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 (4)
“……으음.”
천마가 침음을 흘리며 양팔을 휘둘렀다.
낡은 장포가 허공을 누비는 곳마다 불길한 마기를 흩뿌렸다.
천마신공.
고대에 만마가 힘을 합하여 만든 신공엔 ‘한 걸음으로 군림하는 걸음’이 있었고, ‘장강마저 증발시키는 장법’이 있었다.
그러나 백무량이 펼친 검 앞에서는 손색이 있었다.
“이토록 막강했던가.”
천마는 휘둘렀던 양팔을 모으고는 앞으로 내질렀다.
쌍마멸천장.
거리 하나를 송두리째 없애 버리고도 남을 잔악한 마공이 모산 정상에서 펼쳐졌다.
꽈꽈꽝!!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수고서 전진하는 두 마리의 마룡.
백무량은 그 앞에서 꼿꼿하게 섰다.
“……가 부족해.”
엄청난 소음 탓에 앞의 목소리가 가려졌다.
하지만 백무량 뒤에 있는 현종휘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궁리가 부족하지 않나.”
“역시.”
백무량이 씨익 웃었다. 현종휘가 한 말이 맞았다.
궁리.
무인을 떠나서 사람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한 것.
그 궁리가 천마에게는 없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강자였던 이에게 궁리란 불필요했다.
저만한 마기, 마공을 가지고도 힘을 그대로 휘두르는 것이 끝이라면 얄팍하게 보일 뿐이다.
천마는 여전히 고대의 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배워 봐라. 수백, 수천 년 동안 도문이 축적한 궁리를…….”
백무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마룡과 균천관일이 부딪쳤다.
쩌적, 쿠구구궁!
마기로 이루어진 두 마룡이 균천관일을 머리로 밀어 냈다. 그대로 되돌려주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바로 그때 천마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인정하마, 그대는 강하다.”
“……!”
“하지만 결국은 피육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한계가 있을 터.”
천마가 다짜고짜 팔뚝을 휘둘렀다.
반원으로 휘둘러진 팔꿈치에 절벽을 무너뜨리고도 남을 경력이 실려 있었다.
백무량의 오감이 강하게 맥동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을 시선과 기색으로 읽어 냈다.
‘흩뜨리겠다는 건가.’
그것이 정신이든, 육신이든 어느 쪽이든 무너지면 백무량이 패배할 터였다.
전자라면 균천관일이 무너져서 마룡이 백무량에게 내리꽂히고, 후자라면 천주가 무너질 테니까.
백무량은 어느 쪽도 질 수 없었다.
‘승패를 떠나서, 저런 놈에게 질 것 같으냐……!!’
이름은 천마지만, 고작 오래 산 마물일 뿐이다.
저놈을 이기지 못한다면 검해를 해체하여 모든 걸 되돌리는 것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백무량의 의념이 천추했다.
쿠구궁……!
강기의 일부분이 옆으로 떼어졌다.
천마의 눈동자가 잠시 옆으로 돌아갔다가, 그의 몸이 옆으로 뉘었다.
그 순간에 백무량이 펼친 해결, 파도의 비검술이 천마의 옆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
격전을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에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저렇게 자유로운 무형의 연환 검술이라니!
자하신공이나 대주천복마검조차 이루지 못한 미답의 경지에 백무량이 있었다.
하물며 천마조차도 감탄을 아끼지 못했다.
“과연…… 예전보다 지금은 무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였구나!”
하지만 여기서 끝날 수 없다는 듯, 천마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여흥이다. 과거의 도사에게도 펼치지 않았던 절기를 보여 주마.”
쿠르르……!
모산과 맞닿은 언덕과 절벽이 크게 흔들렸다.
아주 사소한 틈.
바위와 바위 사이에 물이 흘러 만들어진 길에 마기가 침투했다.
그 길이가 무려 한 마을을 검은색으로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경력이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힘 앞에서 백무량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천마가 행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상단전의 감각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감이 좋구나.”
