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35화
천애랑은 자신이 생각한 남자가 확실하자 천천히 다가갔다.
대충 난 수염과 주걱턱, 일전에 의각원을 찾아갈 때 잠깐 만난 형제 산적 중 한 명이었다.
“공, 공자님!”
남자는 천애랑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부복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 행태에 뒤따라온 찬호와 송소걸이 어리둥절 멈춰 섰다.
천애랑은 자세를 낮춰 남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에고, 뭔 보자마자 그래요. 어찌 잘 지냈어요? 다른 형제들은요? 그리고 몇 째에요? 다 닮으셔서….”
남자의 훌쩍임에 콧물이 수염에 묻어 흘러내렸다. 송소걸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저 오장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오장은 천애랑을 만나 흥분을 했는지 횡설수설했다.
천애랑은 오장을 진정시키며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었다.
이들 형제는 천애랑과 헤어진 후 가진 돈으로 적당히 옷을 맞춰 입고 표국의 짐꾼으로 일을 해왔다.
원체 타고난 힘과 새로운 삶에 대한 절실함 덕분에 열 명의 형제들은 표국에서도 빠르게 인정을 받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몇 주 전 표행에서 큰 봉변을 당했다.
“표사들은 죽고. 표물과 일꾼들이 다 잡혀갔다고요? 오장 님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망쳐 도움을 구할 방법을 찾는 중이고요?”
“예, 예. 맞습니다! 공자님!”
오장은 또다시 눈물, 콧물 흘리며 통곡을 했다.
자신들에게 처음으로 따뜻함을 베푼 선인이자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만난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송소걸이 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표행을 덮친 이들은 산적이었나요? 혹시 녹림이라고 외치는?”
오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말과 갑옷을 갖춰 입은 이들이었습니다.”
공격한 이들이 병사들인 것 같다는 정보 외에는 오장도 딱히 아는 것이 없자 송소걸이 나섰다.
“형님들. 어딘가 가 계세요. 제가 정보를 좀 모아서 올게요.”
“같이 가주리?”
찬호가 도움을 자처하자 송소걸이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관리들도 만나고 할 수 있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불편해 할 수 있거든요. 혼자 갔다 올게요.”
찬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애랑이 엎드린 오장을 일으켜 챙기며 송소걸에게 말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아까 객잔에 가 있을 테니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갔다 와.”
“예 형님.”
송소걸이 짧게 미소를 짓고는 몸을 움직였다.
* * *
송소걸은 의형들과 떨어진 후 도시의 골목길을 한참 돌고 돌았다.
그리고 정오(丁午)라는 글자가 매듭 묶여진 정육점을 찾아 들어갔다.
덩치가 큰 백정(白丁)이 도축 칼을 갈면서 말했다.
“무슨 고기를 사시려우? 오늘은 특별히 양고기도 들어 왔수다. 싸게 드릴 테니 보고 가시구랴.”
송소걸이 무심히 말했다.
“개미가 홀로 먹고살기 힘들어 무리를 지었어.”
정육점 안에 잠시 동안 침묵이 찾아왔다.
“베짱이가 추운 겨울에 개미에게 도움을 청하네. 뉘슈?”
송소걸이 백정에게 작은 명패를 건넸다. 백정은 명패를 받아서 유심히 살펴봤다.
명패를 확인한 백정은 이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송소걸과 명패를 오가며 쳐다봤다.
백정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낮은 곳의 귀한 분을 뵙습니다.”
백정의 인사에 송소걸이 손을 휘저었다.
“됐고, 최근 동정호 인근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봐. 특히 표국과 군병들의 충돌에 대해서.”
백정은 칼을 내려놓고 도축하느라 피로 더러워진 손을 앞치마에 대충 닦았다.
그리고 정육점의 문 앞으로 가서 주위를 살피고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는 폐(閉)라고 쓰인, 문을 닫는다는 의미의 목패가 걸렸다.
“안으로 드시지요.”
송소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백정을 뒤따랐다.
정육점 뒤에는 약간의 동굴처럼 되어 있는 공간이 있었다.
천장에는 도축된 고기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동굴처럼 생긴 공간 때문인지 시원한 공기가 가득했다.
백정은 천장에 걸린 고기들 사이를 지나더니 도축 도구들이 걸려있는 벽면의 고리 하나를 당겨 내렸다.
드르륵.
그러자 막혀있던 벽이 열리며 계단이 나타났다.
백정은 송소걸을 쳐다보지도 않고 계단을 앞장서서 내려갔다.
송소걸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백정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니 다섯 명의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흐음. 이 자들은 뭐 하는 거지?”
송소걸의 질문에 백정이 거칠게 생긴 한쪽 눈썹을 씰룩거렸다.
