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 (3)
“암구호, 잘 들었다. 네가 말한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백무량은 현종휘의 어깨를 두드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걸음에 확신이 있었다.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누구든 갖게 되는 흔한 자신감 혹은 궁구하게 익힌 무학에 대한 자존심.
그것이 백무량의 걸음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꺾어 부술 수 있겠다는 확신.
천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상대할 가치가 있겠군.”
침투조를 휩쓸기 위해 휘둘렀던 마기의 파도가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천마의 시선에 백무량은 바다를 두르고 있었다.
우스운 표현이지만, 분명히 그러했다.
“하늘과도 같은 바다를 지니고 있구나.”
곤륜의 검해.
아니, 이제는 백무량의 검해였다.
천주라는 거대한 기둥 상부, 상단전에 담긴 검해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경지.
백무량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의념을 집중하는 과정조차 생략했다.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행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검해를 손으로 떠서 휘두른다는 느낌으로.’
무학(武學)의 경계를 부순다.
단순히 무(武).
강한 일격을 펼쳐서 상대를 무찌를 수 있다면, 누구보다 더욱 강한 것을…… 백무량은 가지고 있었다.
검해.
망검을 시작하여 많은 선배가 가꾼 심상(心象)이자, 곤륜의 심원(心源).
그곳에 백무량의 모든 것이 있었다.
무학을 단련하고, 궁리하여 새로이 만든 초식을 담았다.
무림맹에서는 다른 도문의 무학을 새로이 배웠다.
‘담고, 고쳤다.’
자신이 펼칠 수 있게 개량하여, 검해 아래에 두었다.
다만 검해를 모두 소모하는 행동에 망설임이 있다면 단 하나.
‘선배, 사형.’
[안다. 이제 슬슬 꺼지라는 거겠지.]
심천검이 히죽 웃었다.
그의 옆에 있는 주백천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검해를 소모하면 그곳에 기거하고 있는 혼백의 거처를 없앤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심천검과 주백천이 어디로 갈지는 몰랐다.
무공에 대해서라면 초월자에 가까워진 백무량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걸고서, 하나의 약속을 입에 담았다.
‘검해의 마지막 전인(傳人)으로서, 곤륜의 후배이자 사제로서 말하겠습니다. 어디든 버티고 계십시오. 반드시 되찾으러 가겠습니다.’
[하하……! 말이라도 고맙다!]
심천검은 씩 웃고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위로 크게 뻗었다.
하늘을 꿰뚫으려는 듯, 강맹한 기세가 실린 일권이었다.
[가서 패 죽여라. 절대 지지 마라.]
‘예.’
백무량도 씩 웃고는 주백천의 표정을 살폈다.
‘사형…… 연호랑 함께 기다리고 계십쇼.’
[기다리고 있으마. 그러니, 이겨라.]
주백천의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둘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검해를 두 손으로 떴다.
두 혼백의 기척이 엷어지는 것을 느꼈으나, 일부러 보지 않았다.
그저 앞을 보았다.
천마의 무심한 얼굴을 부수고 싶은 마음, 이 지긋지긋한 마교의 굴레를 끊고자 하는 의지가 커졌다.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이것이, 검해다.”
쏴아아…….
자그마한 물결이 파문을 그린다.
검해의 심상.
백무량의 상단전에서 시작된 파문은 경계를 부수고서 밖으로 조금씩 고개를 들이밀었다.
촤아아아……!
바다의 잔물결이 모산 정상을 휩쓸었다.
“크윽……!”
후방에 있는 침투조조차 몸을 지키는 것이 한계인데, 정면의 천마와 청노는 어떠하겠는가?
천마의 안색이 처음으로 달라졌다.
감정 따윈 모른다는 것처럼 무심하던 얼굴에 실금이 그어졌다.
“이건 종잡을 수 없군.”
종잡을 수 없다.
분명하지 않은 낱말이었으나, 천마는 핵심을 보고 있었다.
검해에 녹아 있는 것은 곤륜을 중심으로 한 모든 도문의 무학.
백무량은 그것을 퍼다가 휘둘렀다.
언뜻 보기에 무성의하고, 형식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체계가 있었다.
‘곤륜검해, 삼식(三式). 해결(海決).’
검해의 파도가 비검처럼 쏘아졌다.
허공이 스스로 길을 비키고, 천하를 어둡게 물들이던 구름이 찢어졌다.
“이건……!”
천마의 낯빛이 굳어졌다.
비검술이란 무엇이던가?
결국은 꾀(術)에 불과하다.
내공이든, 의념이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날아갈 뿐인 칼날이었다.
한데 백무량의 비검술은 뭔가 달랐다.
낙매신검이 휘날리는 매화잎 속 검법과 비교해도 판이하게 높은 수준이었다.
“영기와 선기인가.”