천마가 좌수를 좌에서 우로 휘둘렀다.
“이것이 만마의 주인이 행하는 힘이요, 권능이로다.”
쩌적, 쿠르르르릉……!!
거대한 암반이 허공에 떠다녔다. 백무량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암반의 그림자에 어둡게 물들었다.
그 사이에서 오직 청노만이 천마의 힘에 전율하곤 짙은 미소로 화답했다.
“역시! 만마의 종주이십니다!”
천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수를 아래로 내리쳤다.
암반이 백무량과 침투조를 향해 낙하했다.
“어디, 실력 좀 볼까?”
“……네놈!”
“피하려거든, 네 뒤에 있는 놈들은 죽게 두어야 할 것이다.”
천마의 말에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균천관일과 쌍마멸천장.
거대한 암반의 낙하.
천마와의 다투는 일까지.
하나같이 어려운 일이었으나 해내야만 했다.
침투조 전원이 상승 고수라고 한들 마기가 깃든 암반을 쳐 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바로 그때.
유성한의 몸에 기거하고 있던 유성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네가 할 일을 해라. 우린 암반을 쪼개 보겠다.”
“하지만……!”
“한눈을 팔 상대가 아니다. 얼른!”
유성백의 목소리에 백무량은 정신을 집중했다.
천마, 그리고 그가 펼친 쌍마멸천장.
백무량의 검이 유려하게 곡선을 그렸다.
스르릉!
강기에서 이어지는 해결과 천결이 천마를 압박했다.
그때마다 천마가 역습을 꾀하곤 했지만, 어렵지 않았다.
‘암반이 문제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해 주겠지.’
암반을 밀쳐 내지 못하면 꼼짝없이 죽을지도 모르는 간극에 있었다.
하지만 불안하진 않았다. 이곳까지 온 동료를 신뢰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청노가 입술을 열었다.
“제가 놈들을 방해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여라.”
천마의 동의가 떨어지자 청노가 땅을 박찼다.
백무량의 옆을 지나면서 순식간에 부적을 여러 장 흩뿌렸지만, 별 소용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갚아 주었다.
‘창천명월.’
백무량의 경력에서 떨어진 비검이 청노의 오른팔을 베었다.
“끄아악!”
비명을 내지른 청노가 백무량을 노려보고는 침투조를 향해 달려갔다.
백무량은 그 모습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만일 부적을 흩뿌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면 빈틈이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백무량은 그에게 시선을 떼고서 천마에게 한층 더 집중했다.
쌍마멸천장이야 균천관일에 계속 검해를 주입한다면 손쉽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장본인이다.
“후우…….”
숨을 지극하게 고른 백무량이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눈은 천마의 전신을 누볐다.
근육의 사소한 움직임.
체중이 쏠리는 방향.
그 하나하나가 천마의 움직임을 읽게 해 주었다.
백무량이 천마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무학의 발전이요, 무학으로 공들여 쌓은 경험과 무공이라는 탑이었다.
그에 반해 천마는 어떠한가.
“잔재주가 언제까지 통할 성싶으냐……!”
쿠쿠쿠쿵!!
가공할 만한 마기가 백무량의 전신을 억눌렀다. 기혈이 뒤틀리고, 관절이 짓눌리는 통증이 덮쳤다.
그러나 버텨 냈다.
천주가 단단하게 버티는 삼단전의 공능으로, 두 번째 삶을 가열하게 살아가는 정신으로…… 두 눈을 부릅뜨며 버텼다.
“크, 결국 하는 짓거리가 힘자랑이라면.”
거대한 힘 앞에서 대항할 수 있는 수단.
그것이 바로 무공이다.
백무량의 몸이 한 바퀴 휘돌았다.
지렛대를 이용해서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리고, 바퀴로 움직이듯.
백무량은 어릴 적부터 배우고 익힌 무학의 신묘한 기예를 천마 앞에서 펼쳤다.
