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6화
마뇌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의 선이 닿아 있는 다른 황자를 찾아 좀 더 지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홍건적과 싸우던 황실의 군사들이 크게 패퇴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쿠실라가 새로이 황제가 된다 하더라도 황실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럴 때 더욱 황실을 흔들어서 이번 기회에 저희의 입맛에 맞는 허수아비 황제를 세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래, 황실의 문제는 마뇌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또 남은 사항이 있나?”
천마는 기공가 후예의 죽음 소식 후 급격히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정파의 세력들이 저흴 견제하기 위해 무림맹을 결성할 조짐이 보입니다. 또한 저희가 황실과 많은 유착관계를 보이는 것을 보고 그들이 홍건적을 도우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천마는 무림맹의 결성 소식에도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것 또한 마뇌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천마는 귀찮음 가득한 손짓을 했다.
이에 마뇌가 깊게 읍을 하며 명을 받았다.
모든 안건이 끝난 듯하자 천마는 일어나며 지휘웅에게 말했다.
“휘웅, 오랜만에 대련 한번 할까?”
지휘웅은 천마신교와 기공가의 전투가 있었던 20년 전에는 천마신교 제 1 무력집단인 흑풍대의 대주로서 외부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마교로 돌아오니 사부인 태상교주는 죽고 사형인 천마가 한동안 크게 요양하고 있었다.
그때 천마가 기공가에게 이를 갈던 모습을 기억하는 지휘웅은 대충이나마 현재 천마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럽시다. 근래 저도 성취가 조금 있어서 쉽지 않을 것이요.”
“큭큭, 제대로 안 하면 죽을지 모른다.”
천마와 지휘웅은 담소를 나누며 대전을 벗어났다.
* * *
천애랑은 머리 위로 간신히 들어오는 달빛을 슬며시 올려다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천애랑은 작은 달빛만 간헐적으로 비치는 동굴을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크윽!”
천애랑은 돌부리에 발가락을 찍으며 고통을 느꼈다.
천애랑은 부상당한 몸 상태 때문인지 이런 작은 것들에도 고통을 느꼈다.
내공이 넘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들이었다.
천애랑은 이러한 감각들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는 가시지 않는 고통 속에서 이렇게 된 그날을 떠올렸다.
드라쿠와의 전투 후 정신을 차렸을 땐 폭포에서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거친 물살 속에서 사력을 다한 끝에 간신히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뭍으로 올라와 주변을 살피니 방금 떨어진 높이보다 더욱 까마득한 높이의 폭포가 아래로 나있었다.
천애랑은 아찔함을 느꼈다.
그리고 뒤늦게 찾아오는 몸의 고통과 그 상태가 더욱 아찔함을 주었다.
내공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내공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운기조식으로도 어떠한 호전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겪는 상황에 천애랑은 잠시 망연자실했지만 자포자기 쓰러져 있을 수만은 없어서 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폭포 뒤 숨겨진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고 몸을 피할 겸 들어왔다가 동굴 안쪽 길로 무작정 걷는 중이었다.
원래는 동굴에서 몸을 추스르고 폭포 바깥의 숲으로 이동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종유석이 가득한 동굴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뭘 잘 못 건드렸는지 입구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금처럼 동굴 속 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천애랑은 작은 달빛을 등불 삼아 동굴 속 곳곳에 나있는 이끼들로 간신히 허기를 채웠다.
그리고 그래왔듯 하염없이 걸었다.
체력도 시간개념도 없어진 채 걷기를 한참, 문뜩 벽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버려지듯 떨어져 있는 죽간들이 있었다.
천애랑은 우선 죽간을 하나 주워서 읽었다. 오래되었는지 많은 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이게 뭐지? 구려(句麗)의 전사들이 공격할 길을……. 그다음은 보이지가 않네.”
다른 죽간들도 주워서 읽어봤다.
“북경을 격…할…? 공격할? 흐음… 조의선인(皂衣先人)이 도와주…. 아, 읽기가 너무 힘드네.”
천애랑은 시선을 돌려 벽화를 봤다.
벽화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모습, 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로 몇몇 지점에 동그랗게 표시가 돼있었다.
마치 지도 같은 느낌도 받았는데 많이 부식되어 확실치는 않았다.
