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30화
석가장에서 표사들이 20여 명 대거 합류한 후로는 표행의 행보는 더욱 순탄대로였다.
송소걸의 말처럼 무한까지 향하는 남은 표행 동안 혈교의 추적 같은 것은 없었다.
한 번 하남의 대별산에서 일전처럼 녹림이라고 외치는 산적들이 나타난 적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 찬호의 쾌검에 두목이 죽고 많은 수의 표사들이 그들을 위협하자 산적들은 풍비박산 흩어졌었다.
그렇게 천애랑과 의형제들은 무탈하게 무한표국 석가장 지점의 호북 무한행 표행을 완수하고 두둑한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쉬지 않고 호북 적벽(赤壁)으로 향하고 있었다.
“야. 그 정보 확실해?”
찬호의 질문에 송소걸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형님. 무려 조조와 손권, 유비가 맞붙은 곳 아닙니까. 숨겨진 비동이 있다고 객잔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걸 형님도 들었잖아요.”
“소걸. 그러면 이미 사람들이 다 털어가지 않았을까?”
천애랑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송소걸에게 말했다.
“아이, 애랑 형님! 내가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구라쟁이지.”
찬호가 송소걸에게 핀잔을 주었다.
“거참. 찬호 형님. 글쎄 운남십귀랑 싸우다가 전낭을 잃어버린 걸 몰랐다니까 그러네요?”
“그래서 뭐? 잘했다고?”
“아, 아니! 그래도 행수가 챙겨준 은 10냥 형님이랑 애랑 형님이랑 절반씩 다 드렸잖아요.”
찬호가 더 쏘아붙이려 하자 천애랑이 미소를 지으며 중재했다.
“찬호. 동생이 실수도 할 수 있지. 자네가 참아.”
천애랑의 중재에 송소걸이 천애랑의 등에 슬며시 숨으며 찬호에게 빠끔 혀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천애랑의 말에 송소걸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소걸. 형제간에도 약속은 중요하니 다음 수익이 있으면 갚아라.”
찬호도 이제 와서 의동생의 돈을 아득바득 뜯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송소걸의 반응이 재밌어서 놀리는 것뿐이었다. 그건 천애랑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분위기를 주도하는 수다쟁이 송소걸 덕분에 의형제는 지난 한 달간 매우 가까워졌다.
이들은 맨날 티격태격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위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송소걸이 과장되게 불쌍한 척을 하자 천애랑은 그 모습이 귀여워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
송소걸은 자신의 연기 때문에 천애랑이 웃자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헤실헤실 웃었다.
“칫!”
그 넉살에 찬호도 피식 웃자 송소걸이 더 기분 좋게 웃으며 대화를 이었다.
“여하튼! 제가 도시를 돌면서 고급정보를 얻어왔으니 여기서 한몫 단단히 하자고요 형님들!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정보에요!”
“한 번만 믿어본다.”
찬호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천애랑은 사람 좋은 미소로 그저 소걸을 귀엽게 바라봤다. 의형제라는 관계가 너무 좋은 천애랑이었다.
* * *
칠흑처럼 어두운 밤. 연기 같은 구름에 가려 흐드러진 달빛이 전각 지붕 위를 내리비췄다.
그곳엔 한 인영이 앉아 술병째로 거칠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막주님.”
흑색 잠행복을 입은 이가 소리도 없이 술을 마시는 인영의 앞에 나타났다.
때마침 구름이 걷히며 술을 마시는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뒤로 질끈 묶은 머리에 상처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 이마부터 고운 선을 타고 내려가면 누구라도 시선이 멈춰버릴 붉은 입술. 하지만 그 눈빛은 세상 그 누구라도 심장을 멈춰버릴 만큼 차가웠다.
살막(殺幕)의 막주이자 옛 흑살(黑殺)의 계승자. 유소소였다.
“…….”
유소소가 아무런 말이 없자 남동생인 유소호가 얼굴의 복면을 내리면서 말했다.
“막주님. 아니, 누님.”
유소호가 호칭을 바꾸자 그제야 유소소가 반응을 보였다.
“말해.”
“무슨 방책이라도 마련해야지 않겠습니까?”
