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공술사-24화 (24/200)

기공술사 24화

의각원에 잔치가 열렸다.

1년 만에 돌아온 천애랑과 화란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의각원의 인물들이 천애랑에게 충성맹세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달빛 아래 거대한 모닥불이 그림자를 토닥이며 흥겨운 사람들을 흔들었다.

“으하하! 정말 치료가 되다니! 가주님은 기적의 명의십니다!”

거나하게 취한 원생이 천애랑에게 붙으며 고래고래 말했다.

천애랑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하춘이라고 했던가?’

진법에서 막 나왔을 때 마충과 함께 있던 원생이었다.

“가주님. 우리 화란 언니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이런 날에 한 잔 받으시지요.”

‘추연, 추담 남매라 했던가.’

천애랑은 원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가주님! 가주님은 의술의 지평을 넓힌 분입니다. 존경합니다!”

덩치가 제법 큰 이 자의 이름은 춘석. 무술을 배우면 잘할 것 같은 골격이었는데 추나요법의 달인이라고 했다.

천애랑은 피식 웃었다.

원생들이 순배 돌 듯 차례로 인사를 해왔는데 모두 진심으로 화란의 치료를 축하하고 감사를 표하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순수하게 다른 이를 위하고 사랑해주는 이들을 보니 참으로 마음이 흡족했다.

화란이 무사히 영약을 취하고 환골탈태를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1년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진심 어린 마음들이 더해지니 더 큰 보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이들이 기공가라는 품에서 한 가족이 됐다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이렇게 좋은 날에 내 시 한 수 읊어 흥을 돋우겠네.”

마 의원이 불콰해진 얼굴로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옛 친구는 이 황학루에서 이별 고하고

꽃피는 삼월에 배 타고 양주로 내려갔네.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아득히 하늘에 닿은 장강물뿐이어라.

마 의원은 운율이 느껴지는 시를 읊었는데 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할아버지를 추억하시는 건가.’

“좋다~!”

원생들이 마 의원이 시에 호응하며 술병을 높이 흔들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던 마 의원이 환히 웃으며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천애랑도 흥이 돋아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이 좋은 날 가주가 빠질 순 없지요!”

천애랑이 옷깃을 펄럭이며 무공을 펼치듯 춤사위를 폈다. 부드러우나 강인함이 느껴졌다.

천길 우뚝 선 벼랑 위에 서서 옷깃을 휘날리노라!

만 리 흐르는 강물에 발을 씻노라!

대장부로 태어나 이런 기개와 절도가 없을 수 없도다!

바다는 광활하여 물고기 뛰어놀 수 있도록 하고

하늘은 텅 비어있어 새들 나는 대로 맡겨둔다.

대장부로 태어나 이런 도량이 없을 수 없도다!

가문의 복수와 인과에 대해 고민을 할 때 담대혁이 대장부의 기개에 대해 알려준 시였다.

천애랑의 나부끼는 검은 옷자락과 듣기 좋은 목소리가 어우러지자 달빛 아래 하나의 수묵화를 보는 듯했다.

“가주님 최고다!”

흥이 돋은 원생 몇몇은 천애랑에게 모여 함께 춤을 췄고 몇몇은 감동해 눈물을 흘렸다.

화란도 이 광경을 함께하며 행복한 눈물을 흘렸다.

*  *  *

그간의 회포를 풀다 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천애랑은 마 의원과 함께 앞으로의 행방에 대해 논의를 했었다.

당장의 근거지가 없는 천애랑이었기에 의각원은 현재의 자리에 머무르기로 했다.

대신 추후 터전을 마련하게 되면 옮기기로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그동안 의각원은 훗날 천애랑이 세상을 날아오를 때를 대비해 내실을 다지고 있기로 했다.

“애랑, 네가 가주이긴 하나 아직 덜 여문 꽃봉오리에 불과하단다. 좀 더 세상을 경험하고 많은 인연들을 만들어야 가문을 부흥시킬 수 있고 더 나아가 복수를 할 수 있을 게다.”