그래도 천애랑은 흥미로운 죽간과 벽화 덕분에 내공에 대한 걱정을 잠시나마 접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죽간과 벽화는 천애랑에게 잠시의 마취제일 뿐.
오직 가느다란 달빛만의 응원 속에서 다시금 기약 없는 걸음들을 옮겨야 하는 천애랑은 절망감을 느꼈다.
부상과 피로, 회복되지 않는 몸. 어린 나이부터 내공이 가득했던 삶을 살았기에 느껴보지 못했던 상실감.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어지간한 부상도 자고 일어나면 치료되거나 운기조식하면 회복했는데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후우…. 힘내자!”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치열하게 살다가 죽거나 마교와 싸우다 죽는 거면 모를까 쉽게 포기해서 죽는다면 할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었다. 물론 스스로도 포기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천애랑이 긍정적으로 자신의 부정을 털어버리고 무거운 다리를 한 보 한 보 옮겨갔다.
그 뒤로 얼마나 걸었을까.
천애랑은 이끼를 먹는 것이 익숙해지고 어두운 공간에서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지도 오래.
그렇게 비몽사몽 걷던 와중 천애랑은 먼 거리에서 스며드는 빛을 보았다.
너무나 낯선 빛에 잠시간 충혈된 눈을 비비며 확인하자 간간이 천장 좁은 틈에서 들어오던 빛이 아닌 정면으로 들어오는 빛이 보였다.
드디어 출구를 찾았다는 감격에 천애랑은 눈물이 고였다.
“하하하…….”
설레는 마음으로 동굴의 출구로 나가니 알 수 없는 산속의 돌 아래였다.
출구의 은밀함이 목적이었는지 산 비탈길에 돌이 절묘하게 덮은 모양새로 있었다.
천애랑은 동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발을 헛디뎌 산 비탈길을 굴러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빠진 탓에 십수 년간 해보지 않은 실수를 했다.
“으윽!”
나무들의 잔가지에 온몸을 긁힌 천애랑은 고통의 신음을 흘리며 벌러덩 누었다.
하지만 곧 천애랑은 고통스러운 상황과는 다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 살았다!”
생존의 기쁨에 한참을 웃던 천애랑은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며 깊은 잠에 들었다.
* * *
현재 천애랑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적의 은밀하고 조직적인 움직임은 천애랑의 목숨을 조여 왔다.
천애랑은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싼 늑대 무리를 경계했다.
‘아으……. 죽겠네.’
비탈길을 구른 후 기절하듯 잠들었던 천애랑은 갑작스런 살기(殺氣)에 놀라 황급히 정신을 차렸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늑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피투성이인 천애랑의 모습이 얕보였는지 경계만 하던 늑대 한 마리가 기습을 해왔다.
천애랑은 다급히 보법을 밟았지만 늑대의 공격을 깊게 허용했다.
그간 넘치는 내공을 기반으로 한 움직임에 익숙했다 보니 그렇지 않은 지금과의 감각차이가 크게 다가왔다.
원래라면 발끝으로 내공을 밀어내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리고 장법으로 늑대의 옆구리를 쳐내려 했지만 결과는 완벽히 실패였다.
“크윽!”
가슴께를 거칠게 긁고 간 늑대발톱의 흔적이 쓰라렸다.
다행히 임기응변으로 각법을 펼쳐 늑대를 밀어냈기에 목을 물리진 않았다.
경각심이 들었다.
천애랑은 늑대들을 진중하게 살폈다.
처음 공격을 시도한 건 먹잇감의 반응을 보려 했던 것인지 늑대들이 주변을 더욱 철저하게 맴돌았다.
그때 두 마리의 늑대가 더 걸어 나오더니 천애랑에게 합공을 했다.
천애랑은 승룡각으로 정면의 늑대 턱을 차올렸다.
빠각!
내공은 없었지만 단련된 몸과 훈련에서 나오는 힘이 늑대에게 뇌진탕을 선물했다.
하지만 옆구리를 노리고 다가온 날카로운 이빨은 온전히 막진 못했다.
순순히 팔로 막으면 그대로 이빨에 뜯길 것 같아 팔꿈치로 늑대의 콧잔등을 내려찍었다.
