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56화
매향의 대답이 있기 전 누군가가 전각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
천애랑의 시선이 향했다.
2층에 있던 기척들이 전각 바깥으로 흩어져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기운의 움직임들을 보니 아마 주변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쯧쯧. 좀 지켜보려 했다가 안타까운 죽음이 생겼군.”
‘노인?’
주름이 많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성이었다. 매향처럼 치마를 입은 것이 아니라 남자 옷 같은 무복을 입었다는 것이 특이점이었다.
“그대가 하오문의 문주인가?”
천애랑의 질문에 노파는 주변을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그러는 그대는 누군가?”
천애랑은 질문을 하는 노파의 눈빛 속에서 답을 원하는 궁금증이 없음을 느꼈다.
그리고 하오문의 수장이 맞을까 하는 의심은 기감을 확장한 후 거두었다.
저 숨겨진 표정과 몸짓 속에서 엄청난 내공의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감춰진 기운만으로도 드라쿠가 떠오를 정도의 내공 양이었다.
“천애랑. 이 옥패 주인의 의형이다. 그대는 이 옥패의 주인을 아는가?”
천애랑이 내민 옥패를 하오문 문주가 천천히 살펴봤다.
“우리 소희의 의형이라… 말괄량이 딸이 꽤나 인연이 좋구나. 그런데 왜 자네가 내 딸의 증패를 가지고 있는 건가?”
‘소희…, 딸이라…….’
천애랑은 혹시나 하는 짐작이 사실로 확인되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의 고위직과 연관이 있는 줄 알았더니 하오문주의 딸일 줄은 몰랐다.
“그럼 당신이 내 의동생의 어머니가 되는 거요?”
천애랑의 말에 노파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한걸음씩 걸어왔다.
매향의 위치까지 온 하오문주는 더 이상 노파가 아니었다.
“……?!”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는데, 눈앞엔 미남의 중년 남성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있었다.
“송소희의 아비 송강일세. 그대는 내 딸과 의형제를 맺은 기공가의 마지막 후손이자 최근 우리와 접선하기 위해서 시끄럽게 군 흑의폭군 천애랑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네. 그런데 말이야. 내 딸과 잘 지내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할 정보인 명패를 들고 자네만 나타났지. 그래서 다소 확인할 것들이 필요했다네.”
하오문주 송강은 천애랑의 반응을 살피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혹 내 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천애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대화를 해도 되는 거요?”
송강은 잠시 시선을 돌려 죽은 하오문도를 보았다.
“쯧.”
안타까움의 혀를 찬 송강은 주변 인물들에게 상황정리 등의 지시를 내렸다.
그리곤 앞장서 3층으로 올라갔다. 송강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가니 미리 준비된 주안상이 있었다.
“손님맞이가 미흡해 멋쩍지마는 편히 앉게.”
송강이 자리에 앉더니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술 따위나 마실 마음은 없소. 지금 이 시간에도 내 소중한 의동생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터.”
천애랑의 말에 송강이 쓰게 웃었다.
“소중한…. 이라. 부모의 입장에서 먼저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자네의 마음 잘 알겠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어찌 된 일인가?”
천애랑은 송강에게 송소걸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했다.
“딸이 위기인데 딱히 표정의 변화가 없군?”
천애랑은 무표정 일관인 송강을 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동일했다. 자신의 딸이 미증유의 산공독에 의해 죽을 위기에 있다는 내용을 들었을 때조차 말이다.
송강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심히 분노를 하고 있다네. 표정관리는 그간 살아온 병적인 습관인지라 나조차도 솔직해지기 쉽지 않다네. 감정이 격해질수록 더욱 표정관리가 심해지더군.”
송강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자넨 단순히 의동생의 부상을 알리고자 이곳에 온 것은 아닐 테고 나나 하오문에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천애랑은 가볍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만병통치약. 이름 따윈 상관없소. 현재로써 소걸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판단되지. 그에 필요한 재료는 대환단, 빙백단, 화룡단이오. 즉, 이 셋을 구할 수 있는 방법과 현재 산동 담가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소걸이를 위한 각종 영약들이 필요하오.”
