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44화
찬호와 송소걸의 가벼운 인사 뒤로 천애랑이 담하웅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담가는 자신의 구함과 치료에 많은 도움을 가문일뿐더러, 자신과 깊은 인연을 맺은 담가 남매의 아비이기에 천애랑의 자세는 더욱 공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애랑이라고 합니다. 큰 신세를 졌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천애랑의 관상에 놀라던 담하웅이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어 그래. 반갑구만. 담하웅일세. 깨어나서 다행이구만. 많은 이들이 자넬 걱정하더군.”
“예, 덕분에 살아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움직여도 되나?”
“괜찮습니다. 천천히 움직일 만은 합니다.”
천애랑이 살며시 팔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에 담하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좁게 떴다.
“그래, 다행이구만. 하도 소연이가 자네 때문에 울기에 어떤 놈인가 싶었네. 만나기만 하면 아주 다리몽둥이….”
“아빠!”
“는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구만. 이렇게 잘 걸어 다니니 말이야.”
천애랑은 피식 웃었다. 이 가문은 남매간의 사이도 좋더니 부녀지간도 사이가 좋아보였다.
“좋은 인연을 맺게 되어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나저나.”
담하웅이 마당에서 하얀 눈들을 밟고 서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추운데 밖에서 청승 떨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세. 소연아 네가 숙부한테 용정차를 얻어서 끓여오너라. 아무래도 나 몰래 숨겨서 마시는 것 같은데, 그 쪼잔한 놈이 지 형님한테는 짜게 굴어도 너한테만은 너그럽잖느냐.”
“또 숙부랑 싸웠죠?”
담소연이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담소연의 물음에 담하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아니다. 다 큰 어른들끼리 싸우기는 무슨. 절대 내가 바둑에서 져서 그런 건 아니다.”
“하아…… 알았어요. 숙부님한테 다녀올게요. 들어가 계세요.”
담소연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소연낭자, 제가 도와드릴 건 없나요?”
옆에서 지켜보던 천애랑이 예의상 물어봤다. 그런 천애랑의 말에 담하웅이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나앙자?”
담소연이 황급히 담하웅과 천애랑 사이에 몸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하하, 제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어요.”
담하웅이 담소연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러자 담소연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빠, 그렇게 쳐다보면 저 무서워요…….”
딸의 처연한 모습을 본 담하웅의 날카로운 기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누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동네바보가 친구 하자고 할 것처럼 급변했다.
“아니다~ 절대 무섭게 쳐다 본 거 아니야~”
담하웅이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숙였던 담소연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담하웅에게 안겼다.
“역시 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숙부한테 금방 다녀올게요.”
“헤~”
입술에 잔뜩 침을 묻히고 하는 담소연의 말에 담하웅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게 웃었다.
담대혁이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 광경을 보고 송소걸이 찬호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찬호 형님, 나중에 저런 여인 만나면 고생합니다. 자고로 여인은 조숙, 현명, 요리입니다.”
송소걸의 귓속말에 찬호도 조용히 대답했다.
-“왜? 귀엽기만 하구만. 그리고 자고로 여인은 얼굴, 가슴, 목소리지.”
송소걸은 뭔 개뼈다귀 같은 말이냐는 듯 찬호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귓속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딴 걸 어디다 써요. 조숙하고 현명하면 마음이 평안하고, 요리를 잘하면 입이 행복하니까 그런 여인이 최고라니까요?”
찬호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처음 보는 여인의 무얼 보고 그걸 판단해? 얼굴 딱 보고! 가슴 딱 보고! 목소리 딱 들으면! 답이 나오지. 네가 말한 거는 천천히 배우고 서로 보완하면 돼.”
송소걸의 눈썹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아니, 이 형님이 두 살 더 먹었다고 유세네. 밥은 형님이 더 먹었을지 몰라도 책은 제가 더 읽었을 거예요. 얼굴 예뻐 봐야 3년, 요리 잘하면 30년, 현명하면 평생 간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요?”
송소걸의 말에 찬호가 피식 웃었다.
-“훗. 그럼 나는 짧고 굵게 살 거니까. 얼굴 예쁘고 요리는 조금 잘하는 여자를 만나면 되겠네.”
송소걸이 가슴을 통통 쳤다.
-“이 형님 큰일 날 사람이네. 얼굴 예뻐 봐야 허영심만 가득해서 안 돼요. 얼마 있지도 않은 돈도 다 써버릴 거라구요.”
찬호가 턱을 치켜들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지금 남은 돈도 많고 또 벌면 돼.”
야명주를 팔고 번 돈을 말함이었다. 이에 송소걸이 비아냥거렸다.
-“땡전 한 푼 없어가지고 의형제가 됐는데도 아득바득 저한테 호위비 받아 간 사람이 누구더라?”
송소걸의 비아냥에도 찬호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형제 사이에도 계산은 정확히 하라고 했다. 난 그 말을 지켰을 뿐이야.”
송소걸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형님, 그거 알아요? 형님 재수 없는 거?”
-“응, 너도.”
송소걸이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동생한테 한 마디를 안 지네! 한 마디를!”
-“그러는 넌 형님한테 아득바득. 그렇게 꼬우면 비무 한번 할래?”
송소걸이 손사레를 쳤다.
-“아아아~ 됐소. 일 없소.”
담대혁은 아버지와 여동생의 행태에서 고개를 돌렸더니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투닥거리는 찬호와 송소걸을 보았다.
담대혁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현재 이곳에서 몸과 마음이 정상인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에휴…….”
