개의 기의 회오리가 생겨나더니 화살촉처럼 점차 뾰족하게 변하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 담긴 기운의 강도는 최소 강기에 준한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 저 기의 화살촉이 쏘아진다면 살막 남매는 피할 겨를도 없이 큰 낭패를 볼 것이 확실했다.

이를 느낀 건 유소소와 유소호도 마찬가지였다.

“가주님. 기를 거두고 대화로 하시지요. 제 동생의 무례는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유소소가 차분하고 절제된 자태로 천애랑에게 사과를 했다.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등엔 식은땀이 흐르는 중이었다.

유소호 또한 놀란 마음에 땀을 흘리며 박동치는 심장을 다스렸다.

살수로서 모든 상황에 대해 심장박동까지 부동심을 훈련받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일전에 누나가 말했던 화경 고수의 실체를 보니 일전에 마교 소교주를 잡겠다고 했을 때 말렸던 누나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천애랑은 기운의 일부를 거두었지만 언제든 살막 남매들을 옥죄일 정도의 기운들은 남겨 놓았다. 그리고 말을 했다.

“지금의 나에게 불가(不可)라는 대답과 방법은 필요가 없다. 현재 내 동생의 치료에 필요한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구할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생각이다. 다만 이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부숴서라도 지나갈 것이다.”

천애랑의 답에 하오문주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미 대화를 나눠서 파악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말로써 다시금 그 의지를 듣는 것은 달랐다.

자신의 딸을 위해서 황제의 목이라도 따다 준다던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확실하게 깨달았다.

유소소가 다소 걷혀진 기운 속에서 조심히 호흡을 조절하며 공손히 말을 했다.

“잘 알겠습니다. 가주님께서 솔직하게 말해주셨고 솔직한 대답을 원하시니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저희의 은신술에 대한 능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유소소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천애랑은 분명 살막문주가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이고 기감으로 느끼고 있음에도 점점 인지의 영역에서 사라져 가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펼쳐둔 내공의 기감 속에서도 살막문주의 존재가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종래엔 살막문주의 존재가 전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 살막문주의 모습이 돌아오며 기존의 자리에 처음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대답이 됐을는지요.”

“놀랍군.”

천애랑은 유소소의 말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은신술이라는 것에 대해 갖고 있던 작은 불신과 편견이 확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모든 은신술이 이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었다.

아마 살막문주의 은신술이기에 가능한 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오문주가 살막을 콕 집어서 은신술을 배우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천애랑이 하오문주와 눈을 마주치자 하오문주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나니 그대들의 은신술에 신뢰가 가는군.”

당당하고 솔직한 천애랑의 표현에 유소소는 가면 속에서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간 음지에서 숨어 지내느라 딱히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을 기회는 없었다.

그럴 것이 자신들을 만난 이들은 모두 암살의 결과로써 주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단 한 번, 패악을 일삼는 마교의 인물을 암살하려 하다가 역으로 수하가 죽은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마교가 살막의 존재를 눈치챘고 추적해 왔었다.

그 과정에서 죽인 마교인과 죽은 수하들의 숫자가 10명이 넘었었다.

그러한 복수의 반복 속에서 마교는 살막의 실력을 인정하고 최근의 영입제안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유소소는 마교에게 받는 인정은 달갑지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패악을 일삼고 수하들을 피 흘리게 한 적에 불과했다.

여하튼 그러한 이유들로 살막은 마교의 끈질긴 영입제안과 추적을 하염없이 피하는 중이었다.

그런 최근의 시간들 속에서 그 유명한 기공가의 가주이자 광산전투의 주인공인 천애랑에게 순수한 칭찬을 들으니 유소소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때 천애랑이 말했다.

“원하는 것이 있나?”

유소소가 이내 신색을 정비하며 말을 했다.

“당연히 탁자 위의 검, 그리고 기공가의 내공심법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유소소는 만약 이렇게 거래가 된다면 자신들이 유리한 거래라고 생각했다.

환영유령보보(幻影幽靈步步)가 살막이 가진 최상의 은신술인 것은 맞으나 그간 가문의 한으로 남았던 쌍고검의 완성과 살수들에게 항시 부족함으로 남았던 최상의 내공심법을 얻을 수 있다면 절대적으로 남는 거래라는 계산이었다.

“그러지. 단, 조건이 있다.”

“말 하시지요.”

유소소는 역시나라고 생각을 했다.

무공은 나뭇가지라면 내공은 그 나뭇가지들을 뻗게 하는 몸통과 같기에 그 가치가 상이하다 볼 수 있었다.

유소소는 과연 천애랑이 어떤 조건을 낼지 차분히 기다렸다.

어지간한 조건이라면 수용할 의사가 있었다. 그만큼 지금 눈앞의 쌍고검과 기공가의 내공심법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천애랑이 덤덤하게 말을 했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그렇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주고 마교로부터도 지켜주지.”

