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43화
“소연아 봤지?”
“그러니까요, 호호. 진짜로 오라버니 말대로 말할지는 몰랐네요.”
“형님! 도대체…….”
“애랑, 이리로 와.”
천애랑은 기분 좋게 일행들에게 다가갔다.
“여기가 담가(家)라고 들었습니다.”
담대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의 얼굴엔 천애랑에 대한 반가움의 미소가 가득이었다.
“예, 천소협을 꼭 초대하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초대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하하.”
“그런데 여기가 무슨 건물입니까? 상당히 특이하네요.”
천애랑은 1층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1층 벽면에 세워진 책장엔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제가 공부하던 곳입니다. 천 소협이 있던 곳은 제가 예전에 잠자는 방이었고요, 여기에 책들을 잔뜩 모아뒀죠. 그냥 여기서 먹고 자면서 책 봤습니다. 여기가 가문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어서 천 소협을 여기에 모셨습니다.”
“아.”
천애랑이 작은 놀라움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때 찬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랑.”
천애랑은 고개를 돌렸다. 찬호가 미소 짓고 있었다.
천애랑이 미소로 화답했다.
“아! 찬호, 자네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찬호가 콧방귀를 꼈다.
“흥! 내가 무사하지 않을 일은 없어.”
찬호의 말에 천애랑은 웃었다. 찬호의 말속에 걱정이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이야. 소걸이 너도.”
송소걸은 눈을 치켜뜨고 천애랑에게 잔소리했다.
“아니, 형님! 도대체 제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아주 죽으려고 작정을 했지. 병영 한가운데서 그렇게 싸우면 어쩌자는 거예요? 구출 작전을 하자고 했지 누가 섬멸작전을 하자고 했어요?”
송소걸의 잔소리에 천애랑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그놈의 민망할 때 뒷머리 좀 그만 긁어요.”
“하하…….”
천애랑이 멋쩍음에 또다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천애랑을 보며 송소걸이 포기하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에휴…….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여러모로 대단한 형님이라니까.”
송소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반가움의 인사가 적당히 오간 후 천애랑은 송소걸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그때의 상황은 어떻게 됐어?”
“그 오장이라는 자의 형제들을 구출했어요. 안타깝게도 두 명의 형제는 죽었다더군요. 그 외에 납치되었던 자들도 구하고 풀어줬습니다.”
형제들 중 죽은 이가 있다고 하니 천애랑의 입 안이 썼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을 구했다는 생각에 안도감도 느껴졌다.
“그럼 그 형제들은 어디에 있는데?”
“거기부턴 아무래도 여기 담 공자께서 대답해주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송소걸이 담대혁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에 담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그래 주세요.”
담대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느라 뜸을 들였다.
천애랑은 담대혁을 보았다.
대나무 색과 같은 연한 녹색의 학사복이 담대혁에게 참으로 잘 어울렸다.
곧은 기상이 보이는 것도 같았고, 맑은 기운이 풍기는 것도 같았다. 눈빛도 무언가 더욱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했는지 담대혁이 입을 열었다.
“심양에서 천 소협이 실종되고 난 후 저는 가문으로 돌아왔었습니다. 그런데 가문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정확히는 저를 찾아왔더군요. 주원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대장으로 있는 홍건적에 군사(軍師)로 와달라고 말이죠.”
천애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홍건적이요?”
객잔 같은 곳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네. 자신들에겐 힘과 명분이 있으니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바꿔줄 머리를 구한다더군요. 무림맹에서 중간 관리자급으로 무인들을 보내줬지만 이들에게 백부장이나 특수임무를 시킬 순 있어도 지자(知者)는 부족한 실태라고 순순히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림맹의 파견 인물들은 결국 무림맹 각 문파의 소속들이니 주원장 대장은 자신만의 사람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였나 보군요? 아! 예전에 담 소협이 꿈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나네요.”
천애랑의 말에 담대혁이 반갑게 웃었다.
“하하. 기억하시는군요. 맞습니다. 제 능력을 발휘할 기회와 시기, 그에 합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개국공신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죠.”
천애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게 송 아우가 했던 말을 잇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담대혁은 피식 웃었다. 방금 말한 개국공신이라 함은 나라를 전복시키겠다는 의미와 같아 엄청나게 위험한 표현이었음에도 천애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실소가 나온 것이었다.
“네. 그렇게 저는 주원장의 군사(軍師)가 되자마자 황실의 병사들과 싸우게 됐습니다. 10만 군세(軍勢)도 물리쳤었지요.”
“대단합니다.”
천애랑이 상상도 가지 않는 10만이라는 숫자를 떠올렸다.
팽풍궐과 전투를 벌인 천여 명의 병사들도 바글바글한 느낌이었기에 10만이라는 숫자가 더더욱 가늠되지 않았다.
담대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 물리친 것이지 그 10만이라는 숫자가 한 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흩어지고 뭉치고를 반복하며 각개전투가 1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 것인지 제 부대가 추적하던 황실군이 천 소협 및 의형제분들과의 전투가 있었던 부대였습니다. 천 소협 덕분에 지휘관들이 없어 쉽게 소탕할 수 있었습니다.”
“아……?”