유소소가 예의 차갑고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눈으로 유소호를 쳐다봤다.
유소호는 유소소가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이 없자 답답한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님. 한다 안 한다 확실하게 입장을 정해야 누님을 따르는 이들이 흔들리지 않지요.”
“그래서?”
유소소의 고운 입이 열렸다. 입에서는 평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듣는 이라면 공기 중의 수분들이 얼어붙는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래서라니요?!”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으면 싶은데?”
도리어 되물어보는 유소소를 보며 유소호는 표정을 굳혔다.
“저는 절대 반대입니다.”
유소소가 여전히 무표정하게 물었다.
“왜?”
이번에는 유소호도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저는 현재 우리가 하는 일조차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대 촉나라 유비의 후예인 우리가, 살인으로 밥을 먹고 산다는 것이요. 할 줄 아는 재주라고는 이 짓밖에 없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유소호는 목소리에 힘을 더욱 주었다.
“그렇다고 마(魔)를 숭상하는 이들에게 굽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우리가 암살을 업으로 먹고산다지만 그 긍지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봐야 암살집단이잖아.”
“아니요! 그래도 우리는 선한 이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나름의 신조와 기준이 있는 것이라고요. 세상의 악(惡)을 어둠에서 징치한다는 나름의 기준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봐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 그리고 우리에겐 해야 할 복수가 있잖아.”
유소소의 마지막 말에 유소호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맞아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
유소소는 동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술을 벌컥 마셨다.
텁!
유소호는 유소소가 마시던 술병을 뺏듯이 가로채곤 거칠게 마셨다.
꿀꺽꿀꺽.
“크으……. 누님은 이 독한 것을 잘도 마십니다.”
한껏 인상을 찌푸린 동생을 보면서 처음으로 유소소의 입술에 잔 미소가 생겼다.
그런 유소소를 보며 유소호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역시 세상에서 누님의 미소가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많이 웃으십쇼.”
유소소의 표정이 다시 무표정하게 변했다.
유소호가 금세 무표정하게 변한 유소소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누님, 그래도 누님의 입장이 확실해져야 누님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들 누님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니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따를 겁니다. 다만 현명하게 결정하십쇼.”
스스슷.
유소호의 마지막 말만 허공에 남을 뿐 그는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유소소는 흐릿하게 잘 보이지 않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후우…….”
크게 한숨을 쉰 유소소는 암살집단의 수장답게 어떠한 소리도 없이 지붕 위에서 내려와 스며들 듯 창문으로 들어갔다.
삼층 전각의 최상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유소소는 침대 밑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드르륵.
나무 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나면서 오래된 가죽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됐으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이었다.
탈칵.
아무 대장장이나 만들지 못하는 자물쇠 형식의 경첩이었다.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한 쌍의 검집이 있었다. 그러나 검집에 착검된 검은 하나뿐이었다.
스르릉.
유소소가 검을 뽑으니 부드러운 검의 쓸림 소리가 들렸다.
그 길이가 크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히 중간 정도 길이의 검. 쌍검술을 펼치기 좋아 보였다.
유소소는 맑은 검신을 이리저리 달빛에 비춰봤다. 빛의 반사 각도에 따라 검은 다채롭고 묘한 느낌을 주었다.
웅웅웅웅------
검명이 울렸다.
“크흑!”
땡그랑!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 유소소는 검을 바닥에 급히 떨구고는 떨리는 손을 품에 안았다.
“이 쌍고검의 나머지 짝을 찾을 수만 있다면…….”
유소소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달빛에 흔들려 공허하게 사라졌다.
* * *
“형님들. 이쪽으로!”
송소걸이 큰 암석 뒤로 몸을 숨기며 조용히 천애랑과 찬호를 불렀다.
“오우… 저 많은 사람들은 뭐냐. 바글바글하네?”
“그런데 서로 사이가 안 좋아 보이는데?”
의형제들은 돌 뒤에 나란히 몸을 숨긴 채 눈만 빠끔히 내놓고 상황을 살폈다. 높은 구릉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국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쉽게 들키지 않는 위치였다.
구릉 아래 분지처럼 움푹 들어간 산속 평지엔 다양한 복장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그들은 패를 나누어 서로를 견제하는 느낌이었다.
