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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25화 (25/200)

기공술사 25화

그는 표사의 진형에서 이탈해 산적들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표두와 다른 표사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모으는 걸 보니 표국 차원에서 계획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모두들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지키시오. 내가 최대한 길을 열어볼 것이니.”

앞으로 나선 표사는 짧은 당부와 함께 덤덤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검(劍)을 뽑았다. 그 검의 손잡이와 검신이 완벽한 흑색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검(劍)은 수십, 수백 번의 연마 과정을 거치면 검 날 자체가 저리 온전하게 짙은 흑색을 띠진 않았다. 아마 광석 자체가 희소한 것인 듯했다.

어느덧 산적들의 중심 가까이 다가간 남자는 산적들을 포함한 모두의 주목 속에서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가장 가까운 산적과도 거리가 있었기에 어느 누구도 그가 공격을 할 거라는 예상을 못 했었다.

쉬익---

매우 얇은 파공성만 남기고 검신은 선이 되어 반대편에 도달했다.

남자의 몸도 검의 진행과 함께 어느덧 산적의 지척까지 도달해 있었다.

남자의 너무도 빠르고 자연스러운 몸짓에 그런 행동들이 당연하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어진 상황은 현장의 착각을 순식간에 깨트렸다.

“크헉!”

산적 하나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것이다. 산적의 목에서는 피가 거칠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엄청난 쾌검이었다.

현실감 없는 수준의 쾌검에 현장의 모두는 산적의 죽음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제일 먼저 상황을 인지한 산적두목이 소리를 쳤다.

“쾌검의 고수다! 방어에 집중하며 합공을 해라!”

그래도 녹림이라는 산적들은 훈련이 잘 돼있는 것인지 두목의 말에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순식간에 10명이 넘는 산적들이 촘촘히 포위하며 합공하자 흑검의 남자는 위기에 처해 보였다.

그러나 남자의 표정과 행동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차르륵!

남자의 검이 가늘게 흔들리며 방울뱀 같은 소리를 냈다.

차악!

남자의 옆으로 다가오던 산적 3명의 목이 피분수를 뿜었다.

‘깔끔하다.’

천애랑은 남자의 검술을 보면서 다른 무엇보다 깔끔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검의 독특한 흔들림과는 다르게 검의 궤적은 깔끔한 선이었다. 저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고된 수련의 흔적이 보였다.

천애랑은 딱히 검을 수련한 적은 없지만 권법 등을 수련할 땐 정확한 하나의 움직임을 위해 수도 없이 고련을 했었기에 저 남자의 수련상태가 짐작이 됐다.

“이 새끼가!”

부하들이 허망하게 죽어나자 산적두목이 참지 못하고 거대한 도를 휘둘렀다. 강맹한 도기(刀氣)가 어렸다.

아무리 부하 산적들의 견제가 있었다지만 저 도격에 절정의 천하백대고수가 열 합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었다.

부우웅!

거대한 근육과 거대한 크기의 도에서 오는 압력이 엄청났다.

하지만 흑검의 남자는 그런 도를 우습게 여기듯 한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캉!

남자의 얇은 검이 산적두목의 거대한 도를 가볍게 받아냈다.

남자는 이내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거대한 도면을 쳐내면서 몸을 회전시켰다.

빠각!

자연스럽게 몸을 회전시키면서 들어간 발차기가 거구의 산적두목을 일장(3m)이나 밀어냈다.

‘대단하다.’

천애랑은 유려한 남자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최근 자연체와 발경 등의 무리(武理)에 심취한 천애랑의 눈에 남자의 몸놀림이 인상적으로 들어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도기(刀氣)를 받아내는 찰나의 순간만 남자의 검에서 더 정련된 검기(劍氣)가 나타났다 사라진 것이었다.

극상의 내기 운용실력이었다.

‘저런 식은 생각 못 해봤는데 대단하다. 내공 효율이 좋겠는데?’

밀려났던 산적두목이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로 목을 두드득 거리며 일어났다.

산적두목은 분노 가득한 살기를 풍기며 흑검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산적두목이 아낌없이 내공을 끌어올리자 주위의 나무와 지반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 모습에 다른 표사들과 표행의 식구들이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이는 부하산적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하 산적들은 흉신악살처럼 변한 두목의 얼굴을 보며 살며시 자리를 멀리했다. 이럴 때 괜히 옆에 있다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가락 하는 놈이구나. 녹림의 도왕(刀王)이 친히 네놈의 목숨을 거둬주마.”

꽤나 거창한 별호였다.

산적두목의 엄청난 기세에도 불구하고 흑검의 남자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산적두목을 비웃었다.

“그렇게 약해서야 가당키나 하겠냐.”

남자의 조롱에 산적두목은 더욱 분노하며 엄청난 속도로 도를 위에서부터 내리쳤다.

태산압정(泰山压顶).

날붙이 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식(式)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단순한 방법이지만 경우에 따라선 엄청난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검보다 날이 두껍고 넓으며 휘두르는 것에 특화된 도(刀)의 경우엔 태산압정이 매우 강한 초식 중 하나였다.

지금의 산적두목처럼 엄청난 무게의 도를 거력으로 내려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게 막대한 중압감과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흑검의 남자가 피할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남자는 오히려 산적두목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순간적인 폭발력이 굉장한 경신법이었다.

산적두목의 내려치는 도보다 빠르게 품으로 파고든 남자는 산적두목의 손목을 밀치듯 틀어버렸다.

“크학!”

관성이 부서지면서 생긴 극심한 통증과 함께 산적두목이 바닥을 굴렀다.

