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23화
천애랑은 주술석과 진법의 상태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선 말했다. 지체하지 않고 치료를 위한 수련을 시작할 셈이었다.
“우선 둘만 있는 거니까 면포는 벗고 편히 지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간 해왔던 것처럼 기공가의 심법을 먼저 수련할 겁니다. 특별할 건 없습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운기조식 할 겁니다. 알다시피 제게 배웠던 기공가의 운기법으로 합니다. 결과적으로 화란이 가진 기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2단계를 성공하는 겁니다.”
“네. 공자님.”
“후우. 그럼 시작하죠.”
천애랑의 말에 화란은 주술석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동안 익히고 있던 내공심법이 아닌 천애랑에게 배운 기공가의 심법이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하단전에 기를 담은 다음 천천히 탁기를 내뱉는 기존의 방식과 결은 같았다.
다만 기공가의 심법은 코로만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숨구멍으로 인식하고 흡기를 하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화란은 속으로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확실히 엄청난 효율을 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란은 왜 기공가가 그렇게 강했었는지 그 단편을 살핀 느낌이었다.
화란이 운기조식에 집중하는 것을 본 천애랑도 마주 앉아 운기조식 자세를 취했다.
여전히 내공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명상이나 심상훈련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 * *
순식간에 5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진법 안도 바깥 계절의 영향을 받기에 살랑이던 봄기운이 지나 푸르른 이파리가 만연했다.
가벼운 날숨과 함께 눈을 뜨는 화란의 기도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화란. 이 정도면 2단계는 통과했고 3단계도 발을 들였다고 봐도 되겠네요. 대단하세요.”
“다 천 공자님 덕분이죠.”
간만에 화란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섯 달의 시간동안 운기조식에 집중하고 천애랑의 조언이 더해지면서 화란의 내공은 일취월장할 수 있었다.
확실히 진법의 도움이 컸다. 안 그래도 대자연의 기운을 한가득 모아놓은 진법 안에서 그 기운을 더 집약시킨 공간을 이용하니 몇 배의 효율이 나왔다.
물론 화란의 오성이 매우 뛰어났기에 배움과 깨달음의 속도가 빨랐던 것도 있었다.
화란은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몸 내부의 기를 완벽히 느끼고 외부로 발출할 수 있게 되었고, 불과 얼마 전엔 대지의 결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직 내공을 결에 담을 정도의 숙련도는 아니지만 이 성장속도라면 시간문제일 것 같다고 천애랑은 생각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대지의 기운을 느끼는 게 익숙해지면 물, 바람 등 다른 기운들도 느껴야 합니다. 불의 기운까지 4개의 기운을 느끼게 되면 기본적인 모든 준비가 끝납니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화란의 씩씩한 대답에 천애랑이 밝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화란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 * *
다시 추운 칼바람이 스며드는 겨울의 풍취를 보면서 화란은 심호흡을 했다.
지난 1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공 운용만으로는 완숙한 절정의 경지를 수습함과 동시에 대자연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진법의 영향이 컸다지만 그 무엇보다 천애랑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운기조식을 하면 등에 손을 올리고 관조한 기운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아줬다.
항시 옆에 붙어서 대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그 그릇을 만드는 요령 등을 알려 주었다.
내공이 막혔다는 고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할 텐데 항상 밝은 미소로 응원을 해주니 너무도 대단하고 고마웠다.
이젠 마지막으로 오보현현신단을 섭취하고 내공의 벽을 넘는 것만 남았다. 단 한 번의 운기조식에 그간 노력의 결과가 달려 있었다.
화란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이랑 나란히 풍경을 구경하던 천애랑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긴 속눈썹과 현묘한 눈, 오똑한 코로 이어지는 매끈한 얼굴선과 피부, 자신이 뒤로 묶어준 장단발의 검은 머리카락까지. 지난 1년 동안 수없이 봐온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시선에 천애랑도 화란을 봤다.
“괜히 떨리네요. 하하. 그래도 화란이라면 분명 성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화란은 천애랑의 말에 미소로 화답했다.
그간 봐온 천애랑은 아름다운 얼굴보다 그 마음과 태도가 더 아름다운 남자였다. 항상 곧은 시선과 일관된 행동으로 많은 의지가 되었었다.
사형제들 빼고는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지내본 적도 없었고 당연히 남자와 단둘이 이리 긴 시간을 제한된 공간에서 보낸 적은 없었다.
1년이란 시간 동안 많이 친해지기도 하고 수련 상 신체적 접촉이 많아짐에도 천애랑은 한결같아 화란은 괜스런 심술이 나기도 했었다.
물론 천애랑의 곧은 태도에 따른 장난스런 마음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자로서 매력이 없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었다.
그래도 수(水)의 기운을 느낄 때엔 천애랑의 반응이 재밌긴 했었다.
수(水)의 기운을 느끼기 위해 연못에서 운기조식을 할 때는 옷을 입지 않았었는데, 항상 그때마다 천애랑이 눈을 둘 곳을 못 찾아 허둥지둥 대던 것이 떠올랐다.
피식.
화란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고이 마음속에 접어 넣고 몸을 돌렸다.
“공자님. 마음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초옥에 고이 놓아둔 작은 갑(匣)을 꺼내왔다.