“대혁아, 무슨 걱정이 있다고 사내대장부가 한숨이냐! 자, 우리도 방 안으로 들어가세.”
담대혁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담하웅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제일 걱정인데요…….’
* * *
“숙~부~”
“오~ 우리 소연이가 숙부를 다 찾고 어인 일이냐?”
바둑을 복기(復棋)하고 있던 담선웅은 자신을 찾아온 예쁜 조카를 환영했다.
“호호, 또 청승맞게 혼자 바둑을 두고 계셨어요?”
“하하, 욘석아 청승맞은 게 아니라 복기(復棋)라고 하는 거다.”
“복기(復期)요? 바둑 둘 상대가 돌아오기를 기약하는 건가요?”
담선웅은 조카의 모든 것이 그저 귀여운 지 허허롭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 형님하고 뒀던 대국을 다시 둬보면서 되돌아보고, 개선점을 찾아보는 거란다.”
“숙부가 이겼죠?”
담소연의 말에 담선웅이 어깨를 쫙 펴면서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내가 형님한테 수염모양은 져도 바둑은 안 진다.”
담소연이 미간을 귀엽게 찡그렸다.
“그게 뭐예요, 뭔 비교를 해도 수염을 비교를 해요.”
담선웅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연아, 남자란 말이다. 수염에 죽고 수염에 사는 존재란다.”
“…….”
“특히나 중년 남성의 매력인 멋진 수염과 허영심 가득한 하나의 시구(詩句)만 있다면 여자를 잘 후리…… 흠흠.”
담소연은 한숨을 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바보 아빠에, 바보 숙부, 사고뭉치 오라버니가 있는 이 집구석에 정상은 나밖에 없어.’
“그런데 어인 일이냐? 혹시 귀한 손님이라도 온 게냐?”
“어?”
담소연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설마 형님이 나에게 용정차라도 얻어 오라고 한 건 아니겠지?”
담소연은 당장 숙부에게 자신의 결혼운이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바보 천재 숙부…….”
“응?”
담선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에 담소연이 베시시 웃고선 물었다.
“아니에요. 호호. 혹시 예전에 제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 대해 기억하시나요?”
담선웅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우리 가문에서 내 기억력을 따라올 사람은 없다. 그 기공가의 청년?”
담소연은 숙부가 자신이 오래전에 한 말을 기억해주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말이 잘 통할 것 같았다.
“예, 그분이 담 오라버니의 서재에서 치료받은 사람과 동일인인 것은 아시죠?”
담선웅이 눈을 크게 떴다.
“오~ 그랬었나? 이런, 우리 소연이를 구해준 사람인데 안타까운 일을 겪었나 보구만.”
담소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깨어나서 지금 아버지랑 같이 있거든요. 그래서 용정차 좀 얻어 가려구요.”
담선웅은 너그럽게 웃었다.
“그렇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소연이 네가 주라고 하면 내 뭐든지 줄 수 있단다.”
담소연은 환하게 웃으면서 담선웅에게 와락 안겼다.
“역시 담 숙부가 최고예요~.”
“허허, 욘석 다 큰 처자가 뭐하는 게냐?”
담선웅은 말과는 다르게 아까의 담하웅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담소연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숙부에게서 떨어지며 물었다.
“아! 그런데 왜 숙부한테 용정차를 얻어오라고 한 거죠? 가문이나 아버지한테도 용정차 정도는 있지 않아요?”
담선웅이 담하웅을 떠올리며 비웃듯이 말했다.
“형님이 좀 허술하잖냐. 일전에 형님이 어떤 이에게 용정차를 대량으로 싸게 샀다고 나한테 엄청 자랑했었거든. 그런데 형님이 그 차를 마시고는 며칠을 화장실에서 살았었지. 가짜 용정차였던 거야. 결국 그 많은 가짜 용정차를 다 갖다 버렸단다. 뭐 이래저래 현재 가문에서 진짜 용정차는 나만 가지고 있단다.”
담소연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대학사가문의 가주가 사기를 당하다니…….”
담선웅은 그런 담소연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형님이 일상적인 부분은 매우 허술하지만 학문적인 부분이나 가문의 식솔들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란다. 수틀리면 황제고 뭐고 없는 양반이니까. 나는 그러지 못하지. 그러니까 형님이 이 가문의 가주인 것이야. 가문의 모든 이들이 잘 따르는 이유기도 하고. 그리고 인간적이고 좋지 않느냐. 하하.”
담소연은 피식 웃었다.
매번 티격태격 싸워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인정하는 아버지와 숙부를 보면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숙부도 가문 내에서 기억력이 가장 좋은 수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했다. 그 좋은 기억력을 엉뚱한 곳에 잘 써서 항상 문제이긴 했지만.
또한 가끔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추리하고 해결해주는 해결사 역할도 했었다. 마을 사람들도 숙부의 능력을 칭송하면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요청해 오기도 했다.
흐뭇하게 짓던 담소연의 미소가 불현듯 사라졌다. 또 다른 의구심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숙부.”
“응?”
“제가 심양 모용세가에서 선물로 받은 용정차를 아버지한테 드렸는데 그건 어디 간 걸까요? 꽤 넉넉했었는데 말이죠.”
“그거야 형님이 동네 여인들과 담소를 나눈다며 가져갔다가 다 썼… 헙!”
담선웅이 황급히 본인의 입을 막았다.
담소연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빠가 그랬구나~. 곧 친정에서 돌아오는 엄마가 아시면 어쩌실려나~.”
담선웅은 속으로 형님인 담하웅을 애도(哀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