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공술사 3화
허억. 허억.
백두산 깊은 숲속에서 젊은 남매의 거친 숨소리가 위태롭게 흩어졌다.
“소연아 조금만 더 힘내라. 조금만 더 가면 백두산을 벗어나겠구나.”
“하아……. 알겠어요. 오라버니, 진짜 집에만 가면 각오해요!”
담대혁은 여동생 담소연을 챙기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현재 생각지 못한 추격자들에 의해서 곤경에 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산동의 권문세가이자 대 학사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송나라 시기부터 승상과 수많은 관리들을 배출했기에 황실에서도 무시 못 할 세(勢)를 가진 가문이었다.
몽골족들이 원나라를 세우면서 이례적으로 담가(家)의 출사를 권했으나 한인(漢人)이라는 자존심 등의 이유로 절대 출사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던 중 예순테무르 황제가 죽자 황자들이 서로 황제가 되겠다며 황자의 난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황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입지를 가진 토그테무르 황자가 자신의 입지를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 담가의 사병들을 요구했다.
승상도 배출했던 가문이었기에 상당한 수의 사병이 존재했고 그 훈련 상태도 우수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담가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며 협조하지 않았다.
이에 토그테무르 황자는 협박을 일삼았지만 다른 황자들을 견제하느라 담가에 깊게 관여하진 못했었다.
그러다 담가 남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특별한 호위 없이 백두산으로 외유를 나갔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토그테무르 황자 측은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담가 남매를 납치하기 위한 사람을 보냈다.
납치, 협박을 통해 담가에게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함이었다.
그런 이유로 담가 남매는 백두산에서 갑작스런 살수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담대혁은 임기응변으로 환속진(幻謖陣)을 펼쳐 도망치기 시작했다.
평소 교류를 하던 제갈세가의 진법이 도움이 되었다.
제갈세가는 담가와 같이 산동을 기반으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공명의 후손임을 자처하기에 학식과 진법에 조예가 깊었다.
그렇게 두 가문은 지연과 학문이라는 공통점 속에서 오랜 기간 교류를 해왔다.
“저 둔덕만 넘으면…….”
곧 백두산을 벗어날 길을 맞이한다는 희망에 담대혁이 좀 더 힘을 내었다.
그러나 희망은 곧 절망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눈만 보이는 복면을 한 이가 비도를 손가락들 사이로 굴리면서 담가 남매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 자 혼자인 것 같으니 빨리 따돌리고 도망가요.”
담소연의 말에도 불구하고 담대혁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진법을 익히다 보면 내공을 가미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자연스레 내공심법과 무공을 익힌 담대혁이었다.
나름 절정의 무위를 목전에 두고 있다지만 눈앞의 복면인을 보니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몸을 쉬이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소연아… 그게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예? 그 정도예요?”
“하아…. 내가 무슨 절대고수는 아니잖느냐. 이거 큰일 났네.”
담소연은 가문의 무사들이 담대혁의 성취를 극찬하는 것을 봤었고, 조금 전에도 담대혁의 기지(奇智)로 살수들을 따돌렸기에 담대혁에게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오라버니가 저렇게 긴장하는 표정은 처음인지라 담소연은 상황의 심각성을 순식간에 느꼈다.
“본좌는 살마일세. 들어는 봤는가?”
“살마……!”
담대혁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무림인명록이 스쳐지나갔다.
정계(政界)에 잔뼈가 굵은 가문인 만큼 사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항시 기회가 될 때마다 중요한 인물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해왔다.
그중 마교 상위 서열의 고수로 알려진 살마단의 단주 살마의 정보 또한 있었다.
“호오~ 샌님이라고 무시했는데 본좌를 아는가 보구나. 기분이니 죽이지는 않으마. 하지만 날 이 먼 곳까지 오게 해 고생시킨 벌은 받아야겠다.”
살마가 담소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이, 이……!”
담소연은 수치심에 옷깃을 더욱 꽉 여미며 뒷걸음질 쳤다.
그때 담대혁의 진법을 빠져나온 살마단원들이 다가와 주위를 포위했다.
“수고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살마단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살마에게 말했다.
“쯧쯧, 네놈들은 교에 돌아가면 죽었다 생각해라.”