“허어.”
송강이 짧은 감탄사와 함께 장고에 빠졌다.
천애랑은 한식경(30분)이 지나도록 생각에 잠긴 송강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송강이 입이 열렸다.
“흐음…… 대환단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나머지 빙백단과 화룡단은 매우 어렵겠군. 그리고 그간 영약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부분은 내 딸을 살리는 일이니 최선을 다하겠네.”
천애랑이 인상을 썼다.
“한데 하오문이 개방과 함께 중원 최대의 정보 집단이라고 들었는데 그 영약들을 구할 방법을 모르는 것이오?”
천애랑의 말에 송강이 피식 웃었다.
“구할 방법이 어렵다고 했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았네. 다만 그 방법의 난이도가 극악해 그것들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일 테고 말이야.”
천애랑은 하오문을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소걸이의 사문인 것 같아 방문한 것도 있지만 그 무엇보다 최고의 정보 집단이라는 부분이 컸었다.
주변 어느 누구도 치료약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할 방법에 대해 답을 내놓지 못했기에 지금은 그 방법과 정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특히나 하오문은 개방처럼 정도에 가까운 방법뿐 아니라 어두운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기에 결과적인 측면에선 개방보다 더 신뢰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편히 말 하시오. 소걸이를 살릴 수 있다면 황제의 목이라도 따다 주지.”
천애랑의 말에 송강이 피식 웃었다.
“내 딸이 대단한 이를 의형으로 두었어. 맨날 강호와 의형제의 낭만에 대해 이야기 하던 아이가 제 어미를 닮아 복이 있었나 보군.”
송강은 누군가를 추억하듯 눈앞에 있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말을 이었다.
“살막, 그곳의 문주를 만나시게. 그리고 그들에게서 은신술을 배우게나.”
천애랑이 갑자기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자 송강이 천애랑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쌍고검. 살막 문주가 가진 검과 짝을 이루는 검인 것 같군. 일전에 살막문주가 그 검의 행방에 대한 정보의뢰 하면서 만난 적이 있다네. 아마 그 검이 있다면 그자를 만날 수 있을 걸세. 다만 그 다음의 일들은 순수 자네의 몫이긴 하네만 가능성이 있을 것이네.”
“가진 생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을 해주시오.”
천애랑은 여전히 하오문주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질문을 더했다.
이에 송강이 말했다.
“살막문주가 다녀간 후 나름의 조사를 했다네. 조사에 제약사항과 한계가 있었지만 아마 그 검은 내공을 잡아먹는 요물임으로 추측하고 있었다네. 맞나?”
천애랑은 송강의 말에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찬호는 애초에 본인의 흑검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따로 검에 대해 평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소걸이가 호기심에 검을 들었다가 왠지 지치는 검이라고 말하며 돌려줬던 기억이 났다.
천애랑 본인 또한 이 검이 몸 안에서 굳어있던 내기를 끌어당겼기에 내공을 회복할 수 있었는데, 그게 소유자의 내공을 잡아먹는 행위였던 건가 싶었다.
“확실친 않지만 그럴 수 있겠다 싶소.”
송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두 가지 추측과 한 가지 사실이 있다네. 첫째로는 그 검이 짝을 이룬다면 소유자의 내공을 잡아먹지 않는 신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살막문주가 찾고자 했던 것. 둘째로는 살막문주가 내공을 잡아먹는 신물인 그 검을 다룰 내공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살막문주가 마교를 피해 도망을 치고 있다는 것.”
송강은 술을 홀짝여 입술을 적시며 계속 말을 했다.
술잔을 가볍게 기울이면서도 시선은 천애랑을 부드럽게 직시하고 있었다.
천애랑은 사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빛을 인상적으로 바라봤다.
작은 단서와 정보들로 거침없는 추리를 하는 하오문주를 보고 있자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빈약한 추측이네만 만약 살막문주가 그와 유사한 고민들을 하고 있고 자네가 그 고민을 다소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네. 은신술을 배우지 못하더라도 만약 그들과 다소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추후 자네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인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말이야.”
천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런데 은신술을 배우라는 의도는 뭐요?”