“자세를 취하세요. 한 번에 끝내야 합니다. 그간의 배움을 잊지 마세요. 화란이라면 분명 성공할 수 있어요. 스스로를 믿으세요.”
화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고 두려운 순간이었지만 천애랑의 응원을 받으니 용기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천애랑은 화란의 각오 서린 표정을 보고선 밀봉된 갑(匣)을 열었다.
딸칵.
작은 경첩 음이 들림과 동시에 상쾌한 향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천애랑은 다급히 안에 담긴 오보현현신단을 화란에게 건넸다.
특수 제작한 갑(匣)에 영약을 보관하는 이유는 영약에도 유효기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공기 중에 오랜 시간 노출될 경우 영약에 담긴 효능들이 새어나가 효과가 감소된다.
물론 공기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급속도로 영약의 효력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화란에겐 한 톨의 가능성과 기적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화란이 오보현현신단을 재빠르게 입에 넣었다.
천고의 영약답게 입에 넣는 순간 상쾌하게 녹아들었다.
삼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도 않았지만 혀와 침에 녹으며 순식간에 몸 전체로 영약의 기운이 퍼져갔다.
화란은 천애랑에게 배운 대로 전신을 개방하며 대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내부에 들어온 영약의 기운을 운기 했다.
* * *
“스승님. 오늘도 나와 계십니까.”
“그냥 바람 쐴 겸 나왔다.”
마충은 단면이 잘린 나무둥치에 걸터앉아 진법을 바라보고 있었다.
1년 전 두 사람이 진법에 들어간 후로 마충은 매일의 일과처럼 아침, 저녁 한식경(30분)씩 진법을 바라봤다.
하루 이틀로 끝날 치료가 아님을 알지만 손녀가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마충이 적적할까봐 제자이자 자식 같은 원생들은 번갈아 가며 마충과 함께 했다.
식사도 가져다 드리고 다과도 나누면서 마충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은 원생들에게도 좋은 시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스승님이 생각하시기에 치료는 잘 되고 있을 것 같습니까?”
제자의 말에 마충은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그럴 것이라 믿는다. 내가 아는 기공가는 내공의 운용과 관련해서는 천하제일을 떠나 고금제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정도였습니까?”
마 의원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기공가가 세력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면 지금 무림의 판도는 확 달라졌을 게다. 더 나아가 국가의 정세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지.”
“허어어…….”
제자는 입을 턱 벌린 채 그저 감탄만 뱉어냈다.
그 모습에 마충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러니 믿어야지. 천단호 그 친구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은 기공가의 새 가주가 그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말이야.”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제 기대감도 더 높아집니다. 부디 화란이 치료에 성공했으면 좋겠네요.”
마충은 고개를 끄덕이며 ‘끙’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꾸나. 바람이 차구나.”
제자는 얼른 마충의 옆으로 가서 부축했다.
마충이 겉으로는 정정해 보이지만 그래도 그 나이 120세가 넘은 고령이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제자들은 언제나 스승인 마충을 걱정했다.
지금처럼 부축하고자 하는 행동도 스승의 건강이 걱정인 제자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그때 갑자기 진법이 울기 시작했다.
우웅---
마충과 제자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진법을 보았다.
우우웅---
마충은 눈을 비볐다. 1년간 매일 봐온 진법이 살짝 일렁이는 것 같았다.
우우우웅---
“어? 스승님. 진법이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제자의 반응을 보고서 마충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우우우웅------
진법이 크게 일렁이며 산들바람이 불었다.
그와 동시에 천애랑이 나타났다.
천애랑은 눈앞의 두 사람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떻게 아시고 나와 계셨어요?”
마충은 천애랑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로 나왔는지 물으려다가 당연한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마충은 떨리는 심장을 붙잡으며 뒤따라 나올 손녀를 기다렸다.
우우우웅------
또 한 번의 큰 일렁임과 함께 화란이 진법에서 빠져나왔다.
마충과 같이 있던 제자는 토끼눈을 하고 턱이 빠질 만큼 입을 벌렸다. 그리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 어어억! 스, 스승님……. 제 눈이 잘 못 된 건가요?”
제자의 정신없는 말에 마충은 대답할 수 없었다.
어릴 적 이후로 본 적 없는 손녀의 환한 미소가 빛으로 번지며 눈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그리고 사형 오랜만이에요.”
화란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마충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마충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살며시 닦았다.
마충은 더듬거리는 손길로 손녀의 얼굴을 살폈다.
화상에 주름진 흉터는 오간 데 없이 사라졌고 매끈한 피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간 화상자국에 가려졌던 미모 또한 빛을 내고 있어서 경국지색이라고 해도 무방할 미인이 앞에 있었다.
“화란아…….”
화란은 연신 흘러내리는 할아버지의 눈물을 보면서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예. 할아버지.”
“고생 많았다. 참으로 고생 많았어.”
진법 안에서의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그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인지는 몰랐으나 마충은 화란을 붙잡고 연신 눈물을 흘렸다.
한참 눈물을 흘리던 마충은 시선을 돌려 천애랑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의각원의 원주 마충. 기공가의 가주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다 늙은 몸이지만 남은 생 가주의 앞길을 위해 견마지로 할 것이니 1년 전과 생각이 변치 않으셨다면 부디 받아주시길 간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