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26화
‘저들을 상대하면서 구경할 여유까지 있었던가?’
천애랑은 남자의 경지가 생각보다 높을 것이라 짐작했다.
천애랑은 남자를 보며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아름다운 검술이었습니다.”
“하하! 작은 재주요. 그대가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긴 하구려.”
남자는 천애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천애랑은 눈앞의 남자를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묘한 매력을 가진 남자였다.
‘적을 벨 때는 가차 없었는데 평상시엔 이런 모습인가.’
넉살이 좋아 보이지만 사람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표두가 조심히 다가왔다.
“표두 추상운이요. 그대들 덕분에 우리 모두 목숨을 구했소. 표국을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겠소이다. 행수도 그리 생각할 것이오.”
표두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행수가 혼이 나간 표정으로 창백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산적두목 앞에선 대범하게 소리치더니 많이 긴장했었나 보다.
“견문이 짧아 그대들과 같은 고수를 미리 알아보지 못한 것이 민망하외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나 눈이 번쩍 뜨이는 검술과 적수공권이었소. 무인으로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지만 보다시피 상황을 수습해야 해서 잠시 자리를 비우겠소.”
표두가 정중히 포권으로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남은 표사들과 짐꾼들에게 지시해서 죽은 일행의 시신과 흩어진 말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천애랑은 표두가 꽤나 냉철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흑검의 남자 또한 천애랑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천애랑을 보며 말했다.
“표두라는 자, 듬직한 이로군. 그나저나 통성명이나 합시다. 내 이름은 찬호라고 하네만 그대는?”
“천애랑입니다.”
“반갑소. 내 생전 그렇게 발경을 잘 쓰는 이는 보지 못했는데 대단했소이다. 그런데 내공도 없이 쓰는 것 같던데?”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천애랑의 말에 찬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사람에겐 하나쯤 복잡한 사정이 있는 법이지. 괜한 거를 물은 것 같아 미안하오. 그나저나 나이가 어떻게 되오?”
“약관을 막 벗어났습니다.”
천애랑의 대답에 찬호가 반갑다며 박수를 쳤다.
“오! 나랑 동갑이구만! 하하! 이런 연이 있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거기다 나이도 같다니 이리 반가울 수가! 우리 친구처럼 호칭을 편하게 하세.”
그의 거침없는 언사에 천애랑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그의 재촉하는 듯한 눈빛에 천애랑은 삐그덕 대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지.”
“하하하! 그래, 세상 이것저것 따지면 피곤해서 못 살지. 내 존댓말보다 반말이 익숙해서 말이야. 하하하.”
“어, 어……. 그래.”
“아휴. 여비나 벌어볼까 싶어 표행에 참가했다가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그나저나 자네는 그런 실력으로 왜 짐꾼을 하고 있었던 겐가?”
“나도 여비를 벌려고 했는데 짐꾼 자리가 비었다기에 짐꾼을 했지?”
천애랑의 말에 찬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재밌는 친구로구만. 그런 실력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내가 아는 허영심 가득한 이들과는 전혀 달라. 하하!”
좀 전까지 무섭게 검을 휘두른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게 찬호는 밝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라는 단어를 듣는 것은 처음이네.’
짧은 단어였지만 순식간에 관계를 가깝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천애랑은 문득 할아버지와 친우 관계였던 마충이 떠올랐다.
‘그들도 이런 식으로 친구가 됐을까.’
* * *
표두의 기민한 통솔로 빠르게 수습된 표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좁은 산길을 지나 평지가 나오자 사람들은 안심했다. 아무래도 넓은 평지에선 산적의 기습이 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정신을 차린 행수와 표국의 식구들이 천애랑과 찬호에게 감사를 전했다.
행수는 표두의 조언을 듣고선 찬호와 천애랑에게 천하백대고수에게 주기로 했던 금액의 일부를 나눠 주기로 했다. 목숨을 구해준 값이자 남은 표행을 부탁하는 계약이기도 했다.
당장 찬호와 천애랑이 이탈한다면 붙잡을 재주도 없었고 표행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돈이 필요했던 천애랑과 찬호는 굳이 행수의 제안을 마다하지 않았다.
표행은 물과 풀을 구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해 야영을 준비했다. 아직 해가 쨍한 낮이었지만 심신이 지친 일행들은 조금은 빨리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남은 여정을 위해서라도 적당한 휴식은 꼭 필요했다.
크게 도시로 돌아 제대로 심신을 정비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약속된 표행 날짜를 벗어날 것이 분명해 행수와 표두는 고심 끝에 애초의 계획대로 산길을 넘어서 쭉 내려가기로 했다.
그리고 표물이 말들이기에 건초 등 식량을 구하기에 마을보다 산과 초원이 더 용이한 것도 계획에 작용됐다.
지점이 위치한 석가장까지 빠르면 닷새 안에 도착할 수 있으니 조금만 고생하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지점엔 상시 대기 중인 표사들이 있으니 그들과 합류하면 보다 안전한 표행의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천애랑과 찬호, 표두 추상운은 사람들이 야영을 준비하는 동안 짧은 담소를 나누었다.
천애랑은 기회가 난 김에 궁금했던 점을 표두에게 물어봤다.
“한데 제갈세가라면서요? 제갈세가를 위한 일을 하는데 왜 제갈세가의 무공을 배우지 않았어요?”