“처음 보시는 겁니까?”
“응, 워낙 삶이 바빠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들은 정보를 정리하는 자들입니다. 저쪽 끝에 보시면 작은 종이들을 가져오는 사람이 보이실 겁니다. 각 지점마다 공유하는 정보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백정의 말에 송소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음… 그렇군.”
“예, 계속 따라 오시지요.”
백정은 정보를 정리하는 사람들을 지나서 한 벽면 앞에 섰다.
앞서 했던 것처럼 벽의 특정 부분을 잡아당기니 이번엔 벽이 옆으로 움직였다.
드르르륵.
“들어오시지요.”
백정과 송소걸은 여러 가지 서책들이 가득한 방으로 들어갔다.
송소걸은 주위를 신기한 듯 둘러봤다.
백정은 책장에 정리 돼있는 곳 중 가장 바깥쪽에서 죽간들을 꺼냈다.
백정은 그것들을 송소걸에게 내밀었다.
“이게 가장 최근에 정리한 정보입니다.”
송소걸은 백정이 내민 죽간들을 천천히 읽었다.
다그락 다그락 죽간 넘기는 소리가 음악처럼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흐음…… 황실의 일들이야 알고 있던 사실인데. 마지막에 군사(軍士)는 뭐지?”
송소걸의 질문에 백정이 대답했다.
“홍건적에게 패퇴한 황실 패잔병들이 동정호 인근을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식량과 사람이 필요했던 군인들이 몇몇 표행과 민가들을 약탈한 것 같습니다.”
송소걸의 미간이 좁혀졌다.
“……계속.”
“어제 입수된 정보로는 그들이 호북 홍안 인근에서 발견됐습니다. 아마 장강의 강물을 이용해 빠르게 이동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동방향을 봤을 땐 아무래도 북경으로 귀환하는 것 같습니다.”
“계속.”
“그들의 이동 경로상 발생한 인명피해가 어림 천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안엔 표행의 인원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상당 비중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황실군이기 때문에 인근 관청은 말할 것도 없고 중소 문파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개자식들! 황실군이 아니라 순 도적떼들 아닌가?!”
송소걸은 분노하며 들고 있던 죽간을 바닥에 내던졌다.
백정은 조용히 떨어진 죽간을 주워 책장 제자리에 정리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군사들의 인원이 얼마나 되지?”
“보병 1000명에 기병 200명입니다. 헌데 어제의 정보에 의하면 현잰 그 패잔병들 중 보병만 남은 듯했습니다. 아마 기병들은 먼저 돌아간 것 같습니다.”
“죽일 놈들!”
한참 열을 내던 송소걸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에효. 그만 돌아가지.”
송소걸의 말에 백정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송소걸의 화내는 모습을 본 백정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소문 가득했던 소문주의 실체를 확인해서 백정은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몸을 담은 문파가 그간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정보를 모아서인지, 세간에선 그 행태를 지적하며 은은한 괄시를 해왔었다.
그런 괄시 때문인지 필요할 땐 단물만 빨아먹고 뒤통수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문파는 점점 더 독해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문주가 협(俠)이라는 명분으로 문파를 양지로 끌어 올리겠다고 혁신을 공표했었다.
그럼으로써 하류 인생의 문도들이 더는 괄시를 받지 않게 만들겠다는 포부를 내비쳤었다.
문주의 거침없는 행보 이면엔 소문주의 영향이 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백정은 소문주가 어떤 인물일지 궁금했었다.
저리 가장 낮은 인생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소문주라면 하류 인생들인 문도들의 사정 또한 더욱 잘 보듬어 줄 수 있겠다 싶었다.
정육점의 밖까지 따라 나온 백정이 떠나려는 송소걸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소문주님의 안녕(安寧)과 승리(勝利)를 기원하겠습니다.”
송소걸은 백정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장사 잘하고~.”
송소걸은 왔던 길 그대로 건물들을 지나 골목으로 사라졌다.
* * *
석양 지는 붉은 하늘.
평화객잔의 숙소엔 아침과는 다르게 평화롭지 못한 셋이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런 이들을 향해 방문을 힘차게 열며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형님들~”
“왔어?”
천애랑이 송소걸에게 빈자리를 가리켰다.
“예. 애랑 형님.”
“얻은 정보 좀 있어?”
찬호의 물음에 송소걸이 빈자리에 앉으며 턱을 치켜세웠다.
찬호는 으스댈 준비를 하는 송소걸의 모습을 보면서 비꼬았다.
“허탕 쳤구나?”
송소걸은 찬호의 놀림을 가볍게 무시하며 의기양양 말했다.
“흥! 제가 누굽니까. 형님들 아우 아닙니까. 당연히 얻은 정보가 있지요.”
