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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술사-12화 (12/200)

기공술사 12화

심양 성내의 각종 건물들이 붉은 노을빛을 받아 반짝였다.

시전(市廛)에선 하루의 끝을 알리는 떨이판매 호객행위가 한창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가정이라는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의 고단함을 한잔 술로 풀기 위해 삼삼오오 주루(酒樓)를 찾아다니는 남자들, 자식들에게 간식거릴 주기 위해 쌈짓돈을 꺼내 당과를 사는 아저씨 등 다양한 군상(群像)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천애랑은 전에 들렀던 마을도 사람이 많아 신기했지만 요녕성(遼寧省)의 성도인 심양(沈陽)은 그 수준이 다름을 느끼고 있었다.

문뜩 시전 한쪽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손을 잡고 시전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천애랑은 순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숨어있지만 말고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오순도순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할아버지는 좋은 곳에 가셨을까.

가족들은 만나셨을까.

그곳은 평안한 곳일까.

우리 가문을 멸문시킨 마교와 전투를 치른 나를 보며 좋아하셨을까.

내가 마교에 복수를 다짐했다고 뭐라 하시지는 않겠지.

할아버지도 지노라는 노인을 아실까.

그때 상념에 빠진 천애랑의 귀로 담대혁의 외침이 크게 들렸다.

“천 소협!”

갑작스런 부름에 천애랑은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담대혁이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예?”

“무슨 일 있으십니까? 계속 부르셔도 대답이 없으셔서요.”

‘그랬었나.’

천애랑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잔여물처럼 남은 상념을 털어냈다.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 놀라서요.”

천애랑은 헛헛한 마음을 뒤로하고 적당히 둘러댔다.

담대혁이 크게 웃었다.

“하하! 그래도 여기는 변방이라 사람들이 적은 편입니다.”

“예?!”

천애랑은 깜짝 놀라 새삼스런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적다니? 우물 안 개구리라더니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네.’

그때 천애랑의 눈에 사람들의 다양한 복장이 들어왔다.

“그런데 사람들의 복장이 참 다양하네요?”

천애랑은 담대혁에게 물어봤다.

대답은 담소연에게서 나왔다.

“그럴 수밖에요. 여기가 연(燕), 한(漢), 구려(句麗), 당(唐), 발해 등 수많은 나라들의 문화가 섞인 곳이니까요.”

“대단하네요…….”

천애랑의 감탄에 담소연이 배시시 웃었다.

담대혁은 그런 여동생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전에 자신이 여동생에게 해줬던 대답을 여동생이 천애랑에게 그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대혁은 여동생을 귀엽게 쳐다보고는 첨언을 했다.

“그렇습니다. 중원 사람들은 이곳의 사람들을 변방이라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여기처럼 다양성을 배울 수 있는 곳도 드물지요.”

“다양성이라…….”

천애랑은 다양한 시선이 무공발전에 도움이 된다던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예, 다양성이라는 것이 정치가들에겐 무서운 것이겠지만 문화, 경제, 정치, 사회가 발전하려면 중요한 요소이죠.”

“정치가들이 싫어하나요?”

담소연은 자신의 궁금함을 물어봤다.

담소연의 질문에 담대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하지만 정치가들에게 이 말은 적대관계의 사람들과 그들의 사상 등을 인정하고 이해하라는 소리니까. 씨알도 안 먹힐 말이지. 하하.”

“저희 가문도 특정 이유로 출사할 수 없다며 내실만 다지고 있는 것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해서인가요?”

담대혁이 곰곰이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현 황실이 한족(漢族)이 아님을 이유로 그렇게 하시는 어르신들의 의견을 거스를 생각은 없다만 올바르다고 생각하진 않아. 다만 황실 또한 한족을 차별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런 태도들이 더 강화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들이 한인(漢人)들을 차별하지 않고 적극 수용했다면 이렇게 나라가 흔들리지도 않았을 것이야.”

“흠……. 어렵네요.”

담대혁은 질문을 하고 답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는 동생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하하하, 다 알 필요는 없겠지. 나도 한인(漢人)이고 권문세가의 자식이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구나. 하지만 기회의 평등함, 능력주의의 사상을 추구하는 이가 나타난다면 그의 옆에서 전심을 다해 나의 지식을 펼치고 싶은 꿈이 있단다.”

천애랑은 담대혁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에 잠기었다.

‘꿈이라…….’

꿈에 대해서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단지 소중한 가족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목표 같은 것은 있긴 했다.

그리고 이런 목표가 나를 좀먹을 수 있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진법을 떠나기 전 이미 마음을 확고하게 정리한 문제였다.

