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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38화 (38/200)

기공술사 38화

남자는 그래도 천부장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내시가 된 지 어언 50년이 지났네. 권모술수가 넘쳐나는 황실에서 50년을 살아남았다는 말이기도 하지.”

천부장이 연신 맞장구를 치며 눈치를 봤다.

팽 태감이라 불린 내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내시의 업무 중 하나가 마마님들 모시는 거거든? 그러다 보면 말이야. 저런 게 여장인지 아닌지 금방 알아낼 제주가 생긴단 말이지.”

천부장은 화들짝 놀라 천애랑을 봤다. 그의 눈엔 아무리 봐도 여인이었지만 어르신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그리고 말이야. 천부장아?”

“예, 예. 어르신.”

팽 태감은 천부장의 볼을 탁탁 쳤다. 그때마다 천부장이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눈앞의 인물은 자신을 한낱 개미라고 폄하해도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여인이, 혼자서, 이 산중에, 그것도 남자들만 가득한 이곳에, 병영의 중앙에 위치한 이곳까지 겁도 없이 도움을 청하러 왔다?”

팽 태감의 작은 눈이 번뜩이며 천애랑을 쏘아봤다.

천애랑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재수 없는 늙은이를 보며 침을 삼켰다.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다만 겉으로는 이 상황이 두려운 척 연약한 연기를 했다.

팽 태감은 요상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천애랑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요호호. 꽤나 아름답긴 하구만, 남자로서 말이야. 원체 본 외모가 뛰어나 여장을 했음에도 어색함이 없었어. 게다가 기를 다루는 것에 상당히 익숙해. 자신의 기를 잘 감추고 있었어. 그러니 병사들이 다 속은 것이겠지?”

천애랑은 최대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팽 태감이 일갈(一喝)을 내질렀다.

“요놈! 감히 내 앞에서 수작질이냐! 멀쩡한 사내가 감히 여장을 해?!”

팽 태감은 순간 화를 낸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일그러진 얼굴을 다시 웃는 얼굴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변하는 표정은 마치 가면극을 보는 것 같았다.

“요호호. 내가 순간 흥분을 했네.”

‘내시… 내시라…. 그런데 내시가 뭐였더라……? 아?!’

천애랑은 내시라는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아 연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과거 담대혁이 현 황실의 암담함에 대해 토로할 때, 내시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언급했던 게 떠올랐다.

황실의 살림에 대한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

“거시기 없는 사람?!…… 헉!”

마음속으로만 떠올린다는 것이 놀란 나머지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천애랑이었다.

천애랑이 슬며시 팽 태감을 봤다.

푸들푸들 떨리는 팽 태감의 볼을 보니 상황을 좋게 넘어가긴 그른듯했다.

“내…… 반드시 저놈의 거시기를 잘라 내 방에 박제할 것이네.”

이게 뭔 개소린가.

상상도 못 할 말에 천애랑이 뜨악했다. 살면서 저런 표현은 처음 들었다.

거시기를 박제한다니?

“남자의 상징을 잃어서 미친 것 아니야?!”

‘헉!’

또다시 본의 아니게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천애랑이었다.

상황이 참 어색해졌다.

콰직-!

팽 태감의 몸에서 내기가 거칠게 뿜어져 나오며 주변 집기가 부서졌다.

천부장은 분노한 팽 태감을 보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어느덧 막사 안에는 팽 태감과 천애랑 두 사람만 남아 어색한 기류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해야, 안타깝구나. 네 마지막 말에 박제를 하려던 생각을 바꿨다.”

천애랑은 더 이상 상황을 수습할 분위기가 아닌 듯하자 끝까지 하려던 연기를 포기했다.

천애랑이 허리를 쭉 펴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후우…. 요 향도 그렇고 드라쿠도 그렇고 뭐 이런 변태 같은 놈들이 존재하는 건지.”

천애랑은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팽 태감을 쳐다봤다.

순간 팽 태감의 몸이 갑자기 사라졌다.

자연체로 몸의 긴장을 풀고 있던 천애랑의 감각에 섬전 같은 공격이 느껴졌다.

천애랑은 축지법으로 공간을 접어 순식간에 자리를 피했다.

섬세해진 내공운용을 통해 최소한의 내공으로 최고 효율을 내는 작업을 이루어냈다.

‘몸에 부담이 없다.’

천애랑은 그간의 깨달음과 몸의 변화를 백부장들을 죽이면서 적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팽 태감의 공격을 피하면서 예전과는 비슷한, 그러나 다른 종류의 성장을 느끼고 있었다.