송소걸은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오장에게 잠시 시선을 뒀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황실의 패잔병들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홍건적에게 패퇴하여 북경으로 돌아가던 보병들이었던 것 같은데 식량과 수발을 들 인원이 필요했나 봅니다.”
송소걸의 말에 오장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형제들이 생각나고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송소걸은 말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표사들은 물론 민간인들까지 대략 천여 명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패잔보병들은 현재 호북 홍안 인근을 지나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기병들은 기동력을 앞세워 먼저 북경으로 향한 것 같고요.”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천애랑이 무거운 분위기 속 질문했다.
“보병은 천 명쯤 된다고 합니다.”
“흐음…….”
숙소 방 안이 더욱 무거워졌다.
오장은 형제들을 구할 방도가 없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지만 관청에선 오히려 몰매를 맞았고 무림인들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었다.
기적처럼 만난 마지막 희망이 천애랑이었지만 상황을 보니 형제들을 구함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많네.”
천애랑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찬호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군.”
송소걸은 둘의 묘한 분위기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눈을 찌푸렸다.
“형님들. 혹시 저자의 형제들을 구하러 갈 생각인 건 아니죠…?”
천애랑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일행들을 둘러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나 혼자 가서 구하고 올게.”
그 말에 송소걸이 기겁을 했다.
“예에? 형님! 귀가 삐뚤어졌어요?”
“쓰읍!”
찬호가 송소걸의 언행에 주의를 주며 차갑게 쳐다보자 송소걸도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보병만 천 명이래요! 아무리 패잔병들이라고 하지만 황실군이면 훈련받은 이들이고 백부장, 아니 십부장만 되어도 제법 무공을 배웠을 거라고요?”
송소걸의 호들갑에 반대되게 천애랑이 차분히 송소걸을 쳐다봤다.
“그래. 위험할 수 있으니 혼자 침투할 생각이다.”
“아니, 형님!”
송소걸이 드물게 큰 언성으로 화를 냈다.
“왜 맨날 혼자 짊어지려고 해요? 그렇게 행동하면 저희 형제를 무시하는 거라니까요?!”
송소걸의 말에 찬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모처럼 막내 말이 맞다 애랑. 네 문제는 곧 우리 형제들의 문제이기도 하지.”
천애랑은 형제들의 마음에 작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후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 앞으론 조심할게. 그렇다면 직설적으로 말할게. 나와 인연이 있는 이 자의 형제들을 구하고 싶어. 인연의 깊이를 따지거나 이해득실을 따지고 싶진 않아. 내 마음이 그래. 이것도 이해해 줄 수 있겠어?”
천애랑의 솔직한 고백에 찬호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흑검을 들어올렸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는 거지. 뭐 그리 복잡해. 생각은 편한 게 좋은 거라니까? 필요하다면 내 검이 너를 지킬 거야 애랑. 여기엔 어떤 이유도 필요 없어. 걱정 마.”
송소걸이 입을 삐쭉이며 찬호를 흘겨봤다.
“아 거참. 찬호 형님은 나한테만 까칠하고 애랑 형님한텐 애인처럼 달달하다니까? 크흠! 아, 아! 알았어요. 검은 빼지 말아요. 또 날카롭게 그러시네. 헤헤.”
천애랑이 웃으며 송소걸을 바라봤다.
“소걸. 네가 식견이 넓고 꾀를 잘 내잖아? 맞지?”
“물론이죠. 꾀 하면 접니다. 제갈공명도 울고 갈 정도지요.”
그새 허세 가득한 말을 하는 송소걸을 보며 찬호가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면 거의 병이었다.
천애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구출할 방법을 만들어봐.”
송소걸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묻는 말이지만 진심이신 거죠?”
천애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막내가 짜준 계획이라면 불가능해 보여도 무조건 따를 생각이다.”
송소걸의 입가에 악마 같은 미소가 스쳐간 것은 착각일까.
송소걸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애랑에게 다시 물었다.
“형님. 분명 그 과정에서 황실군과의 전투가 필수불가결할 거예요.”
“각오했어.”
“수많은 살생이 따르는 작전이 될 수도 있어요.”
천애랑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지만 굳은 입술로 대답을 했다.
“찬호가 언젠가 그런 말을 하더군. 착한 개인은 있을 수 있으나 착한 집단은 존재할 수 없다라던가? 이번 일도 그럴 수 있다는 자각은 하고 있어.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의 병사들에게 손속사정을 두지 않을 테니 걱정은 하지 마.”
송소걸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요 형님. 그럼 저는 작전을 짜러 갈게요.”
방을 나가며 짓는 송소걸의 악동 같은 표정에 천애랑의 등줄기로 땀이 삐질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