살마단원들이 오싹함을 느끼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살마는 한다면 하는 인물이었고 다소 변덕스러움이 강해서 사사로운 것에도 목숨이 오가는 경우가 많음을 살마단원들은 잘 알고 있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한다.”
살마가 흥얼거리며 담소연을 향해 걸어갔다.
담대혁은 담소연의 앞을 막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큭큭. 귀엽구만 그래.”
살마는 비도를 가지고 놀면서 담대혁을 향해 여유 있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저기….”
갑작스런 목소리에 살마는 물론 장내의 모두가 움찔거리며 목소리의 근원지에 시선이 모였다.
그곳엔 검은 단발머리의 잘생긴 젊은 청년이 서있었다.
어느 누구도 청년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해 당황과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길 좀 묻겠습니다. 여기 산에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태연한 청년의 말에 잠시 적막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내 당황한 살마가 부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익! 네놈들은 뭐하는 것이냐! 누군가 접근할 때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더냐!”
살마의 불호령에 놀란 살마단원들이 황급히 포위를 좁혔다.
“누구냐?!”
살마는 아무리 순간적으로 음심(淫心)에 빠져 있었다지만 자신의 눈을 속인 채 나타난 사내에 대해 경계하며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나 청년은 살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담담하게 되물어왔다.
“거참 길 좀 물었다고 뭘 그렇게 사납게 쳐다봅니까. 그 기분 나쁜 기운은 뭐고요.”
단발머리 청년, 천애랑이 인상을 쓰고 살마를 쳐다봤다.
* * *
천애랑은 그간 살아왔던 진법에서 나오자마자 기공가의 터를 찾아봤다.
하지만 모든 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20년이면 강산이 2번은 바뀌었을 텐데.”
천애랑은 가문의 흔적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기지개를 켜며 가볍게 털어냈다.
“어휴 날씨 좋네.”
처음 나온 진법 밖은 화창한 가을 날씨를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나.”
천애랑은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차분히 걷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천애랑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생애 첫 진법 밖의 경험이니 여유를 갖고 싶었다.
여유롭게 걷는 그에게 있어 지금 보이고 느껴지는 나무, 수풀 내음, 바람 등은 진법 안과 같으면서도 다른듯했다.
“응?”
한참을 걷던 천애랑은 갑자기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에서 자연의 흐름을 뒤트는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천애랑은 한달음에 호기심을 끄는 장소로 달려갔다.
해당 장소에 도착하니 몇 개의 주술석(呪術石)으로 만든 흥미로운 진법이 있었다.
천애랑은 궁금증에 주술석을 옮겨 진법을 흐트러뜨렸다.
그랬더니 진법 안에서 정체불명의 무인들이 우르르 빠져나와 황급히 어딘가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뭐야?”
천애랑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바라봤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네.’
천애랑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빨리 사람들을 만나다니.’
천애랑은 왠지 저들을 쫓으면 중원으로 하산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애랑은 무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빠르게 뒤쫓았다.
‘역시나!’
아까의 무인들을 쫓았더니 길을 물을 사람들이 한가득 있었다.
시작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난생처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니 설렜다.
여하튼 기회를 놓치기 전 길을 묻기 위해 저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갔다.
“길 좀 묻겠습니다. 여기 산에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천애랑은 갑작스런 적막이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왜 소리는 고래고래 지르고 난린가. 심지어 기분 나쁜 기운까지 쏘아대면서.
“거참 길 좀 물었다고 뭘 그렇게 사납게 쳐다봅니까. 그 기분 나쁜 기운은 뭐고요.”
툴툴댔더니 어둡고 무거운 이상한 기운까지 쏘아댄다.
천애랑의 표정이 굳었다. 처음 느껴보는 성질의 기운이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아! 무림엔 은원이 가득하니 그 사이에 함부로 끼지 말라 하셨지.’
천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없었네. 이들의 은원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저들이 저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이는 거였나 보네.’
천애랑은 주위를 살폈다.
‘그래도 언제 또 사람을 만날지 모르니까 이 기회에 길은 좀 알고 싶은데…….’
그런 천애랑의 시선에 인상이 좋아 보이는 젊은 남녀가 보였다.