천애랑의 심장은 적진 한가운데서 갇혔다는 걱정이나 예상외의 고수를 만났다는 두려움보다 두근거리는 흥분이 더욱 크게 다가와서 세차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팽 태감은 자신의 공격을 피한 천애랑을 다소 놀란 눈으로 봤다.

“이걸 피해? 네 이름이 뭐냐?”

“천애랑이오.”

“천애랑? 처음 들어 보는데? 나의 공격을 이 정도로 깔끔하게 피할 자가 무명이라…… 재밌구만. 요호호호!”

천애랑은 더욱 눈에 불을 켜며 괴상하게 웃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름은 뭐요?”

“나? 요호호, 오랜만에 내 이름을 묻는 자를 만나는군……. 팽풍궐(彭風厥)이라고 하네.”

천애랑은 팽씨라는 성(姓)에 고개를 갸웃했다.

“팽가(彭家)의 사람이오?”

천애랑의 물음에 팽풍궐이 인상을 썼다.

“내 앞에서 팽가를 언급하지 마라!”

“왜 그런 것이오?”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한다던가?

천애랑이 안타까운 눈으로 팽 영감의 아랫도리를 보자 팽풍궐은 인상을 쓰며 자신의 어릴 적을 생각했다.

*  *  *

“풍궐아, 울 엄니가 너랑 놀지 말래.”

“왜에?”

어린 풍궐은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으며 친구의 말에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네가 천박한 오랑캐 핏줄이라고 그러던데?”

말을 하는 아이도 그저 어머니가 시켜서 그렇지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풍궐은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자신과 놀지 않겠다고 하자 그날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니!”

풍궐의 어머니는 평소보다 일찍 들어온 풍궐을 보며 놀랐다. 평소에는 친구들과 논다고 아침에 나가서 밥시간에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풍궐아, 무슨 일이 있니?”

풍궐의 어머니는 풍궐의 눈이 글썽거리는 것을 보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풍궐은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에 끝내 눈물을 흘렸다.

“훌쩍, 엄니. 진구가 나보고 오랑캐라고 같이 안 논데.”

풍궐의 말에 어머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무 말이 없던 풍궐의 어머니는 풍궐의 눈높이에 맞게 무릎을 꿇고는 풍궐을 품에 꽉 안았다.

뚝. 뚝. 뚝.

풍궐의 어깨로 떨어지는 눈물에 풍궐은 훌쩍이다가 놀라서 물었다.

“엄니, 울어? 나 때문이야?”

“흑흑흑, 아니야 풍궐아…… 다 엄마 때문이야……, 다 이 엄마 때문이란다……. 흑흑흑.”

돌궐족(突厥族)의 후손인 여인과 팽가(彭家)의 인물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생겼다.

부상당한 팽가의 인물을 돌궐족 여인이 구해주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남자는 곧 가문의 중요한 일 때문에 여인을 두고 떠나게 됐다.

여인은 곧 돌아오겠다는 남자의 말만 믿고 순수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 정말 어렵게 팽가(彭家)로 찾아갔다.

하지만 거기에서 본 장면은 남편이 다른 여인과, 더군다나 한 팔에는 귀여운 아이를 안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풍궐의 어미는 풍궐의 아비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표정과 냉대뿐이었다.

오랑캐의 여인이 감히 어디서 수작질이냐면서 발로 걷어차이다시피 쫓겨난 여인.

여인은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지만 어미가 슬퍼하자 같이 슬퍼하며 울어주는 아들을 보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힘겹게 산에서 캔 나물을 시전에 팔거나 잡일을 해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가는 마을마다 천시와 차별을 당하기 일쑤였다.

남편은 자신을 버렸다지만 자신은 아직도 사랑하는 그 남자가 지어준 아이의 이름을 바꿀 수가 없었다.

팽풍궐(彭風厥)의 궐(厥)은 돌궐족의 상징과도 같았기에 금방 신분이 알려지기 마련이었지만 말이다.

“풍궐아, 다른 곳으로 이사 갈까?”

어미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떨리지만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아들에게 물었다.

“아니야, 우리 그냥 여기서 살자. 진구가 말은 그렇게 해도 금방 나랑 놀아 줄 거야. 히히.”

“……그래, 우리 예쁜 아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그 뒤로 사소한 사건들은 있었지만 작고 조용한 마을이라 그런지 어떻게든 풍궐의 모자는 꿋꿋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불행은 예고가 없다던가.

