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22화
기공가의 비전을 배우는 것이니 기공가의 식구가 되면 제일 큰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애랑의 말에 마충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개인의 범주면 늙은 목숨이라도 내놓겠지만 이는 의각원이 기공가의 품에 들어가는 문제였다.
의각원의 원주인 자신이 독단으로 결정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의각원을 그런 식으로 운영해오지 않았다.
물론 자신과 손녀인 화란만 기공가에 속해지고 다른 원생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게 할 순 있었지만 그것 나름의 문제가 있었다.
이곳 의각원에 모인 모든 이들은 마 의원 자신이 직접 거둔 고아들이었기에 자식들과 다름없었다.
그런 그들에게도 이런 내용을 논의하고 선택할 자격이 있었다.
“하루만 시간을 주겠니. 이 늙은이의 독단으로만 답을 내기엔 조심스럽구나.”
천애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할아버지.”
모든 대화가 끝났다 생각한 천애랑은 자리를 비키기 위해서 일어났다.
그러자 화란이 빠르게 면포를 쓰고선 함께 일어났다.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화란이 문을 열고 앞장서 천애랑을 안내했다.
마 의원의 방에서 나오자 그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천애랑은 즐거웠던 대화를 떠올리다 문뜩 느껴지는 시선에 주위를 보았다.
곳곳에선 낮보다 더 진한 시선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약을 달이며 보고 있었고, 어떤 이는 침구통을 들고 달려들 기세였으며, 어떤 이는 자그마한 칼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선 알 수 없는 광기가 비쳤다.
당장이라도 천애랑이라는 새로운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해보고 싶은 미치광이들 같았다.
천애랑은 실소가 나왔다. 의술에 미치고 새로운 환자들에 환장한다더니 그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연한 논의였고 불확실성이 많지만 만약 이들이 가문의 식솔이 되어준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의술은 무공만큼 익히기가 어려우면서 귀했고 무림인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은 더더욱 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생각했다.
마 할아버지야 눈빛을 보니 손녀를 위해서 간이든 쓸개든 빼줄 것 같은 의지가 있었지만 이들의 사정은 다를 것이었다.
그리고 화란의 치료 방법으로 환골탈태를 말했는데, 본인이야 쉬웠지만 다른 이들은 전설이라고 취급할 정도니 말은 다했다.
‘아마 제안은 무산되고 조만간 이곳을 떠나게 되겠지.’
천애랑은 마음을 가볍게 먹었다.
어차피 이곳을 방문하면서 치료에 대한 기대는 하지도 않았었다.
‘할아버지의 친우분을 만나 담소를 나눈 것만으로도 족하다.’
천애랑은 할아버지와 가문에 대해 몰랐던 이야기들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곳을 방문한 가치를 충분히 했다 생각했다.
천애랑은 여러 상념들을 정리하며 한 초옥 앞에 도착했다. 다른 초옥들과 똑 닮은 집이었다.
“비어 있는 방입니다. 손님이 올지 몰라 정리되어있진 않지만 딱히 정리할 것도 없어서 괜찮을 겁니다. 불편한 것이 있다면 편히 불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천애랑은 무림인의 인사법인 포권을 취해 감사를 표했다.
이에 화란은 천애랑에게 깊게 읍을 하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중간중간 보이는 원생들을 부르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회의를 하려는 것이겠지.’
천애랑은 화란의 말에 군말 없이 따르는 원생들을 보며 이곳에서 그녀의 영향력을 느꼈다.
천애랑은 분주해진 의각원의 상황을 일별하고 초옥 안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 * *
천애랑이 화란의 부름에 다시 마충을 만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 날은 의각원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이 모였는지 천애랑은 많은 면면들을 볼 수 있었다.
마충의 방에서 모이기엔 장소가 협소했기에 그 앞마당에 자리를 했다.
원생들은 마충을 중심으로 뒤에 시립했다. 마치 마충이 대표자 자격으로 천애랑을 맞이하는 모양새였다.
천애랑을 안내해준 화란마저 마충의 옆에 서자 마충이 입을 열었다.
“화란의 치료를 부탁하마. 그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약속하며 치료에 성공하면 애랑 너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야. 우리 의각원 모두가 기공가의 품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그의 행동과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천애랑은 놀란 눈으로 마충을 보았다.
솔직히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의견 취합이 빨리 됐을 줄은 몰랐다.
천애랑은 마충의 뒤에 시립한 원생들을 둘러봤다. 모두 밝은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화란 누님을 치료할 수 있다면 뭐든 좋습니다.”
“맞아요. 화란 언니 치료를 위한 거라고 하니까 저도 좋아요. 여자 의원의 역할이 필요하면 말하세요.”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치료법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치료를 연구하고 추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낙이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시오.”
“맞소. 도움이 필요하면 무조건 도울 테니 우리 화란이가 어릴 적처럼 다시 환히 웃을 수 있게만 해주시오.”
“그 치료와 결과가 너무 궁금해 미치겠소. 그래서 어젯밤엔 잠도 못 잤소. 꼭 돕고 싶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먼저 부르시오.”
스무 명이 넘는 원생들이 모두 도움을 주겠다고 응원을 했다.
천애랑은 그 모습에서 가족이라는 따뜻함을 느꼈다.
저들과 한 가족이 된다면 저 따뜻함이 여의주처럼 내 품에 안길 것 같았다.
반드시 치료에 성공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이들을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그런데 그에 앞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저……. 할아버지.”
마충은 원생들의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충이 천애랑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천애랑은 마충에게 말했다.
“그런데 제 진료 결과는 어떻게 된 거예요?”
“아?!”
마충이 놀란 눈을 했다.
‘화란은 왜 같이 놀래?’
