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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20화 (20/200)

기공술사 20화

천애랑의 질문에 일장은 고심했다.

소작을 하던 부모님이 지주의 폭력에 돌아가시자 억울함을 관청에 호소했지만 돌아온 것은 매질뿐이었다.

지주와 관이 긴밀한 관계였던지 그 후로 지주의 근처에 사사로이 병사들이 머무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유야무야 시간이 흘러가려다가 일장은 우연히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됐다.

지주가 다른 곳에서 저지른 범행을 형제들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이었다.

농사일만 해봤지 싸움이라고는 안 해본 자신과 형제들이었기에 이 누명을 탈피하거나 복수의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산으로 숨어들었다.

화전민이라도 될까 싶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기존 화전민의 텃세나 가끔 마주치는 산적들에 쫓기듯 아무도 다니지 않는 이곳 산까지 밀려온 것이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산적질이라도 하려던 첫 대상이 눈앞의 천애랑이었다.

일장은 자신의 사연을 차분하게 천애랑에게 전달했다.

“이 짓이 나쁘다는 것은 압니다. 혹여 공자님께서 저희를 벌하려 하신다면 저한테만 하시고 동생들은 용서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뭔 소리래요. 그냥 배고파 보이기에 만두 좀 나눠먹은 것뿐입니다. 저 말고는 아직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하니 개도의 기회를 드리고 싶을 뿐이고요.”

“개도라 하심은……?”

일장은 공손히 무릎을 꿇고 천애랑의 고언을 받들 자세를 취했다.

요즘은 힘 있는 자가 자신들 같은 약자를 벌하거나 죽인 후 함구해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무지렁이인 자신들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써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가장 큰 형인 일장의 자세를 보고 나머지 형제들도 따라서 천애랑 앞에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천애랑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억울하게 부모를 잃은 저들의 심정이 무엇일지 공감이 됐다.

천성이 착해서인지 죽을 각오로 복수를 하지 못하고 산에 숨어 들은 것도 아마 죽음의 두려움보다 혹여 그 과정에서 살아남아 고초를 겪을 형제들을 위함이지 않을까 싶었다.

복수에 대한 자신과는 다른 선택이었지만 형제들을 위해 도망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천애랑은 일장이라는 자의 모습에서 담대혁이 스쳐지나갔다.

동생만이라도 살려달라며 죽음을 담담히 인정하는 자세가 백두산에서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꺼이 고언을 듣고자 하는 이들의 자세가 충분히 개선되고 발전할 수 있는 자들이라 여겨졌다.

천애랑은 품에서 전낭을 모두 꺼내 일장 앞으로 내려놨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산속을 메아리쳤다.

열 명의 형제들이 어리둥절 천애랑과 전낭을 보자 천애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얼마 안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 돈으로 새로운 삶을 찾으세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이라면 어떤 것이든 찬성입니다.”

천애랑이 대답을 듣지 않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자 일장이 황망한 표정으로 기어와 앞을 막았다.

“공, 공자님! 어찌 저희에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천애랑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일장을 바라봤다.

“글쎄요. 부득이 제 손에 묻은 피와 앞으로 묻을 피에 대한 작은 속죄 같은 거라고 여겨주세요. 그리고 날도 추운데 따뜻한 옷이라도 챙겨 입으세요. 건강이 최곱니다.”

천애랑은 동굴을 헤매며 하염없이 걸을 때 정말 많은 생각들을 했었다.

그중 인연과 인과에 대한 생각들을 했었는데 생전의 할아버지는 피의 길에 대한 인과를 걱정하셨다.

이에 관해 담 소협이 일전에 한 말이 떠올랐었다.

무림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피의 길을 선택했다면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참회의 속죄들로 그 인과를 희석시키는 방법밖엔 없을 것 같다고. 그런 행위들을 잘하는 자들이 정파라고.

선해서 정파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에 걸맞은 책임과 속죄를 베푸는 자들이기에 정파라는 허울 속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사는 거라고.

천애랑은 이런 고민을 한 뒤로 굳이 정파인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행동을 다소 따르고 싶은 생각은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기회가 왔기에 그저 행할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앞길엔 분명 수많은 마교인의 피가 손에 묻을 것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선행을 쌓을 생각이었다.

이런 자세한 마음을 알 방법이 없는 일장과 그 형제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천애랑 앞에 부복했다.

천애랑은 머쓱함이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아하기에 더 퍼주고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돈이 더 없는 게 아쉬웠다.

본인에게 이 돈은 늑대무리를 만나 운 좋게 벌어들인 결과였지만 이들에겐 평생 처음 보는 돈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일장이 눈물, 콧물을 쏟으며 공손히 말했다.

“공자님. 그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보답은 못하더라도 항상 그 이름을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천애랑은 괜히 흐뭇해지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천애랑입니다. 잘 사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저 만두 판도 가져가세요. 객잔에 팔면 푼돈이라도 주지 않겠습니까?”

천애랑의 말에 다시금 형제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겐 태어나 처음 느끼는 타인의 따듯함이었다.

천애랑은 여전히 자신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이들을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재촉했다.

왜 사람들이 선행을 베풀며 사는지 그 일면을 느꼈지만 저런 과한 인사는 아직 낯 간지러운 천애랑이었다.

*  *  *

“다섯 바위 봉우리…. 그리고 거북이 바위.”

천애랑은 설동 의원이 말했던 장소를 찾아냈다.