천애랑에게 세상은 곧 할아버지였다. 그의 삶은 할아버지로 시작해서 할아버지로 끝났었다.

그것이 천애랑이라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세상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세상에 나오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고 그 세상이 바로 본인의 세상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천애랑은 느끼고 있었다.

천애랑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렇게 사람이 많음에도 스스로의 존재가 철저한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는 같이 웃고 동행하는 담가 남매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서서히, 언젠가는 이 고민과 기분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만 당장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파동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천애랑은 자신의 세상을 앗아간 근본적이고 절대적 원인인 마교에 대한 복수심이 확고해져갔다.

왠지 복수를 이루면 잃어버렸던 세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한참을 상념에 빠져 있던 천애랑은 걱정스레 시선을 모으고 있는 담가 남매를 보았다.

좀 전의 조손(祖孫)이 부러워서인지 상념이 많아지는 하루였다.

천애랑은 고개를 흔들어 강제로 상념을 날려버렸다.

‘그래. 고민은 나중, 오랜만의 마을인데 맛있는 것도 먹고 씻자!’

그리고 담가 남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배가 고프네요. 만두 잘하는 곳이 있으면 좋겠어요.”

담가 남매는 표정이 안 좋은 천애랑을 걱정하다가 실없는 소리를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휴……. 걱정했잖아요. 혹시 고민이 있으면 기탄없이 저한테 말해주세요. 듣는 것은 잘하거든요!”

담소연이 과장되게 주먹을 쥐어 보이자 천애랑은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천 소협. 때로는 고민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해결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자! 그건 그렇고 우선 객잔부터 잡을까요?”

담대혁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10살 정도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남자아이 하나를 불렀다.

“이봐! 꼬마!”

담대혁이 부르자 아이는 잽싸게 뛰어왔다. 그리고 일행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꼬마는 아니고요. 장돌이라고 부르세요. 심양(沈陽)이 처음이신가요? 흠……. 비단옷이지만 잔뜩 더러운 것을 보니 당장 객잔을 잡아 씻고 싶으시겠네요. 그렇죠?”

점쟁이라도 된 듯 말하는 남자아이를 천애랑은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래, 먼 길을 왔더니 당장 씻고 싶구나. 음식 맛있고 깨끗한 곳으로 안내할 수 있겠니?”

담대혁의 말에 남자아이는 코웃음을 치며 작은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탕탕 쳤다.

“심양(沈陽) 장사치 중에 장돌이 모르면 간첩이에요. 또 제가 모르는 곳이 심양(沈陽)에 있다면 그곳은 간첩의 근거지겠죠. 걱정마세요. 그럼 잘 따라오세요. 놓치고선 울지 말고. 아! 그리고 선불이에요.”

장돌이라는 남자아이는 손가락을 열 개 펴고는 꼬질꼬질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담대혁은 품에서 동전 10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동전 5개를 장돌에게 주었다.

“이게 뭐예요. 10개라니까요?”

담대혁은 가볍게 웃고는 말했다.

“널 어떻게 믿고? 하지만 객잔이 마음에 들면 10개를 더 얹혀주마.”

담대혁의 말에 좀 더 따지려고 했던 장돌은 금세 속으로 계산을 마치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요. 사람이 많아서 길 잃어버리기 쉬우니까 잘 따라오세요.”

장돌이 자신 있게 앞장섰다.

담대혁은 그 뒤를 따라가며 천애랑과 담소연에게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오라버니, 저 아이는 뭐예요?”

담소연의 질문에 천애랑도 공감의 고개를 끄덕였다.

담대혁은 앞서가는 장돌에게 시선을 고정하면서 대답했다.

“이렇게 큰 도시에는 여행자들도 많겠지? 와본 사람도 있고 초행인 사람도 있는데 어느 쪽이 됐든 익숙지 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린단 말이지. 그래서 저 꼬마처럼 길 안내나 간단한 정보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아이들이 있어. 어리다고 무시만 할 수 없는 게 정보의 질이 나쁘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 물론 약간의 수수료를 주면서 아이와 거래한 가게도 있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겐 그런 걸 따지는 것보다 편리한 것이 더 좋으니까.”

천애랑은 담대혁의 해박한 지식에 놀란 눈을 했다.

이런 것은 책만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가 더 대단해 보였다.

“우와, 오라버니 그런 것은 어떻게 아는 거예요? 역시, 맨날 몰래 집 밖을 돌아다니더니 쓸모가 있을 때가 있군요!”

“하하… 쓸모라니… 그건 항상…….”

