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4화
나무 뒤에 숨었던 천애랑은 기함할 기운에 놀라 나무에서 최대한 몸을 멀리했다.
콰지직!
두꺼운 아름드리나무에 큰 구멍을 만들고도 상쇄되지 못한 기운이 다가왔다.
천애랑은 다급히 대지의 결을 찾아서 내기로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쿠드드드득!
두꺼운 땅거죽이 크게 뒤집어지면서 천애랑 앞으로 솟아올랐다.
푸욱---
땅거죽으로 막으려 했던 의도는 좋았으나 드라쿠의 공격이 예상보다 고강했다.
땅거죽마저 뚫어버린 기운이 천애랑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큭!”
천애랑은 통증을 참으며 땅거죽에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다시금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호오~ 그런 식으로 나의 홍혈지를 막을 줄이야! 그깟 땅거죽이 상당히 기운을 상쇄시켰구만.”
드라쿠가 또 한 번 홍혈지를 날렸지만 요령이 생긴 천애랑은 나무 여러 개와 땅거죽을 이용해 몸을 피했다.
천애랑은 이쯤 되면 거지와 동물들이 충분히 피할 시간을 가졌으리라 생각했다.
‘이젠 빠져나가자.’
전장에서 도망갈 생각을 하던 천애랑은 경시할 수 없는 막대한 기운을 느꼈다.
“쯧. 여간 거슬리는군. 거슬리는 게 있다면 없애버리면 되지.”
천애랑은 나무 틈 사이로 빠끔히 기운의 근원지를 살폈다.
드라쿠는 손가락이 아닌 양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붉은 내기가 차곡하게 쌓여가는 것이 보였다.
드드드드드드------
땅이 흔들렸다. 아니 공간 자체가 흔들렸다.
무지막지한 내공의 집합에 공간이 일그러지는 느낌마저 났다.
내공을 모으는 드라쿠도 부담이 되는 건지 더욱 얼굴이 창백해지며 식은땀이 났다.
“히이야압------!”
드라쿠의 새된 기합성과 함께 엄청난 기운이 뻗어오기 시작했다.
우지끈!
콰지지직!
콰드드드드득------!
그 기운은 드라쿠의 전방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분쇄시켜 버리며 광범위하게 다가왔다.
‘이건 못 피한다.’
축지법으로 피하려 했지만 무지막지한 기운과 가공할 속도에 무식할 정도의 범위가 더해지자 퇴로가 보이지 않았다.
천애랑은 이를 악다물고 가진 모든 내기를 강제적으로 끌어올렸다.
“크윽!”
고통이 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선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천애랑의 몸 주위로 막대한 내기의 호신강기가 생겼다.
“끄으읍!”
죽자 살자 내기를 더 끌어모으자 호신강기는 천애랑을 중심으로 거대한 여의주처럼 넓게 형성됐다.
천애랑은 이내 거대한 호신강기를 전방의 한 점으로 모았다.
피가 역류하면서 정신이 혼미했다.
‘크으윽!’
천애랑은 간신히 의식을 붙잡으며 지척까지 다가온 드라쿠의 기운을 보았다.
그 기운은 전방의 모든 시야와 하늘마저 가린 듯이 거대했다.
천애랑은 한 점으로 모은 호신강기를 혼신의 힘을 다해 강하게 내밀었다.
삐--- 잉---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막대한 기운들의 충돌로 인해 일순간 이명(耳鳴)상태처럼 세상이 고요해졌다.
천애랑은 충격파로 인해 피투성이가 된 채 나무들과 부딪히며 날려갔다.
한참을 나무와 부딪치며 날아가던 천애랑은 갑자기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천애랑과 드라쿠의 전투가 있었던 곳.
하얀 경장 위에 피풍의(避風衣)를 입은 무인 수십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인들의 검집에는 하나같이 모용(慕容)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찾아라!”
말 위에 올라탄 모용세가(慕容世家)의 가주 모용단(慕容端)은 연신 세가의 무인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무인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가주님, 저쪽에서 엄청난 전투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모용단은 반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가자!”
그리고 세가의 무인이 안내하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안내된 곳에 도착한 모용단은 눈앞의 광경에 입을 벌렸다.
“이. 이게…, 무슨…?!”
모용단은 움푹 파인 땅과 솟아오른 땅거죽을 보았다.
그리고 엄청난 광경을 목도했다.
숲의 일부였다고 추측되는 곳이 있었는데, 일백의 기(騎)가 나란히 지나가도 될 정도의 공간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모용단은 본인이 입을 벌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천지개벽할 장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모용단(慕容端)은 아버지 모용민(慕容玟)의 뒤를 이어 5년 전에 현 가문에서 두 번째로 초절정이 된 인물이었다.
세간에선 모용민을 제외하면 모용세가에 특출난 고수가 없다는 것을 비꼬는 말들도 있었으나 모용단이 초절정에 올라가면서 그런 말들은 쏙 들어가게 되었다.
부단한 노력으로 50의 나이에 초절정이 된 모용단에게 세간에서 많은 축하인사와 찬사를 보내왔었다.
그런 모용단에게 좀 더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모용민은 가주 직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그 후로 아버지와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모용단은 부단히 노력했었다.
가문의 업무뿐 아니라 무공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득바득 무공서를 모아 따로 전각을 만들 만큼 그 열정도 대단했고 많은 성취도 얻었었다.
그런 모용단임에도 지금 눈앞의 현장은 미증유였다.
어떻게 싸우면 이런 수백의 군사가 싸운 듯한 전장(戰場)을 표현할 수 있을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님을 모셔오너라! 당장!”
