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11화
천애랑은 담대혁 머릿속의 나쁜 기운들이 백회혈을 통해 배출되도록 노력했다.
다만 사람의 신체 중 제일 중요하고 민감한 머리였기에 급한 마음에 비해 그 속도와 성과가 더뎠다.
한참을 끙끙대며 담대혁을 치료하던 천애랑 곁에 백호가 다가왔다.
크흥!
백호에게서 영기가 흘러왔다.
영기 덕분인지 담대혁을 괴롭히는 요기들을 배출하는 작업이 한결 수월해졌다.
한 시진(2시간)을 더 치료를 하고서야 담대혁의 머릿속을 괴롭히던 기운들을 백회혈을 통해 모두 빼낼 수 있었다.
천애랑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담소연에게 갔다.
담소연은 돌 위에서 묶인 채로 기절했었는지 뒤집어진 새우처럼 매우 불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머리로 피가 많이 쏠린 것 때문인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고 있었다.
머리로 피가 많이 쏠리면 몸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에 천애랑은 담소연의 자세를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어서 천애랑은 가부좌를 틀고, 무릎 위로 담소연의 머리를 올려 주었다.
머리로 쏠린 피가 자연스럽게 몸으로 흘러가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되면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담가 남매가 깨어나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한 천애랑은 차분하게 전신을 개방해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단전의 내공을 주천시키는 방법이 아닌 몸을 하나의 통로로 만들어 대자연의 기운이 오가게 하는 기공가 특유의 운기법이었다.
내공의 축적보다는 피로를 회복하고 내상을 치료하는데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가장 큰 장점은 기존의 운기조식처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는 갑작스런 운공 중단 시 큰 위험성이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았다.
즉, 혹시 모를 위험요소가 나타나더라도 언제든지 몸을 움직이거나 방어를 취할 수 있었다.
천애랑은 지노라는 노인과의 전투를 복기하며 명상에 빠져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애랑은 감고 있는 눈으로 여명이 밝아옴을 느꼈다.
“으…….”
그때 담대혁이 후유증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일어났다.
담대혁의 소리에 천애랑도 눈을 떴다.
“다행입니다.”
담대혁과 눈이 마주친 천애랑이 환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대화 소리에 담소연도 찌뿌둥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점혈을 당한 것마냥 몸이 굳어버렸다.
눈을 뜨자마자 바라본 천애랑 때문이었다.
지난밤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자신은 천애랑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담소연은 다 큰 처자가 남자의 무릎 위에서 잠을 깨는 상황은 연애소설에서나 나올 내용이라 생각했었다.
심지어 아침햇살에 빛나는 천애랑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이 꿈이 깨지 않았으면 했다.
담소연은 천애랑의 얼굴과 옷에 묻은 피를 보았다. 그리고 눈동자만 돌려 오라비인 담대혁의 피 묻은 얼굴을 보았다.
담소연의 눈엔 천애랑의 피는 그의 고독함과 외모를 더 빛내주는 것 같은데 오라비 담대혁은 너무 더러워 보였다.
담소연은 이런저런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얼굴을 붉히며 몸을 뒤척였다.
시선과 움직임을 느낀 천애랑은 담소연을 내려다봤다.
“아! 낭자도 다행입니다.”
천애랑의 따뜻한 눈빛과 미소에 담소연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하필 고개를 돌려도 천애랑의 몸 쪽으로 돌렸더니 남세스러운 장면과 마주했다.
담소연은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듯했다.
“소연낭자, 아직도 몸 상태가 안 좋습니까?”
천애랑은 점점 얼굴이 빨개지는 담소연을 보며 걱정을 했다.
완벽히 치료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후유증이 남았나 싶었다.
“아, 아니요!”
담소연이 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윽!”
“천천히 움직이세요. 아마 몸이 굳어서 그럴 겁니다.”
천애랑은 담소연을 챙기곤 담대혁에게 갔다.
담대혁은 여전히 상황파악이 안 되는 눈빛으로 주변을 파악하고 있었다.
“천 소협…, 여긴…?”
“혈교라는 곳에서 두 분을 납치했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런 일이 벌어져 죄송합니다.”
“아아…. 아닙니다. 천 소협이 죄송할 건 없지요. 요상한 여인들이 갑자기 공격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렇다면 그 혈교인들은……?”
“다행히도 늦지 않게 추격해서 손을 쓸 수 있었습니다만 대장이었던 자는 놓쳤습니다.”
“그럼 저들이……?”
담대혁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시선 너머에 있는 시신들을 가리켰다.
“예. 음살단이라고 하더군요. 채혈보음을 하는 이들인 듯했습니다. 아마도 담 소협을…….”
담대혁은 상상도 못 한 채혈보음(采血補陰)이라는 말에 기가 막혔다.
한마디로 자신이 요상한 여자들한테 피와 내공이 빨려 죽을 뻔했다는 것 아닌가.
그 방법이 어떤 식이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음살단이라……. 혈교의 인물들은 자료가 부족해서 잘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굴욕적으로 죽을 뻔했습니다. 으으… 절대 싫은 죽음이네요. 그나저나 또다시 구함을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천 소협.”
담대혁은 정중히 인사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으윽!”
“천천히 몸을 푸세요. 혈이 잡힌 상태로 장시간 있어서 몸이 굳었을 겁니다. 특히나 담 소협의 머릿속을 요기(妖氣)가 헤집은 탓에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으니 몸을 잘 추스를 필요가 있습니다.”
“아……. 그랬습니까? 어쩐지 머리가 너무 아프다 했습니다.”
“예. 제가 소협의 머릿속 요기들을 다 없애긴 했으니 당분간은 요양에만 집중합시다. 소연낭자도 몸을 추슬러야 하니까요.”