천애랑은 젊은 남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당신들은 길을 좀 아실까요?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요. 아! 물론 당신들의 은원엔 간섭할 생각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담소연은 목숨이 오가는 이 상황에서 해맑게 말하는 천애랑을 보며 다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담대혁은 눈앞의 청년이 자신들의 동아줄임을 직감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절정극의라고 추측되는 살마의 시선까지 속이고 나타났다면 상당한 보법의 고수임이 확실했다.
심지어 좀 전엔 살마가 마기와 살기를 쏘아내는 것 같았는데, 그것을 아무런 반응 없이 받아낸다는 것은 최소한 살마와 공방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려보이는 외관을 보니 살마를 이길 가능성은 적겠지만 그래도 현 상황을 개선하는데 최선의 선택지임은 확실했다.
이 자가 살마를 잠시 붙잡아 준다면 빠르게 진법들을 연계해서 도망을 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섰다.
“제가 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원이라 하였는데 우리 남매는 그저 저 마교인들에게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이외의 사람과 하는 첫 정상적인 대화에 뿌듯함을 느끼던 천애랑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담대혁은 갑자기 사늘하게 변한 청년의 표정에 자신이 어떤 말실수를 했는지 되새겨봤다.
“마교라고 했나요?”
담대혁은 천애랑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작은 떨림과 분노를 느꼈다.
담대혁은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자가 마교의 간부 중 하나인 살마인데 혹시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다면 제가 꼭 사례를 하겠습니다. 혹여 여의치 않으시다면 저는 괜찮으니 여동생만이라도 부탁 좀 하겠습니다.”
담대혁이 간절한 표정으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천애랑은 그제야 담대혁을 자세히 보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선 일말의 고민도 없어 보이는 의연함, 그러나 여동생을 걱정하는 선한 마음이 그의 요동치는 내기에서 느껴졌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엿보이자 천애랑은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마교……, 마교라……. 여기 그대로 있으세요.”
천애랑은 담가 남매에게서 몸을 돌려 살마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마교의 간부라고요?”
“허!”
살마는 천애랑의 건방진 태도가 어이없었다.
감히 자신의 앞을 막았다는 불쾌감에 살심이 끌어올라 손에 쥔 비도를 당장이라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인물을 파악하고 싶은 경계심이 잠시 숨을 돌리게 했다.
“그렇다만 네놈은 누구지?”
“마교가 맞다고요? 저기 부하 같은 이들 또한 마교인이겠구요?”
살마의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살마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 그러는 넌 누구지?”
천애랑이 환하게 웃었다.
갑작스런 천애랑의 웃음에 살마를 포함한 모두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아아, 할아버지! 이것은 선물인가요? 운명인가요?”
갑자기 하늘을 보며 웃던 천애랑이 돌연 정색을 하고 손가락을 펼쳤다.
피피핏---!
천애랑의 손가락에서 내기가 응축된 탄지공이 살마단원들을 향해 날아갔다.
내기를 끌어올리고 발출하기까지가 한 동작으로 보일 만큼 빠르고 자연스러워 살마단원들이 미리 대응하지 못했다.
“크학!”
대여섯의 살마단원이 갑작스런 공격에 미간이 뚫리며 즉사했다.
거리가 있었던 몇몇은 급히 단검으로 쳐냈지만 상당한 반탄력에 잠시 몸을 추슬렀다.
“시건방진 새끼가!”
살마는 수하들의 죽음보다 자신을 앞에 두고 무시하는 듯한 천애랑의 태도에 더욱 분노했다.
살마가 더는 참지 않고 비도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천애랑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천애랑은 파리를 내쫓듯 가볍게 손을 저어 살마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살마는 자신의 공격이 가볍게 파훼되어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독침들을 날렸다.
당가의 만천화우 정도는 아니어도 무시 못 할 수십 개의 독침이 쏘아졌다.
하지만 이조차 천애랑의 진각에 의해 솟아오른 땅거죽이 쉽게 막아내었다.
“고수다! 차륜살마검진을 펼쳐라! 오직 놈에게만 집중해라!”
살마의 외침에 살마단원들이 담가 남매의 포위를 풀고 일제히 천애랑에게만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