모용단은 자신의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 현장을 판단할 수 없다고 여겨 전대 가주인 모용민(慕容珉)을 찾았다.
모용단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선 삼인(三人)과 개 한 마리가 마찬가지로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로 간 걸까요…? 괜찮을까요?”
“글쎄다. 하아…….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전투의 현장에 온 담소연과 담대혁이 걱정스런 눈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담대혁은 자신의 옆에 있는 거지를 쳐다봤다.
개방의 소방주 방덕은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멍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방덕 님이라고 하셨습니까?”
담대혁의 물음에 방덕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천 소협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겠습니까?”
담대혁의 말에 방덕은 난감함을 느꼈다.
자신의 위기에 똥개를 보내 천애랑을 불러온 것은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기절하고 난 후 정신을 차리니 심양 성벽 외곽이었다.
방덕은 똥개의 등에 축 늘어져 있던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했다.
마교의 장로이자 화경으로 추측되는 드라쿠를 홀로 상대하며 자신을 탈출시킨 천애랑의 협(俠)에 말문이 막혔다.
세상엔 의와 협이 사라져 간다고 느끼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입을 줄은 몰랐다.
혼자선 해결할 수 없음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즉시 심양의 제 일 세력인 모용세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담가의 남매를 만났고 자신을 구해준 천애랑이 담가 남매와 더불어 자신이 찾고자 했던 인물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어찌저찌 담가 남매 및 모용세가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초토화된 숲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똥개를 시켜 천애랑을 추적했지만 절벽 낭떠러지 앞에서 흔적이 끊겼다.
절벽 밑 물에 빠졌다면 똥개의 후각으로는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한다.
당장은 천애랑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흔적으로 보아 부정적 결과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방덕은 담대혁을 힘없이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리일세. 절벽에서 흔적이 끊겼는데 더는 방법이 없다네. 미안하네….”
“아아…….”
담소연이 털썩 주저앉았다. 천애랑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대혁은 할 말을 잃은 채 눈을 감았다.
자신이 천 소협을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몸을 옥죄어왔다.
그 죄책감엔 방덕도 함께 빠져 있었다.
자신의 도움 요청으로 인해 천애랑이 희생됐다는 사실에 거친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 모용세가 가주 모용단과 태상가주 모용민이 나란히 말을 타고 다가왔다.
방덕은 힘겹게 일어나 천중인검(天中仁劍) 모용민(慕容珉)에게 인사를 했다.
“천중인검을 뵙습니다.”
모용민과 모용단이 가볍게 말에서 내려섰다.
“그래, 오랜만이구만. 방주는 잘 계시는가?”
“뭐 그 영감님이야 항상 건강하시지요. 건강하지 말라 해도 제 바짓가랑이 붙잡고 건강 챙기실 분이니까요.”
습관적인 농담이 나왔지만 방덕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모용민은 가볍게 방덕의 어깨를 두드리곤 담가 남매를 쳐다봤다.
“산동 담가(家)의 자제분들이시라고?”
모용민의 물음에 담대혁이 앞으로 한걸음 나와 무림의 인사법인 포권을 했다.
“산동 담가(家)의 장자 담대혁이라고 합니다. 소문 자자한 대협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저희 담가(家)의 막내인 담소연이라고 합니다.”
담대혁의 인사와 함께 나온 소개에 담소연도 힘없지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허허, 거대한 가문의 자제들께서 참으로 예의가 바르시구만. 우리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나부랭이들과는 다르네 그려. 허허허.”
모용민의 말에 방덕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대륙 중앙의 무림인들이 꽤나 변방에 위치한 모용세가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걸 비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정파 무림의 5대 세가에 들어가는 모용세가이지만 중원 무림의 은근한 차별에 꾸준히 갈등이 있어왔다.
“좀 더 차분히 담소를 나누고 싶지만 알다시피 시급한 사안이 있어 잠시 실례하겠네.”
모용민은 담대혁에게서 몸을 돌리고는 방덕을 다시 쳐다봤다.
“와개(臥丐)여, 어젯밤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 좀 해주겠나.”
방덕은 어젯밤이라지만 불과 몇 시진 전의 일들에 관해 설명했다.
“허어…. 안타까운지고.”
모용민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모용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엄청난 현장을 만든 주인공이 화경의 마교 장로와 약관의 청년이라는 것 아닌가.
방덕은 모용민과 모용단이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현장에서의 확고한 이탈의 의사표현이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을 다 해드렸습니다. 마교의 장로가 왜 이곳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디로 사라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북의 개방 본부로 서둘러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모용민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만 어쩔 수 없지. 천진에 가거들랑 방주에게도 안부 전해 주시게. 자네도 몸 회복 잘 하고.”
“예, 알겠습니다.”
방덕은 담가 남매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정말 미안하네. 나로 인해 자네들의 소중한 일행이 봉변을 당했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개방 소방주의 이름을 걸고 후에 자네들에게도 이 빚을 갚겠네.”
담대혁은 무거운 마음으로 방덕의 인사를 받았다.
방덕은 다시금 주변의 인물들에게 인사를 하고 똥개와 함께 떠났다.
방덕의 떠나는 모습을 보던 모용민은 아들 모용단에게 말했다.
“아이들의 수색범위를 나무숲 너머 계곡까지 확장시켜라. 아니 심양에 남은 개방과 하오문, 그리고 중소문파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요녕 전체를 수색해. 그리고 우린 전투 현장을 살펴보자꾸나. 흔적들이라도 연구하면 무공 발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예. 아버지.”
모용의 두 부자(父子)가 대화를 나눌 때 둘에게로 담대혁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