의각원이 천애랑을 가주로 섬김에 따라 모두 천애랑에게 존칭을 사용하게 됐다.

이는 마충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선 천애랑의 고집으로 마충과의 호칭이나 관계 모두 할아버지처럼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표국을 말씀하신 건가요?”

“그렇지. 표국을 통해 다양한 지역과 상황들을 경험할 수 있고 그들의 안목들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네가 말한 돈도 벌 수 있고 말이지. 그나저나 정녕 돈을 가져가지 않을 셈이냐. 네 여비 정도는 줄 수 있다만?”

마 의원이 걱정스레 쳐다봤다.

천애랑은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표국이면 해결되겠네요.”

천애랑이 의각원의 금전 걱정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는 의각원생들의 훈련에 따른 막대한 진법유지 비용 때문이었다.

대자연의 기에 많이 노출되어야 하는 기공가 훈련의 특성상 화란을 위해 만든 진법을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다만 그 진법을 이용할 인원이 많아졌기에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의각원은 주 수익원인 외부활동을 줄이고 철저히 내실을 다질 때였기에 가진 돈으로 진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었다.

그렇기에 천애랑은 극구 의각원의 돈을 사양했다.

옆에서 화란이 아쉬운 표정으로 천애랑을 쳐다봤다. 화란은 천애랑의 여정을 따라나서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애랑을 제외하면 화란만이 원생들에게 기공가의 심법을 가르칠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화란은 어쩔 수 없이 의각원에 남아있기로 했다.

많이 아쉬워하는 화란을 보며 마충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간 보낸 시간 때문인지 천애랑과 화란이 많이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조심하거라 애랑아.”

마충의 말은 걱정이었지만 표정은 따뜻함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예. 걱정 마세요.”

“부디 안녕(安寧)하셔야 합니다.”

화란이 곱게 손을 모아 읍을 했다.

천애랑이 밝게 웃었다.

“그간 고생 많았어. 화란.”

화란의 눈이 촉촉해지자 천애랑이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어느새 주변에 모여든 원생들과 인사를 나눴다.

천애랑은 마을 입구까지 그들의 안내를 받으며 다시 세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표국.

의뢰를 받은 표물을 목적지까지 배달해주고 돈을 버는 장사집단이다.

표물엔 사소한 것부터 사람까지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옮기는 일을 하는데 주로 상단에서 의뢰가 들어온다.

보통은 의뢰인들이 물품을 표국에 가져와 의뢰하면 표국이 표행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간혹 표국이 직접 표물을 가지러 가서 목적지까지 배달하는 총괄적 업무도 수행하기도 했다.

무한표국.

무한표국은 호북 무한의 제갈세가가 운영하는 무한상단의 하청업체였다.

이곳 무한표국 석가장 지점은 무한표국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대신 비교적 안정적으로 무한상단의 주문을 이행하며 그 대금을 받는 지점들 중 하나였다.

지금 무한표국 석가장 지점은 말을 구하기 위해서 장가구에 들렸다가 표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천애랑은 이 무한표국 석가장 지점 표행의 짐꾼으로서 작금의 상황에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다.

“크하하하! 곱게 가진 것들을 내놔라!”

못해도 40명은 돼 보이는 산적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위협을 하고 있었다.

산적두목의 앞에는 목이 베인 채 눈도 못 감고 죽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사전에 듣기론 쓰러진 남자는 천하백대고수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산적 두목과 산적의 협공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천하백대고수의 실력에 기대하던 천애랑은 실망했다. 차라리 백두산에서 만난 살마는 물론이고 살마단의 몇몇 인물들이 더 강할 것 같았다.

당황하는 천애랑만큼이나 표행을 책임지는 행수 피만두도 매우 놀라고 있었다.

지금 표물인 몽고말들은 강남의 몽고인들이 웃돈을 주고 특별 주문한 매우 값비싼 말들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급한 표행은 하지 않을 터였지만 상대방이 약속한 대금이 워낙 크기도 했고 성공 시 추후 독점 계약의 이야기도 나와서 행수 피만두는 표행을 강행했었다.