보아하니 둘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눈치였다.
마충은 부채질하듯 손을 휘저으며 의각원생들을 돌려보냈다. 천애랑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한 번 마음먹은 것에 대해선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인지 얼굴에 일말의 그늘도 없이 각자의 일을 하러 갔다.
‘의원들은 자존심이 높다 들었는데…. 그리고 처음 본 누군가를 믿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천애랑의 생각이 무색하게 의각원생들은 오히려 삼삼오오 물러나며 그들끼리 치료의 기대감에 대해 수군거렸다.
‘치료에 미친 자들…….’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순식간에 덩그러니 남게 된 천애랑과 마충, 화란은 어제처럼 방에서 차를 마셨다.
마충은 차로 목을 축이고는 말을 시작했다.
“애랑 너의 기운이 워낙 천단호 그 친구와 흡사해서 어젠 잠시 흥분했었다.”
“괜찮습니다. 어찌 방도가 보이던가요?”
처음에는 전혀 기대가 없었지만 지금은 화란의 치료를 위해서라도 나름의 치료가 가능했으면 싶었다.
“내가 특별히 해줄 처치가 없단다. 아마 시간이나 깨달음이 필요한 것 같구나. 단호에게 어렴풋이 그런 현상을 들은 것 같은데 특별한 치료를 필요로 했던 것 같진 않구나.”
“흐음…….”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그랬다면 그런 것일 터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종래엔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라는 의미였으니 눈앞의 일만 신경 쓰면 될 터였다.
“알겠습니다. 화란…… 님? 소저? 낭자?의 치료는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허허허. 호칭이 그게 뭐냐.”
마충이 황당한 듯 웃자 화란이 나긋하게 말했다. 여전히 옥구슬처럼 청아한 목소리였다.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치료가 성공하든 아니든 큰 은혜를 입는 것은 마찬가지니 편히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리고 저는 가주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아, 아닙니다. 치료 동안엔 그냥 천 공자라고 불러주세요.”
“예. 공자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허허.”
마충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간단한 대화들 뒤로 천애랑과 의각원은 많은 준비를 했다.
우선 화란이 기공가의 심법 수련을 할 진법이 필요했다.
“내공을 집합시키는 진법이라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시간이 좀 걸리겠는걸?”
그리고 일 갑자의 내공을 만드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 영약도 필요했다.
“이론상 최대 일 갑자 가까이 얻을 수 있는 오보현현신단이 하나 있긴 하단다. 이걸 단호 그놈에게 자랑하려고 했었지.”
그리고 무엇보다 수련을 할 화란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했다.
“운기조식을 하는 것을 지켜봐도 되겠습니까?”
“천 공자님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의각원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천애랑의 요청과 지시에 따랐다.
그중 화란은 절대적이라고 할 정도로 신뢰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지나고 새싹이 빠끔히 눈치를 보는 계절이 오자 화란의 치료를 위한 진법이 완성되었다.
의각원 내에서도 가장 외부의 간섭이 없고 자연의 기가 잘 흐르는 장소에 엄청난 공을 들여 진법을 설치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숲처럼 보였지만 그 내부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완성된 진법 앞엔 의각원의 모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진법 안에 들어갈 천애랑과 화란을 응원하고자 함이었다.
많은 의각원생들은 따라 들어가서 치료를 견식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진법의 유지라는 문제 때문에 출입 인원이 제한됐기 때문이었다.
진법이라는 것은 자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행위이다.
그런 행위를 위해서 보통은 주술석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하는데, 그 이름처럼 평범한 돌이 아닌 영험한 기운이 담긴 돌들이 있었다.
희소성이 강한 주술석은 그 값어치가 높았고, 지금처럼 강한 기운을 묶는 진법의 경우엔 내구성이 중요하기에 더 좋은 주술석이 필요했다.
즉, 진법의 외벽을 유지하는 데만도 막대한 비용이 소모된다. 함부로 여러 인원이 들락거리다간 진법의 내구성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천애랑과 화란만 진법에 들어가게 됐으며, 들어가 치료를 시작한다면 그 기간을 기약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화란아, 힘내라!”
“화란아, 마음 편히 먹어라!”
“언니, 다치지만 말아요.”
“천 공자, 잘 부탁하네.”
“아…. 견식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쉽다.”
의각원생들이 저마다 응원의 인사와 아쉬움을 표했다.
“화란아 너는 잘 할 수 있을 게다. 그리고 애랑아 화란이를 잘 부탁한다.”
천애랑과 화란은 마충에게 인사로 대답하고 지체 없이 진법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부르르.
한 명씩 진법 안으로 들어가자 진법의 이질적인 떨림이 있었다.
천애랑은 낯선 듯 매우 익숙한 기운이 충만함을 느꼈다.
진법 안을 보니 마치 할아버지와 단둘이 지냈던 것처럼 아늑한 느낌이 났다.
그곳에는 의각원의 것과 똑같이 생긴 초옥 두 개가 있었다. 그 옆에는 식수를 해결하기 위한 적당한 크기의 연못이 있었다.
초옥 옆 간이 창고의 공간에는 간단히 허기를 해결할 벽곡단과 일전에 설동에게 받아먹었던 자양강장제가 한가득 항아리들에 쌓여있었다.
초옥을 제외한 진법 내부의 공간은 수련을 위해 평탄하게 만든 너른 터들이 있었다.
그중 한곳에는 다양한 주술석으로 둘러진 공간이 있었다.
대자연의 기를 모아둔 진법 안에서 또다시 그 기운들을 집약시키는 공간이었다.
이는 그 공간에서 하는 운기조식의 효율을 극도로 높일 것이었다.
천애랑과 화란은 함께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