다만 타점이 빗맞은 탓에 옆구리에 약간의 공격을 허용했다.
“크흡.”
천애랑은 고통에 흔들리는 호흡을 빠르게 정리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천애랑의 거친 저항이 신경 쓰이는지 늑대들은 더욱 경계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틈을 노렸다.
천애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내공이 온전했다면 광폭환 하나 저 무리 사이에 던져버리거나 수강으로 베어버렸을 거라는 아쉬움이 강하게 들었다.
“후우…….”
천애랑은 부동심을 되뇌며 현실을 직시했다.
“와라!”
필사즉생의 각오를 담아 늑대를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천애랑의 외침에 화들짝 놀란 늑대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천애랑은 돌진하는 늑대를 옆으로 흘리고 뒤이어 달려드는 늑대의 턱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크게 뛰어서 천애랑을 덮치는 늑대의 품으로 들어가 엎어치기를 했다.
연이어 발톱을 휘갈기는 늑대의 두꺼운 다리를 역으로 꺾어내고, 등을 노리는 늑대에게 잡고 있던 늑대를 휘둘러 던졌다.
“흐읍!”
늑대의 묵직한 무게에 따른 저항력이 느껴졌지만 그만큼 확실한 손맛이 느껴졌다.
천애랑은 내공 없이 무공을 사용하는 것에 점차 적응을 하고 있었다.
내공이 없을 뿐 동체시력이나 무공에 대한 이해도는 그대로이니 늑대들의 공격이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은근 재미도 있었다.
무공을 처음 배울 때 모든 것이 새로웠던 그때의 감정이 스며들었다.
“하하하!”
더 이상 천애랑의 몸에 상처를 내는 늑대는 없었다.
오직 천애랑의 몸짓에 따라 튕겨가고 엎어지는 늑대들이 속출했다.
천애랑이 느긋하게 몸의 힘을 푼 상태로 섰다.
악에 차 붉어진 눈빛으로 공격해오는 늑대를 가볍게 흘리며 옆구리에 손바닥을 올렸다.
텅! 하는 북 터지는 울림과 함께 늑대가 자지러졌다.
“깨개갱!!!”
그 모습을 보고 천애랑이 대소(大笑)를 했다.
발경(發勁).
발바닥부터 다리, 허리, 등, 팔, 손목, 손바닥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힘의 흐름이 있어야 가능한 발경(發勁)은 무의 극의(極意)라고도 볼 수 있는 상승무공이다.
이러한 최상의 신체적 균형을 자연체라고 하는데, 발경은 이러한 자연체에 더해 정확한 순간을 포착하는 높은 동체시력과 감각,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 담력 또한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갖춘 발경은 외부에 타격을 주지 않고 내부에 타격을 주는 것이 가능해지며, 이는 훈련으로 단련되기 어려운 내장 등에 치명상을 줄 수 있었다.
이러한 발경은 옛 무당파의 고수가 외공의 고수나 갑옷을 입은 장수들을 상대로 사용해 유명해진 무공이었다.
또한 발경의 난이도는 검을 쓰는 자들의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는 경지와 비교할 만했다.
다만 지금 천애랑이 이룬 발경은 완벽한 자연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맞지만 완벽히 내공을 배제한 상태의 결과물이기에 일반적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이게 되네.”
천애랑이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내공이 없어졌다고, 운기조식이 되지 않는다고 절망하던 시간들의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눈앞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새로운 방법을 찾은 기쁨이 전신을 짜릿하게 했다.
“자! 이제 정리하자.”
천애랑의 눈빛이 번뜩이자 늑대들도 악에 받친 듯 더욱 이빨을 들이밀었다.
* * *
하남 낙양(洛陽) 시내의 화려한 전각들 중 5층 높이로 솟은 전각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인원들의 면면이 한자리에서 쉽게 볼 수 없었기에 구경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각을 둘러싸며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각각 세력에 맞는 복장을 입은 무사들에 의해 사람들은 전각 밖에서 통제되고 있었다.
전각 안에는 회의를 위해 새롭게 들여놓은 크고 동그란 탁상이 놓여 있었고, 탁상 주위로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백의(白衣)를 입고 하얀 부채 들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청(諸葛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