다만 급히 석가장 지점에서 출발한 터라 표사들이라고는 새로 고용한 두 명을 포함해 총 다섯 명뿐이었다.

그래서 확실한 호위를 위해 거금을 들여 천하백대고수 한 명을 고용한 것이었다.

물론 많은 돈이 들었지만 표행만 무사히 완수하고 대금을 받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피만두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제갈세가에게 수수료를 주면서까지 무한표국이라는 이름을 빌리는 이유 중 하나는 표행 중 제갈세가라는 이름을 등에 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산적들은 무한표국이라는 깃발을 보고서도 다짜고짜 공격을 해왔다.

이런 경우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산적들이 무지(無知)하거나 아니면 제갈세가 따윈 상관없이 이곳의 사람들을 살인멸구 하거나.

이러한 점을 느낀 행수가 두려운 표정을 감추며 산적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귀하들은 뉘신데 제갈세가의 표행을 방해하시는 겁니까!”

“크하하하! 감히 대 녹림의 어르신들 앞에서 제갈세가의 이름 따위가 통할 성싶으냐! 이제부터 산의 주인은 우리 녹림이니 순순히 표물을 내놓거라!”

행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들의 표행의 인원은 표사 5명과 짐꾼들을 포함해도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적은 40명이니 실력 차이를 떠나 숫자부터 상대가 안 됐다.

그리고 천하백대고수를 죽인 적이니 실력 차이를 논하기도 무색했다.

또한 자신들은 산길에 표물인 말들과 함께 밀집되어 있었고 저들은 경사진 산에 펼쳐져 포위하고 있었다.

지리적인 전술적 측면에서도 필패였다.

“크흠흠……. 제 안목이 짧아 대협들을 못 알아 뵈었습니다.”

행수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섭섭지 않게 사례를 하겠으니 대협들께서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행수는 생각했다. 가진 은전, 금전 다수를 상납하더라도 이 표물들만 지키고 무사히 표행을 마친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라고.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천하백대고수에게 후불로 지불하기로 했던 계약금이 남았으니 절대 손해는 아니라고.

하지만 상황은 행수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크하하! 쥐새끼 같은 게 어디서 수작질이냐! 우리들이 대협인 걸 알아봤으니 썩은 안목은 아니다만 내 너희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느니라! 모두들 처리해라!”

산적두목의 명에 산적들이 포위를 좁혀왔다. 모두 무공을 익혔는지 경사진 산길을 능수능란하게 타고 있었다.

행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산적두목과 산적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다 죽게 생긴 것이다.

그런 행수의 옆에 표두 추상운이 다가오며 굳은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행수. 가능할지는 모르나 우리들이 길을 뚫겠소. 표물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짐꾼들과 도주를 하시오.”

행수가 표두와 표사들을 보니 죽음을 각오한 표정이었다. 행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으윽! 망했어. 다 망했다고!”

그때 갑자기 짐꾼 하나가 대열에서 이탈해 혼비백산 도망쳤는데 길목을 지키던 산적 하나가 가차 없이 검으로 베어 죽였다. 갑작스런 행동이라 어찌 말리고 할 틈이 없었다.

죽은 짐꾼의 모습을 보고 남은 짐꾼들의 분위기가 차갑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표두는 사기(士氣)가 꺾이는 일행들을 보며 크게 소리를 쳤다.

“모두 죽을 각오로 임해라!”

표두의 외침에 표사들이 정신을 차리며 검을 뽑았다.

‘세상은 정말 평온할 날이 없구나.’

천애랑은 이 모습들을 보면서 세상은 정말 혼란이 가득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자신에게 피의 운명이 있는 건지 무림이 원래 이런 곳인지 모르겠으나 세상에 나오기만 하면 싸움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천애랑은 한숨을 쉬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나서려 했다.

아무리 내공이 움직이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이들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서지 않는다고 저들이 살려둘 것 같지도 않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 천애랑보다 먼저 나선 이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