어느 날 마을에서 절도와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마을 사람들은 범인으로 산속에서 사는 풍궐의 어미를 지목했다.

그날은 어느새 몸이 자란 풍궐이 어머니를 돕기 위해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집에 가까이 도착한 풍궐은 나무를 하면서 발견한 몸에 좋다는 버섯을 어머니에게 몰래 주기 위해 등 뒤로 숨기고는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풍궐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미 혀를 깨물고 죽어버린 어미와 그런 어미의 하체에 씩씩거리며 양물을 집어넣는 마을 남자들이 있었다.

순간 풍궐은 눈이 돌아가 나무질을 위해 가지고 있던 도끼로 남자를 내리 찍었다.

즉사한 남자를 보며 주위의 다른 남자들은 황급히 너희 어미가 마을의 재물을 훔치고 사람까지 죽여서 벌을 준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풍궐의 도끼질에 입이 찍혀 죽었다.

분노한 풍궐은 산골 작은 마을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후 남자의 상징인 양물을 혐오하게 되어서 자신의 양물을 도끼로 찍어 버렸다.

그리고는 피를 흘리며 황실로 찾아가 환관이 되었다. 그 뒤로 팽풍궐은 정적의 양물을 자르는 취미가 생겼다.

*  *  *

“어떻게라……. 나의 어린 시절은 추악함이 가득한 세월이었다.”

천애랑은 뜬금없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팽풍궐을 보았다.

그의 눈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팽풍궐은 쓸데없이 떠오른 어린 시절의 악몽과 추억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런 팽풍궐의 눈에는 오로지 작은 불꽃만이 가득했다.

“아해야, 최대한 발버둥을 쳐 보아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오랑캐의 후손이 오랑캐가 세운 나라에서 최고가 되었다. 복수의 끝은 공허함뿐이라 했던가… 끝없는 후회 속 고통만이 나를 강하게 할 뿐.”

“뭔 개소리인지 모르겠다!”

천애랑은 팽풍궐의 이상한 헛소리를 참지 않고 기습공격을 했다.

발경(發勁).

이번에는 내공을 담았다.

침투경(浸透勁).

상대방이 호신강기를 펼치더라도 그 안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

천애랑의 손바닥이 팽풍궐의 배에 닿으려는 찰나 팽풍궐이 금나수를 펼쳐 천애랑의 팔을 잡아챘다.

“크윽?!”

천애랑은 팽풍궐에게 잡히는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바로 팔을 뺐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팔이 으스러졌을 것 같았다. 엄청난 악력이었다.

팽풍궐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황궁은 말일세. 허락된 이들을 제외하고선 금검(禁劍)의 영역이라네. 특히 내시는 마마님들을 모셔야 하기에 절대적으로 무기가 허락되지 않지. 그래서 내시들은 기본적으로 조법(爪法)을 익힌다네.”

팽풍궐이 경고하듯 자신의 손을 천애랑에게 보였다.

“후우…….”

천애랑이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예전처럼 내공을 무지막지하게 사용하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간 내공이 없던 시간들의 경험에 비추어 보며 무식하게 내공으로만 싸우는 것을 자제하고 싶었다.

몸에서는 내공이 넘쳐흘렀지만 더 높은 경지를 위해 스스로를 좀 더 시험해보고 싶었다.

천애랑은 씨익 웃으며 알싸한 손목을 털어 통증을 완화시켰다.

“요호. 오지 않는다면 내 먼저 가지.”

팽풍궐의 손에서 막대한 내기가 응축됐다. 그와 동시에 그는 손날을 세워 천애랑에게 내질렀다.

천애랑은 팽풍궐의 공격을 보면서 하나의 창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천애랑은 축지법으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 공격이 어찌나 빨랐는지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는데도 몸에 닿아 작은 손해를 입었다.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까.’

천애랑은 이어지는 팽풍궐의 공격을 피하면서 계속 고민했다.

지금 찾고자 하는 방법은 그동안 해왔던 수련과는 결이 달라 생경했다.

“요호호.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구나. 이것도 받아봐라! 강기참(罡氣斬)이다!”

팽풍궐의 손에서 더 거대한 기운이 발출됐다.

천애랑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건 못 피하겠는데.’

“흐읍!”

천애랑은 어쩔 수 없이 호신강기를 만들며 광폭환으로 팽 태감의 강기를 맞췄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천부장의 막사가 터져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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