두루뭉술한 설명이어서 과연 찾을 수는 있을까 싶었는데 다섯 바위 봉우리가 워낙 눈에 잘 띄어서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완만한 산이라기보다는 뾰족한 느낌이 강한 산들이었는데 그 정상엔 나무가 없어 대머리처럼 보였다. 그런 대머리 산 5개가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렇게 천애랑은 설동 의원이 설명한 것처럼 다섯 바위 봉우리를 찾고 그 산의 초입에서 거북이 바위까지 찾아냈다.

진법이 설치됐는지 기묘한 흐름과 구불거리는 길이 보였으나 잠시 무시하고 거북이 바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천애랑은 허기를 느껴 마지막 남은 자양강장제를 입에 넣고 씹었다. 쌉싸름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일품이었다.

생긴 것은 약간 똥 같았는데 맛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또 은근히 포만감도 있어서 장시간 이동에 휴대하기 편한 장점도 있었다.

그리고 진짜 건강에 좋은 것인지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그다지 피로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혹시나 다시 만나면 많이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봐야겠다.”

천애랑이 우물우물 자양강장제를 먹는 사이 어디선가 일렁이는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진법이 흔들릴 때 느껴지는 바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 사이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흰색 의복(醫服)을 입은 여인이었다. 작은 모자와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 면포를 하고 있었다.

여인이 물끄러미 서있기에 천애랑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 건넸다. 설동이 적어준 추천서였다.

여인은 천애랑의 손을 잠시간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가와 종이를 건네 읽었다.

“따라오시죠.”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슬 젖은 아침 맑은 개울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천애랑은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은 생각에 멍하니 쳐다봤다.

여인은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 걸어갔다.

천애랑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

여인이 기묘한 보법을 밟았다.

‘진법과 관련이 있는 건가.’

천애랑은 그런 여인의 보법에 신경 쓰지 않고 차분히 뒤따랐다.

그런 천애랑의 모습에 여인이 흥미로운 듯 돌아봤다.

“혹시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건가요?”

“예. 자연과 가까운 무공을 익혔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대단하군요. 그럼 좀 더 속도를 내겠습니다.”

일다경을 걸어가자 은밀하게 가려진 나무들 속 넓은 터가 나타났다.

작은 초옥들이 모여 있었다. 특별히 경계를 위한 울타리 같은 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진법에 의지하는 거겠지.’

대강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20명이 될까 싶었다.

의술을 수련하는 신비문파라고 하더니 꽤나 소규모인 것 같았다. 그리고 모두가 꽤나 젊은 편이었다.

“이쪽으로.”

천애랑은 여인을 따라 마을을 가로지르니 일을 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특이한 점은 그 시선들엔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보다 호기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마치 어디가 아픈 환자가 온 건지 맞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여깁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천애랑은 여인의 말에 따라 자리에 멈추고선 주위를 둘러봤다.

눈앞의 초옥은 지나오며 봤던 다른 초옥들과 다를 바 없는 크기의 초옥이었다.

아마 이 마을의 장(長)에게 데려가지 않나 싶었는데, 이곳은 건물 크기에 따른 지위고하가 없는 듯했다.

그때 여인이 초옥문을 열고선 말했다.

“들어오시죠.”

여인의 안내에 따라 천애랑은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백발(白髮)에 백미(白眉)와 백염(白髥)이 멋들어지게 난 노인이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느껴지는 세월에 비해 꽤나 동안인 노인이었다.

천애랑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노인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신기한가?”

노인의 물음에 천애랑이 고개를 저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느껴지는 세월에 비해 보이는 세월은 한없이 젊어 잠시 결례했습니다. 천애랑입니다. 설동이라는 이름의 의원이 이곳을 추천해서 방문했습니다.”

천애랑의 예에 노인이 이채를 띠었다.

“이름을 잊은 지는 오래나 예전엔 마 의원으로 불렸다네. 자네도 편히 마 의원이나 어르신이라 부르게.”

“예.”

“그나저나 혜안(慧眼)이 있는 젊은이로구만. 내 올해로 120살쯤 먹었지.”

“……?!”

“허허허. 그렇게 놀랄 필욘 없네. 자네도 좋은 공기 마시고 좋은 음식 먹으며 외부의 환란을 피해 안빈낙도의 삶을 살다 보면 이렇게 될 수 있다네.”

“놀랍긴 합니다.”

마 의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설동이 그놈이 여기를 소개시켜 주다니 별일일세. 둘 사이에 어떠한 깊은 인연이라도 있던 겐가?”

노인의 옆에 앉은 여인도 궁금한 듯 천애랑에게 시선을 던졌다.

천애랑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설동과 있었던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그렇게 진맥을 짚어 본 설동 의원이 바로 추천서를 써주던데요? 이곳이 의술이 뛰어나고 임상적 자료가 많아 조언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마 의원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놈이 그랬단 말이지……. 내 진맥을 해봐도 되겠는가?”

천애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손목을 내밀었다.

설동 의원에게 들어서 무림인이 껄끄럽게 생각하는 요청과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천애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마 의원이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허허. 설동이 놈이 왜 그랬는지 우선은 알 것 같구만. 그럼 진맥을 해보겠네.”

마 의원이 눈을 감고 천애랑을 진맥했다.

천애랑은 설동 의원 때처럼 이질적인 내공이 몸 안을 훑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보다 더 부드럽고 섬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이……?!”

갑자기 진맥을 하던 마 의원이 깜짝 놀라며 토끼눈을 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애랑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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