천애랑의 말에 표두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갈세가처럼 이름 좀 있다 싶은 무가(武家)에선 자신의 무공을 함부로 유출하지 않는다네. 그리고 난 어찌 보면 용병과도 같으니…. 쓰다가 쉽게 버릴 수 있는 패인 거지.”
“어찌 보면 자신의 사람들인데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까?”
천애랑의 불편한 감정에 추상운은 고마운 감정을 느꼈지만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바닥이 다 그렇다네. 물론 무한표국 본점에는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표사의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뿐이야. 무공을 전수해주거나 그러지는 않는다네. 우린 그저 그들의 외부업무를 대행해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궁극적으로 자기네들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하아…….”
천애랑은 세상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기적이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제갈세가라는 이름이 엮여 있는 것에 비해 표사들이 너무 약하다 생각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표행이라는 것에 오늘 같은 일이 흔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표두와 표사 실력으론 그저 자신의 목숨을 운에 맡기고 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천애랑은 제갈세가가 좀 더 신경을 쓴다면 이런 사람들의 생존률이 더 높아질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애랑, 개인은 착할 수가 있어. 하지만 집단은 착할 수가 없지. 이것은 세상의 진실이야. 너무 세상을 어둡다고만 생각하지 말게.”
찬호의 말에 추상운은 동조의 고개를 끄덕였고 천애랑도 찬호를 보며 쓰게 웃었다.
“고마워. 세상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 같아.”
“맞아. 세상은 무수히 많은 인간들의 삶이 모인 것이라네. 내 개인의 삶도 알 수 없는 판에 어찌 그 많은 사람들의 집합을 이해할 수 있겠어. 그저 순간순간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며 살면 되는 것이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면 최고일 것이야.”
말을 하는 찬호의 눈이 우수(憂愁)에 가득 찼다.
천애랑은 찬호가 죽은 연인을 생각함을 알고 측은하게 바라봤다. 짧은 이동시간 동안 찬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찬호는 연인의 죽음을 겪고 1년 넘게 방황을 하고 있다 했다. 천애랑도 할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라 그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니 둘은 금세 가까워졌다.
“자네의 식견이 놀랍기 이를 데가 없구만. 이 즐거운 담소를 이어가고 싶지만 난 표행을 관리하러 가보겠네. 그럼 말한 대로 자네들이 경계를 서 주겠나. 좀 더 대우를 해주고 싶지만 인원이 부족해서 말일세.”
표두가 찬호와 천애랑에게 경계를 부탁했다.
“그러지요.”
“알겠습니다.”
찬호와 천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찬호와 천애랑의 경계임무는 시작과 동시에 변수를 맞이했다.
천애랑과 찬호, 표두가 있는 곳으로 한 남자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뛰어왔다.
남자는 온몸이 상처와 피로 가득했는데도 다급한 일이 있는 것인지 경황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추상운이 대표로 나서서 말하자 남자는 추상운이 이곳의 책임자처럼 보여 기다시피 다가왔다.
“지금 저희 마을에 이상한 놈들이 쳐들어와 마을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무사님들 도와주십시오!”
남자의 필사적인 외침에 표두 추상운은 고심에 빠졌다. 지금 표국도 큰 위기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 행수가 다가왔다.
“마을의 위치가 어디요?”
남자는 희망을 얻은 듯 피를 토할 것처럼 말했다.
“여기서 한식경(30분)만 가면 됩니다!”
남자의 말을 들은 행수는 고개를 흔들며 표두를 봤다.
“안 되겠소. 자리를 옮겨야겠소. 한식경밖에 안 걸리는 위치에 위험이 있다면 더 멀리 피해서 자리를 잡아야겠소.”
말을 한 행수는 주위의 분위기가 껄끄럽게 변하자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여기엔 무공 하나 모르는 일꾼들이 더 많소. 나도 당연히 마음이 아프네만 혹여 표사들이 저 남자의 마을을 구하러 간 사이 우리는 어떻게 되겠소? 우리의 위험은 어찌하고? 또한! 거기에 얼마만큼의 적들이 있을 줄 알고? 여기 일꾼들도 다 가족이 있는 몸이라오. 무사히 표행을 마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오.”
“크흠…….”
표두는 행수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고뇌에 찬 표정을 지었다.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포함해 표행의 모두가 지쳐있었다. 특히나 표사들은 모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에 지금은 도와줄 여력도, 능력도 없었다.
표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미안하네. 도와줄 여력이 되지 못하네…….”
“무사님들! 마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 가족들이, 이웃들이 죽어간다고요!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오!”
남자가 절규하며 소리쳤다. 야영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천애랑과 찬호가 동시에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저 혼자라도…….”
“내가 가보겠소.”
시선을 마주친 둘은 마음이 통한 듯해 얕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찬호가 말을 했다.
“저 마을주민이 말하는 위험이 가까이 있다면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표행에게도 좋을 것이오. 전투를 치르더라도 여러분들 가까이에서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는 것이 낫겠지. 만약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는 자들이 고수라면 한식경 거리는 지척일 뿐이오. 이곳 평지가 기습에 취약하기에 경계가 용이하다지만 달리 말하면 대놓고 들어오는 공격엔 속수무책 몸을 숨길 곳이 없다는 것과 같소.”
행수와 표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찬호의 말을 경청했다. 찬호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찬호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마을주민에게 물었다.
“적이 몇 명이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을 사람들을 지키며 적과 싸우고 있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자가 적들을 보며 운남십귀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운남십귀(雲南十鬼)!”
표두 추상운이 크게 놀라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