“홍호검문, 통산파, 흥산창가……. 심지어 무당파와 제갈세가까지 있는데요?”
천애랑과 찬호가 송소걸의 식견에 놀라 쳐다보자 송소걸이 눈썹을 까딱였다.
“형님들 동생이 이 정도입니다. 어때요? 이런 동생이 물고 온 정보에 대한 신뢰가 더욱 팍팍 솟지 않아요?”
천애랑이 피식 웃었다.
“그래. 저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다른 쪽에 네가 원하는 비동이 있다는 거지?”
“예. 괜히 저들의 시선을 끌면 일 복잡해지니까 조용히 가시죠.”
송소걸은 주변 산세와 물길, 특이점이 있는 나무들까지 확인하면서 길을 찾아갔다.
그렇게 앞장서던 송소걸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한참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진법인 것 같네요.”
고민 끝 결론을 내린 송소걸의 말에 찬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법? 힘으로 부수면 안 되나?”
찬호의 말에 송소걸이 어이없이 쳐다봤다.
“형님. 무림 초보예요? 무슨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뒤질래?”
“에헤이~! 또 욱해서 막말하신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지금 눈앞의 진법은 천연지형에서 무기한으로 기를 공급받는 강력한 진법인 것 같단 말이에요. 단순히 주술석, 주술목 등을 부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쯧. 그러냐. 베는 거면 자신 있었는데 말이야.”
찬호가 아쉬운 듯 자신의 검 손잡이를 가볍게 토닥였다.
“저도 그렇게 쉽게 해결되면 좋겠네요. 아~ 역시 세상에 쉬운 게 없죠. 그런데 좋은 점이 뭔지 아세요?”
찬호는 송소걸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송소걸은 찬호의 시선을 즐기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런 상급의 진법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진법 안에 무언가가 확실히 있다는 거겠죠!”
찬호는 제법 그럴싸한 송소걸의 말에 표정을 풀고 순순히 수긍했다.
“것도 그러네. 그런데 어쩌냐. 진법 때문에 들어가지도 못하겠는데?”
송소걸도 그것이 고민인지라 입술을 삐쭉였다.
“그러니까요. 단순히 길을 잃게 만드는 현혹진이나 미로진이면 괜찮은데 혹여 생사문(生死門)이 있는 진법이면 골치가 아파지니까요.”
“아으. 진법은 잘 모르는데. 소걸아 어찌 해결 못 하겠냐?”
송소걸이 삐죽 내민 입술을 씨익 말아 올렸다.
“찬호 형님. 맨날 저를 무시하시더니만 실제론 저를 믿고 많이 의지하고 계셨군요?”
“개소리하지 말고.”
“헤헤. 들어가서 봐야 정확히 어떤 진법인지 알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정도의 기가 공급되는 진법이라면 만만치는 않을 것 같네요.”
송소걸은 진법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까 무림인들이 모여 있던 비동이 적벽대전과 관련 있다는 정보를 들었단 말이죠? 그곳과 가까운 이곳도 적벽대전과 아마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곳 진법이 지난한 시간을 유지해왔단 말이잖아요? 그렇단 말은 지금 눈앞의 진법이 엄청 고대의 진법일 가능성도 있고요? 그럼 당시에 이 정도의 진법을 설치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흐음…….”
찬호는 송소걸의 말에 인상을 썼다. 잘 추측이 되지 않아서이다.
송소걸은 그런 찬호의 모습에 장난을 치려다가 찬호의 날선 분위기를 읽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흠흠. 형님. 혹시 제갈량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제갈량?! 와룡선생 제갈공명?”
찬호가 깜짝 놀라했다. 옛 삼국시대의 제갈량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인이었고 진법에 매우 능하다는 것도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제갈량이 설치한 진법이라면 그 파훼법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마음에 더욱 조심하는 거죠. 그냥 생사문(生死門)이 있는 진법일 수도 있다 해서 조심하는 게 아니라구요.”
“흐음…….”
송소걸과 찬호가 열심히 고민을 하던 때 조용히 둘을 지켜보던 천애랑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기… 애들아. 내 눈에 진법의 길이 보인다면 믿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