담대혁은 다시금 천애랑에게 감사인사를 건네고선 근처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 * *
콰앙!
보고를 하던 복면인이 벽에 처박혀 피를 토한 채 절명했다.
“실패? 실패라고?! 혈뇌! 지금 내가 받은 보고가 어찌 된 것이지?!”
혈교(血敎)의 교주 혈마(血魔)가 분노한 채 혈뇌를 채근하자 혈뇌의 흉측한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분, 분명히 성공했어야 맞습니다. 지노(地老)까지 보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무엇이란 말이냐!”
쾅!
혈마는 들고 있던 보고서를 강하게 쥐며 주먹을 내려쳤다. 혈마가 내려친 팔걸이가 산산조각이 나며 비산했다.
“담가 남매 외 정체불명의 남자가 상당한 고수였습니다. 마교의 실패도 담대혁이 아닌 그 남자의 짓인 듯합니다. 쿠실라 황태자 측에서 나온 정보를 너무 믿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지노를 보냈습니다만….”
“혈교의 머리라는 놈이 정보의 정확성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순수하게 믿었단 말이냐!”
혈뇌도 할 말이 많았지만 분노하는 혈마를 보며 잔뜩 고개를 조아렸다.
비록 초일류가 대부분인 음살단이라고 하지만 남자들에 한해선 막강한 상성을 자랑했고 음살단의 단주인 요향은 초절정 초입이라 무난한 임무가 될 줄 알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노까지 뒤딸려 보냈으니 임무 성공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있었었다.
이는 혈뇌 뿐만 아니라 혈마도 인지하고 승인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분노한 혈마 앞에서 이런 이성적인 설득은 의미 없었다.
평소의 혈마는 교활하지만 호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이였다. 하지만 매우 화가 났을 땐 혈마천심공의 영향으로 살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할 땐 친아들을 죽인 경우도 있었기에 혈뇌가 더욱 몸을 사렸다.
“용, 용서를!”
혈뇌(血腦)는 급히 부복(俯伏)하고는 대전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쿵! 쿵! 쿵!
혈뇌의 이마에서 피가 튀었고 바닥은 어느새 흥건히 피가 고였다.
혈마(血魔)는 혈뇌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을 뻗었다.
혈뇌의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머리가 들어 올려졌다.
“일어나라.”
혈마의 짧은 말에 혈뇌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졌다. 가공할 내공의 허공섭물이었다.
“혈뇌.”
혈마의 부름에 혈뇌는 주르륵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은 채 공손히 대답했다.
“하명하십시오.”
“지노(地老)가 뭐라 하던가?”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으나 혈교의 호법으로서 존재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혈마가 혈교의 교주가 되기 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혈교의 교주위에 오르면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는 존재.
혈마도 수많은 경쟁자들을 죽이고 지금의 교주 자리에 앉고서야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호법을 보게 되었다.
당시 천하10대고수로 칭송받으며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이 혈기왕성했던 혈마는 호법을 보자마자 충격을 받았었다.
화경이 되고도 경지를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이가 존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혈마는 팔 하나쯤을 각오하면 지노(地老)라고 밝힌 호법을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였지만, 굳이 교주가 된 날에 불확실한 모험을 하긴 싫다고 스스로 위안했었다.
그렇게 조금은 불편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지노는 혈교와 마교가 분리되기 전의 마교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소문도 있고 변절한 도사라는 소문도 무성했지만 정확히 알 방법이 없었다.
“지노(地老)가 큰 부상을 입은 요향(擾香)을 데리고 복귀 중이라고 합니다. 음살단(淫殺團)은 전멸이라고 합니다. 지노가 보낸 서신엔 남매를 호위하던 놈이 그랬다고 합니다.”
“왜 호위하던 그놈을 죽이고 남매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지?”
혈뇌는 난감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는 마저 대답했다.
“지노(地老)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추궁하고 싶어도…….”
평소 혈교의 임무에 군말하지 않고 잘 따르는 지노(地老)였으나 본인이 말하기 싫거나 하기 싫은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묵함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직위는 혈마가 당연히 높지만 그렇다고 지노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따로 조사를 해봐. 젠장! 실실 쪼개는 황실의 그 자식들이 우릴 우습게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혈뇌!”
“예!”
“쿠실라한테 사람을 보내. 정보의 출처 및 정확성에 대한 책임소재와 우리의 피해를 언급하고 적당히 협상하도록. 대신 요향이 회복하면 호위 겸 시녀로 보내준다고 그래. 잘 다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쓰임이 있을 것이니 선물이라고 그러도록.”
혈뇌는 혈마가 임무에 실패한 요향을 벌하고 그와 동시에 실리를 챙기려는 속셈임을 알았다.
“존명!”
* * *
천애랑과 담가 남매는 틈틈이 몸을 추스르며 계속 이동을 했다.
말과 짐 보따리를 모두 잃어버려서 그저 방향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갔다.
첩첩산중을 가로지르느라 어려움이 있었는데 특히 무공이 약한 담소연이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천애랑이 담소연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서 도움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담대혁이 여동생을 놀렸다가 두들겨 맞았다.
그 광경에 천애랑은 밝게 웃고 천애랑의 웃음에 담대혁도 따라 웃고 담소연은 쑥스러운 듯 때리던 손을 수습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생사의 고락을 공유했다는 유대감 때문인지 이들은 많이 가까워졌다.
“후아~! 드디어 심양이 보이네요.”
오늘도 여전히 여동생을 놀리고 맞던 담대혁은 드디어 멀리 보이는 심양의 성벽에 반가운 기지개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