천애랑은 이제야 갑자기 나타난 무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천애랑이 힐끗 찬호와 송소걸을 봤다. 그들은 이미 들은 이야기인지 놀라지 않고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 소협이 구출하고자 했던 형제들은 저희 병력에 합류했습니다. 황실군에 의해 형제가 둘이나 죽어서인지 작은 기회를 제안하자 흔쾌히 수락하더군요. 일장이라는 이름의 맏형을 십부장으로 삼고 남은 형제들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혹시 천 소협의 사람인데 제가 괜한 오지랖을 피운 걸까요?”
천애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죽음과 복수를 꿈꾸는 그들 형제가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의각원에서 나온 후 바라본 세상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검과 피가 난자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지금 같은 때 검과 피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시대에 평범한 농부나 일꾼으로 사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선택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아닙니다. 작은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라 신경이 쓰였는데 감사합니다.”
담대혁은 천애랑의 여전한 마음씨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혹시 거대한 활을 쏘던 노인 분 보지 않았습니까?”
천애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가르던 화살이 떠올랐다.
“예, 기억나네요. 의식을 잃기 직전 저를 구해준 거대한 화살을 봤습니다.”
담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장 대장의 정신적 지주이자 무공스승인 분입니다. 조의선인이라고 들은 것 같군요. 그분이 천소협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자가 말입니까? 어디에 있습니까?”
천애랑이 눈을 빛냈다.
“가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주원장의 별동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만나볼 수 있을까요?”
천애랑이 당장이라도 움직이려고 하자 송소걸이 걱정스레 말렸다.
“예? 형님!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찬호와 담소연도 걱정을 했다.
“그래 애랑, 너무 무리하지 마.”
“맞아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천애랑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담대혁이 웃으면서 말을 했다.
“하하하, 그 전에 제 아버님을 좀 뵈었으면 합니다. 천 소협을 워낙 보고 싶어 하셔서요. 천 소협이 깨어나신 걸 아시면 매우 좋아하실 겁니다.”
* * *
한 중년인이 처마 밑 마루에 서서 소복이 내리는 눈을 감상하고 있었다.
옛날 내가 집 떠날 적에는
버드나무 하늘거렸는데
오늘 내가 돌아오는 길에는
눈비 펄펄 내리고 있네.
중년인은 눈을 보며 시를 읊었다. 속절없이 지나간 세월에 대한 한탄이었다.
“세월이 부질없구나.”
중년인은 멋들어지게 가슴께까지 기른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눈이 뽀얀 눈에 비추어 맑게 빛이 났다.
산속에서 봤다면 신선이라고도 생각이 들 만한 맑은 눈 위에 얹어진 염미(艶眉)는 곧은 성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또한 곧은 콧대 아래에 굳게 다문 입술에선 특유의 고집도 보였다.
그는 담가의 가주이자 산동에서 대(大)학사로 명성이 자자한 담하웅이었다.
그런 담하웅이 머무는 가주전의 대문을 벌컥 여는 이가 있었다.
“아빠!”
담하웅은 근엄한 표정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담소연은 쌓인 눈들을 피해 폴짝폴짝 뛰어왔다. 그리고 담하웅에게 와락 안기었다.
신선같이 근엄한 자세를 갖던 담하웅의 입에 절로 아빠미소가 지어졌다.
“아이쿠~ 우리 딸 왔니?”
담소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봤다. 중년인도 딸의 시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쳐다봤다.
한 달 전부터 가문에 머문 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담하웅은 들어오는 면면들을 살폈다.
가장 선두엔 자신의 아들이자 가문의 장남이 있었다.
책을 좋아하고 생각이 많아 집에서 몰래 가출을 많이 한 녀석이자 문제아였다.
세상 경험을 한 덕분인지 이제는 제법 사내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동네 여인들이 왜 이런 놈을 좋아하는지 모르겠군. 나 정도는 되어야지. 흠흠.’
괜히 자신의 아름다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담하웅은 뒤따라오는 이를 봤다.
굵은 턱선에 진한 눈썹, 높은 콧날에 파란 눈을 가진, 다부진 몸매의 찬호라는 이. 평소엔 말이 많지 않아 그 속을 쉽게 알 수 없었지만.
‘의리가 좋아 보이는 강인한 인상이다. 그래. 남자라면 저런 무게감도 필요하지.’
담하웅은 찬호의 분위기에 나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담하웅은 이어서 찬호의 옆에서 가벼운 걸음을 옮기는 이를 살폈다.
고운 피부에 가는 선, 작은 입술이 여자의 관상에서 많이 나오는 특징들이지만 남자보다 더 당돌한 송소걸.
‘대화를 나눠보니 상당히 총명해서 담소 상대로 재밌는 아이.’
담하웅은 송소걸의 재기발랄한 모습을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검은 무복을 입고 걸어오는 이를 보았다. 이들이 가문에 모여서 머물게 된 이유이자 치료 때문에 제대로 본 적은 처음인 자.
담하웅은 눈을 좁히고 천애랑을 관찰했다.
조각 같이 잘생긴 얼굴과 완벽한 몸의 비율, 어정쩡한 길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남자였다.
적당히 큰 눈에 맑은 눈빛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어떠한 매력이 있었다.
한참 천애랑을 살피던 담하웅의 눈에 천애랑의 미간 사이, 눈썹 바로 옆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점이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를만한 특징이었지만 숱한 책들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왔던 담하웅은 그 점을 포착했다.
‘제왕의상(帝王의相)!’
담하웅이 눈을 크게 뜨며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