“자네에 대해 조사를 해본 결과 자네 무공의 위력이야 입 아프니 논할 의미가 없지만 그 결이 너무 강직해. 우선 대환단을 구하기 위해선 정직함보다 비열함과 은밀함이 필요하다네. 물론 고강한 무공수위야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
“대환단? 살막 그들에게 은신술을 배우면 대환단을 구할 수 있는 계책이 있는 것이오?”
천애랑의 고개가 갸웃했다.
“소림사에선 대환단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게 관리를 한다네. 그것은 외부 유출된 대환단도 예외는 아니지. 외부 유출된 대환단은 아마 그 수량도 매우 극소해서 구하기가 장강의 모래알 속 보물찾기일 것이야. 즉 시간이 오래 걸릴 거란 말이지. 그렇다면 대환단이 확실하게 위치한 곳에서 얻으면 될 일 아닌가?”
“그 말인즉슨…?”
송강의 진의를 파악한 천애랑이 눈을 크게 떴다.
송강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대환단이 확실히 있을 소림사에서 훔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니.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무위를 가진 것은 자네뿐이니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송강이 대화를 마무리 하려는 듯 술잔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우선 살막문주와의 만남은 내가 주선을 해보겠네.”
* * *
하남의 성도인 정주(鄭州)의 서쪽으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유명한 도시가 있다.
낙양(洛陽).
고대부터 중원, 특히 삼국시대에서 중요한 도읍지로써 역할을 해온 도시였다. 옛 도읍지답게 많은 물자들과 사람들이 오가며 상권이 발달했다.
특히나 낙양 남쪽 방향으로는 소림사가 있는 숭산(嵩山)이 있어 참배객들이 많이 들려 낙양 도시는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 인산인해의 낙양에서도 사람들이 접근을 기피하는 구획이 있었다.
흑도(黑道).
어두운 길이라는 의미처럼 어두운 하류인생들이 모여 사는 집촌과 같은 곳이었다.
그곳엔 고아와 거지들, 부랑자들, 병자(病者),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일들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흑도에 사는 이들을 사회 악(惡)처럼 여기며 기피했는데 그 이유로는 도둑질과 강도, 심한 경우 납치, 강간 등 사회적 물의를 빚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낙양은 소림사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관과 중소문파들의 자정작용 노력이 있었다.
낙양에서 흑도라는 구획이 생긴 이유는 이런 관과 중소문파들의 의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빈민들과 흑도들을 낙양 외곽의 한 구획으로 몰아넣고 관리를 했다.
태평성대에서도 이런 흑도의 인물들은 존재했는데 지금 같은 환란의 시기엔 이들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없애도 다시 생겨나는 것이 이런 부류들이었기에 소탕보다 관리를 택한 것이었다.
그런 흑도의 깊은 곳. 어두운 밤에 잠식돼 악취와 함께 들쥐와 바퀴벌레만 움직이는 시간. 움막과도 같은 작은 건물에서 네 명의 인물이 회동을 했다.
“천하의 하오문주께서 먼저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꽤나 허무맹랑한 내용을 거론해 제 발걸음을 일으켰으니 그만한 책임감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청색이 가미된 여성용의 어두운 잠행복을 입고 가면을 쓴 살막문주 유소소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앞에 마련된 작은 탁자 위에 팔을 괴고 장난감을 갖고 놀 듯 단도를 손가락으로 굴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 시립한 유소호 또한 유소소와 비슷한 잠행복과 가면을 하고 있었다.
주름진 미소를 짓는 허리 굽은 노인이 말했다.
“크크큭. 도망 다니느라 바쁘신 분들을 어렵게 찾아 불렀는데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 그리고 서로 바쁜 몸들이니 거두절미 하고 대화를 시작함세.”
천애랑은 완벽하게 새로운 노인으로 변한 하오문주를 보며 속으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놀라운 재주였다.
하오문주와 살막문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자 천애랑은 말했다.
“천애랑. 기공가의 현 가주이다. 그리고.”
허리의 검을 뽑아 탁자 위로 올려놨다. 탁자 위의 검이 영롱한 빛을 비추자 살막문주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