담대혁은 담소연의 싸늘한 눈초리에 황급히 말을 돌렸다.

“흠흠, 장돌이를 잘 쫓아가자꾸나.”

장돌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2층 건물이었다.

‘송화객잔’이라 쓰인 허름한 간판이 객잔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그래도 여기 객잔 관리 상태랑 음식 맛이 좋아요. 믿으셔도 돼요.”

자신 있게 말을 한 장돌은 객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나! 손님 모셔왔어!”

장돌의 부름에 객실 청소를 하고 있었던지 2층에서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한 여인이 다가왔다.

꼬마가 누나라고 부르기에는 나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아무래도 넉살좋은 꼬마 나름의 호칭이었던 것 같다.

꼬마 말대로 객잔 내부는 외부와는 다르게 매우 깔끔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 냄새가 입구부터 은은하게 코를 간지럽혔다.

객잔 1층은 저녁시간이라서 그런지 이미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겉만 보고 알 수 없다더니.’

천애랑은 다소 감탄의 표정으로 객잔 안을 둘러봤다.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과 맛있는 음식 향, 객잔의 청결함이 지친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담대혁이 객잔 여인을 향해 말했다.

“방 3개 주시고, 뜨거운 목욕물은 바로 가능합니까?”

“예. 마침 목욕물이 많이 필요한 시간이라 준비량이 꽤 되니 바로 가능합니다. 목욕 먼저 하십니까?”

담소연이 담대혁을 향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담대혁이 답했다.

“그렇게 해주시죠. 그리고 꼬마야.”

“아이, 장돌이라니까 그러네.”

담대혁의 말에 꼬마가 툴툴댔지만 담대혁이 내민 손을 보고선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동전을 채갔다.

꼬마가 동전을 가져간 후 담대혁이 다시 동전을 꺼냈다.

“심부름 하나만 더해라. 우리가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거든. 가능할까?”

꼬마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제 방법은요?”

중요한 질문도 빠트리지 않았다.

담대혁이 품에서 작은 금패를 꺼내서 보여줬다.

“만금전장 임원의 증표다. 이곳 만금전장에 가서 금패의 주인이 있으니 포목점 결제를 하고 이곳에 방문해달라는 말을 전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장돌은 담대혁이 생각보다 거물이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돈 떼일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환히 웃으며 서둘러 움직였다.

장돌이 객잔을 나간 뒤 일행들은 여주인의 안내를 받으며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다시 모였다.

“아~ 너무 개운해요!”

담소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애랑과 담가 남매는 그새 다녀간 장돌과 만금전장 직원 덕분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천 소협, 몸은 좀 괜찮습니까?”

담대혁이 천애랑의 부상 입은 팔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아 팔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내상이 아직 남았는데 그래도 간단히 움직이는 데엔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담 소협은 좀 어떤가요?”

“덕분에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안 물어보나요?”

담소연이 불쑥 천애랑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천애랑은 살짝 당황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작은 객잔이라 목욕에 사용하는 향료는 없었지만 담소연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소연낭자도 괜찮은가요?”

“훗. 엎드려 절 받기네요. 저는 피로가 남은 것 빼고는 완전 좋아졌어요.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천 소협.”

“하하하. 모처럼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것이니 모두들 어서 듭시다.”

담대혁이 여동생과 천애랑의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그때 객잔 창문으로 한 마리의 고양이가 넘어왔다.

고양이는 곧장 천애랑의 무릎으로 가서는 편히 자리를 잡았다.

천애랑은 자연스럽게 그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담가 남매는 의아하게 천애랑과 고양이를 보았다.

담소연이 눈을 빛냈다.

“어? 그 고양이는 뭐예요? 아는 사이인가요?”

담소연의 놀람에 천애랑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얼마 전 산에서 만났었습니다. 조금 다친 것을 구해줬더니 절 따라온 것 같네요. 일전에 안 보이기에 떠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만나네요.”

천애랑이 백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꽤나 고맙고 기특했다.

음살단과의 전투와 그 후의 치료에서 백호의 영기가 큰 도움이 되었었다.

천애랑의 고마워하는 마음이 통했는지 백호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내 백호의 표정이 새침하게 변하며 객잔 문을 쳐다봤다.

천애랑은 백호의 시선을 의아해하며 따라가자 마침 객잔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개가 보였다.

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덩치가 컸는데 누런 털의 몸에 흙과 피가 묻어있었다.

개는 코를 킁킁거리더니 곧장 천애랑에게로 다가왔다.

“응? 매듭?…… 개방?!”

담대혁이 개를 보며 놀란 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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