유소소의 신형이 움찔거렸다. 조용히 듣던 유소호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검에 손을 올렸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유소소는 일렁이는 주변 기운들의 변화를 느끼며 다급히 동생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리고 천애랑의 담담하지만 서늘한 표정을 살폈다.

다소 잘못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단순히 거래조건이라기엔 문파와 개인의 존폐여부를 뒤흔드는 문제였다.

아무래도 곰을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난 느낌이었다.

곰은 내 식구를 죽인 놈이고 호랑이는 평소 절실하게 찾던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맹수의 아가리를 가진 것들이기에 어디로 가든 자유를 빼앗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문제는 이 둘에게서 도망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지금은 호랑이 굴에 갇혀 호랑이가 입구를 막고 있는 격.

유소소는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

천애랑의 분위기를 보니 거절할 경우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가진 패를 솔직하게 공개할 때부터 찝찝했었다.

유소소의 고민이 길어질 때 천애랑이 말했다.

“특별히 그대들의 자유를 뺏을 생각은 없다. 다만 가문의 규율상 기공가의 내공심법을 배운 이들은 가문에 속한 자들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속해야 한다. 이는 절대적이기에 협상의 여지는 없다.”

천애랑의 말에 유소소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천애랑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동생을 살리고 난 후 나는 마교를 멸할 생각이다.”

“……진심입니까?”

오늘 여러 번 놀라는 유소소였다.

천애랑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유소소는 장고를 했다.

괜스레 이런 자리를 만든 하오문주를 원망스럽게 쳐다봤으나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하오문주도 놀라는 눈치였다.

미끼가 너무나도 달콤해 넘어간 자신들의 패착이었다. 기공가의 가주를 만남에 있어서 준비가 미흡했던 것이 쓰게 느껴졌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딱히 나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의 삶과 크게 달라질 필요가 없다는 것과 같았다.

다만 기공가에 충성맹세를 하고 소속되어야 한다는 점인데 음지에서 살았던 자신들이 양지로 올라서는데 꽤나 괜찮은 선택지로 보였다.

아니, 마교와 양패구상을 이루어 멸문했다고 알려지고 세간의 존경을 받는 기공가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로 보였다.

한 번 긍정적인 사고회로가 열리자 도화선에 불이 붙은 듯 긍정적인 생각들이 빠르게 이어졌다.

유소소는 하오문주를 보았다. 이 자리를 주선한 것도 그렇고 기공가 가주의 의견들을 모두 묵인하는 것을 보니 이미 기공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기공가주의 태도를 보아하니 마교를 멸함에 있어 분명 세력을 이루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애랑의 무지막지한 무력, 최고 정보단체의 수장인 하오문주의 호의적인 태도, 산동의 유력가문과의 밀접한 관계, 심지어 개방의 소방주가 기공가의 가주에게 목숨을 구함 받아 매우 호의적이라는 정보도 있었다.

당장 보이고 떠오르는 주변 인물들만 해도 평생 동안 만나기도 힘든 거물들이었다.

기공가 가주 천애랑은 거물들을 끌어당기는 영웅이었다. 분명 당금의 무림에 큰 획을 그을 인물임이 분명했다.

‘만약, 그런 기공가 가문의 부흥에 공신이 된다면?’

유소소는 수많은 계산속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나쁘지 않다.’

유소소는 가면을 쓰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고민하는 표정들이 민망하게 보였을 것 같았다.

유소소는 정리한 생각들을 동생 유소호에게 전음으로 보냈다.

갑작스런 전음에 유소호가 움찔했으나 이어지는 설명들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끝난 후에 유소호는 진중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누나이자 문주인 유소소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유소소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애랑에게 공손히 대답을 했다.

“가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유소소의 대답에 천애랑은 여전히 덤덤했고 오히려 하오문주가 표정관리를 실패하고 크게 놀라했다.

“허, 허허…….”

하오문주의 작은 감탄사를 뒤로하고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천애랑은 말과 함께 주변에 남은 기운들을 모두 해소시켰다.

유소소와 유소호는 한결 가벼워진 운신에 호흡을 다듬으며 자리에 일어나 공손하게 자세를 취했다.

“살막문주 유소소가 문파와 문도들을 대표하여 기공가의 가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천애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유소소와 유소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대들의 충성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겠다. 내 사람에 대해선 절대 먼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기공가는 너희의 집이자 보호막이 될 것이다. 기공가의 사람인 너희를 핍박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곧 기공가를 핍박함과 같으니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설혹 그 상대가 천마나 황제가 되더라도 두려워 말라. 그대들이 원한다면 나의 앞길에 귀히 쓸 것이다.”

유소소와 유소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천애랑의 말만 들어도 그동안 고민하고 답답해했던 모든 것들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말에는 무게가 있어 의심 따윈 자리하지 못하는 확실성이 느껴졌다.

이 자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생길 지경이었다.

곁에 있던 하오문주는 기대이상의 결과와 광경에 그저 감탄사만 뱉었다.

흑도의 작은 밤, 백두산의 호랑이가 은밀한 발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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