볼썽사납게 쓰러진 산적두목이 이를 가는 소리가 산을 울렸다.

“으아아악! 반드시 죽인다! 모두 눈치 보지 말고 당장 다 죽여!”

산적두목의 명에 결투를 지켜보던 산적들이 화들짝 놀라며 패를 나눠 움직였다.

산적들의 절반이 흑검의 남자에게, 나머지가 표행을 향해 달려왔다.

산적두목과 흑검의 남자의 결투 때문에 소강상태가 되었던 현장이 순식간에 전장으로 급박히 변했다.

“하압!”

표두가 산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특이하게 좌수(左手)에 역수검이었다.

천애랑은 주변을 경계하며 표두의 검술을 힐끗 견식했다.

역수검이 좁은 공간에서 짧은 회전력과 연타가 용이해 효과적이라 들었는데 지금 표두의 공격이 딱 그러했다.

“크윽!”

표두의 검식에 산적 하나가 쓰러졌다.

내력은 약해 보이나 강한 회전력을 통해 방어와 공격을 부드럽게 이어가는 표두의 공격이 인상적이었다.

표두의 선방에 산적 하나가 큰 피해를 입자 다른 표두들도 용기를 얻고 표두와 같이 산적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커헉!”

그러나 얼마 못 가 표두와 달리 실력이 많이 부족한 표사 한 명이 산적의 눈먼 검을 맞고 쓰러졌다. 흑검의 남자와 함께 새로 고용된 표사였다.

표사의 죽음으로 인해 넓어진 틈으로 산적의 공격이 더 거세게 파고들었다.

천애랑은 표사들의 전장에 참여해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산적들은 표사들 뿐 아니라 짐꾼들도 노렸기 때문이었다.

그때 천애랑의 시야에 근처의 짐꾼에게 다가오는 검이 보였다.

천애랑은 짐꾼을 등 뒤로 밀치면서 산적의 검면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파고들었다.

천애랑은 회전력을 이용해 팔꿈치로 산적의 턱을 강력하게 날렸다.

흑검의 남자와 표두가 했던 것을 비슷하게 따라 한 것이었다.

빠각!

턱을 정통으로 맞은 산적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짐꾼들을 공격하려던 주변 산적들의 이목이 천애랑에게로 집중됐다.

“모두 제 뒤로 물러나시고 본인 몸만 지키세요!”

천애랑은 이때다 싶어 크게 소리쳤다.

당황하던 짐꾼들이 천애랑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행수를 데리고 물러났다.

말이 물러난 것이지 좁은 산길에 표물들까지 있으니 그저 서로 등을 맞대고 최대한 밀집한 것뿐이었다.

천애랑은 자신이 산적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짐꾼들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천애랑은 적극적으로 산적들의 진형 속으로 달려갔다.

“크아압!”

“죽어라!”

갑작스런 천애랑의 돌진에 화들짝 놀란 산적들이 고함을 지르며 공격을 해왔다.

천애랑은 이들의 공격을 보면서 일전에 만났던 일장과 그 형제들을 떠올렸다.

그 형제들은 산적이 된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는데 이들은 뭔가 다른 것 같았다.

모두 작게나마 무공을 익혔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고 그런 무공을 은원이나 처절한 생존 때문이 아닌 순수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쓰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을 헤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고 지금도 아득바득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천애랑은 온몸의 긴장을 풀고 다가오는 산적의 검에 손을 뻗었다.

터엉!

연이어 합공으로 찔러 오는 대여섯의 검에도 손을 뻗었다.

터엉! 텅텅텅텅!

천애랑의 손짓 하나하나에 착실하게 검들이 튕겨 나갔다.

“크윽! 무슨 사술을?!”

“으윽!”

산적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천애랑의 활약에 표사들을 공격하던 산적들의 이목이 더욱 확실하게 모여들었다.

천애랑은 더욱더 산적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발경(發勁).

“크허헉!”

“크아아아악!”

완벽한 신체의 균형, 완벽한 근육의 움직임, 완벽한 힘의 이동, 그 흐름들이 닿는 곳마다 고통스런 비명이 토해졌다. 간간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산적들도 있었다.

천애랑의 발은 느릿했으나 정확했으며 손은 부드러웠으나 파괴적이었다. 순식간에 열이 넘는 산적들이 천애랑의 손에 쓰러졌다.

“으아악!”

천애랑은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비명에 다급히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아…….’

흑검의 남자가 막 산적두목의 심장에서 검을 빼내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산적두목을 포함해 20명이 넘는 산적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표사들가 싸우던 몇몇의 산적들이 표두와 표사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으으…… 도망가!”

아직 살아있는 산적들이 상황파악을 하고선 다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목도 쓰러지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건가.’

천애랑은 도망치는 산적들을 바라봤다.

쫓아가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내공이 없어 경공술을 못 쓰니 무리였다.

천애랑은 몸의 긴장을 천천히 풀면서 근육을 이완시켰다.

지난 1년 동안 화란의 치료 외 남는 시간엔 육체적 단련에 많은 공을 들였었다.

내공 없이도 빨리 움직이는 방법이나 근육을 쓰는 방법 등 현재에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아무리 발경을 써도 늑대와 전투를 치른 후처럼 근육에 큰 후유증이 오지 않았다.

그때 흑검의 남자가 천애랑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무심하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착검을 했다.

천애랑은 다가오는 흑검의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는 굵은 눈썹에 푸른 눈, 굵직한 선의 시원시원한 외모와 강인한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다.

“실력이 상당하오. 재밌는 구경을 했소이다.”

다가온 남자는 천애랑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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