사량발천근(四量發千斤).
넉 냥의 힘으로 천 근의 힘을 튕겨 낸다는 고등한 기예다.
무당파에게 배운 태극의 무학과 경파를 검해로 절묘하게 뒤섞었다.
쩌적!
백무량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걸 본 천마가 희미하게 웃었으나, 뒤이어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 안에 담긴 감정은 짜증과 분노였다.
“네, 놈.”
두 음절을 말하기도 전에 마기가 천마를 덮쳤다.
꽈앙!
크나큰 파음이 모산 정상을 뒤덮었다.
찰나의 순간에 자기 기운을 거둬들이기는 했지만, 충격까지 흡수하진 못한 것을 보았다.
백무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가라!’
스각!
두 마룡을 찢어발긴 균천관일의 파도가 천마를 재차 덮쳤다.
백무량의 발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하!”
검해가 담긴 백선신검의 검봉에서 희끄무레한 검경이 맺혔다.
구천화우검의 삼초, 호천풍연.
허공에 서린 흐릿한 기운이 제단과 함께 천마를 씹어먹으려는 듯,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절기를 연거푸 펼치는 과정에서 암반은 깨끗하게 잊었다.
‘여기서는, 종휘를 믿는다!’
팔 년.
짧다면 짧다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심하고 어렸던 꼬마는 자기 의지를 갖추고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고수로 장성했다.
‘그 아이라면, 아니 내 제자라면 할 수 있어.’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안력을 돋웠다.
아직도 기력이 쇠하지 않은 채, 천마가 검붉은 안광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구나.”
“모두…… 짜부라뜨려 주마……!”
천마의 마기가 사방으로 폭사했다.
그 기운은 모산 전체에 맞닿아서 생기를 빼앗고, 뒤틀었다.
그건 저 멀리서 낙하하고 있는 암반도 마찬가지였다.
***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마을 하나를 거뜬히 뭉개 버리고도 남을 암반.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 규모에 남천이 현종휘에게 재차 물었다.
“방법이 있느냐? 있다면 따르마.”
“그건…….”
딱히 없다.
현종휘는 그 말을 담지 않았다.
다만 품고 있던 한 가지 예감을 내뱉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말이냐?”
“아니요, 제가요.”
현종휘가 당차게 한 말에 다른 십대고수들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힘을 모으는 것도 아니고, 너 혼자서 말이냐?”
혹여 마기가 상단전을 침습한 것이 아닐까?
그 의문이 한껏 들어 있는 물음에 현종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 걸음을 걷고서, 맨 앞에 있는 유성백의 어깨를 붙잡았다.
“성한아, 아니 이름 모를 선배.”
“……?”
“선배는 저를 믿으십니까?”
그 말에 유성백은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믿지.”
“왜입니까?”
“네가 백무량의 제자이고, 후배니까.”
그 대답에 현종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틀렸습니다.”
“……그러면?”
“저는 사조님의 제자이긴 하지만, 진전을 잇진 않았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무(武)의 재주(術)가 있었고, 나만의 길을 만들었으며(道), 축적하여 무언가를 만들었지요(功).”
현종휘가 고개를 들었다.
모산을 그림자로 물들이는 암반을 보고서 백무량이 한때 흘러가듯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무술은 그저 재주.
무도는 일신의 재주로 체계를 만든 수준이며.
무공은 하나의 업(業)을 이루고도 남는다고 하였다.
현종휘는 자기가 이룰 업이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먼 옛날, 검선 여동빈이 마룡을 참하였던 것처럼.
“지금은 나의 무공을 증명할 때입니다.”
현종휘는 검을 쥐었다.
백무량처럼 사문의 고검을 가지거나 천의를 이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남겨진 것이 없다고, 기연이 없다고 하여 주저앉을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곤륜의 도사, 현종휘이기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현종휘는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청노와 낙하하는 암반을 보며 태청신공을 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