신단으로 쌓은 영기와 성지에서 얻은 선기가 파도에 생(生)을 불어넣는다.
백무량이 휘두른 비검에 무학의 일부분이, 혹은 대부분이 담겨있었다.
도문의 무학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 이상, 깰 수 없다.
본질을 꿰뚫어 본 천마는 방법을 정했다.
“깨부숴 주는 수밖에.”
“생각한 것이 겨우 그거냐?”
백무량은 피식 웃고는 검해에 손을 담갔다.
찰랑이는 파도, 파도끼리 부딪치며 생기는 거품 하나 마다의 알갱이.
사소한 물줄기에도 무학이 잠들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자기 의지대로 퍼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대로 해 봐라, 어디 한번.”
크게 퍼서 휘둘렀다.
손을 담구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인 행동일 뿐. 퍼 가는 양에 대한 제한은 없었다.
망검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도사가 가꾸고, 백무량이 완성한 힘.
검해의 바다가 천마와 청노를 덮쳤다.
“큭……!”
콰콰콰콰!
물보라가 휘몰아쳤다.
파도이자 폭풍이었고, 무학의 집합체였다.
지금까지 수백 혹은 수천 년 동안 쌓은 업.
곤륜파의 도사들이 모아온 무학의 바다가 두 마인을 밀어붙였다.
이것이 바로 백무량이 검해를 다루는 두 번째 법식.
‘이식(二式), 천결(天訣).’
바다가 또다른 하늘이 되어 적을 짓누른다.
부처의 손바닥이 손오공을 짓눌렀듯, 압도적인 힘이 뒤섞였다.
그러나 한계는 있는 법.
천마가 마기를 한껏 흩뿌리다가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두 비워 내면 끝날 힘이구나……!”
“…….”
백무량은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천마의 말이 옳았다.
검해란, 천의를 이루기 위해 망검이 만든 곤륜파만의 심상.
바다를 모두 퍼서 쓰게 된다면 다시 채울 수 없다.
백무량이 근본으로 삼은 심상이 쩍쩍 말라붙는 셈이었다.
-더 이상 무인이라 칭하기도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무량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어쩌라는 거냐.”
“……뭣?”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여기에 왔다. 그것 외에 생각하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 결의.
백무량은 어깨에 짊어진 짐의 무게를 어렴풋이 느꼈다.
제법 컸지만 무겁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벼웠다.
천마를 죽이고 검해를 해체하고, 쪼개서…… 심천검을 비롯해 주백천과 주연호를 찾는다.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 거뜬히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짐.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볼까?”
백무량이 오른손으로 쥔 백선신검.
칼날의 끝에서 검해로 이루어진 불투명한 강기가 맺혔다.
척 보기에는 검강처럼 보이지만, 평범한 것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저건!”
“……!”
강기의 정체를 알아차린 두 고수의 표정이 굳었다.
척준환과 낙매신검.
두 문파를 대표하는 무학의 정수가 백무량이 자아낸 강기에 있었다.
“대주천복마검을……?”
“허, 아니, 자하신공을 어찌 곤륜의 무학처럼 사용한단 말인가!”
검해에 담긴 것들.
다른 도문이 보면 피를 토하거나 눈을 부릅뜰 무학이 연거푸 강기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 강기를 본 천마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군. 힘을 소모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다룰 수 있다는 건가.”
백무량이 펼친 두 초식은 검해를 소모하여 펼치는 기예지만, 저 강기는 백선신검에 두르고서 휘두를 수 있었다.
하물며 백선신검은 도철에 의해 고검(古劍)에서 명검으로 재탄생한 상태.
무르거나 단단하기만 하지 않다.
백무량은 천마에게 승리를 선언하는 것처럼 당당하고 굵은 목소리로 기예의 이름을 말했다.
“파결(波訣). 너와 맞붙기 위해 만든 검해의 일식(一式)이다.”
무인이란 자기가 가진 것을 무작정 휘두르기보다 다루길 바라는 족속이다.
천결과 해결은 결국 파결로 해결하지 못하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펼치기 위한 방도일 뿐.
백무량의 선택한 검은 검해 그 자체였다.
“자, 그럼…… 끝을 내볼까?”
마물과 도문.
천마와 백무량.
수백, 혹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지긋지긋한 굴레와 역사를.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청진기가 온몸을 휘돌고, 천주를 거쳐 일천세맥에 다다랐다.
꽈악.
백선신검을 쥐는 것만으로 모산의 정경이 휘청거리고, 나뭇가지가 내려앉는다.
백무량은 천마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절제되지 않은 기운이 주변을 휩쓸고 있건만, 보신경엔 산보를 나온 듯 고요했다.
그 광경을 본 천마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과연, 악연을 끝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대다.”
악연.
천마에게도 무언가 뒷이야기가 있을 테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백무량이란 무인에게 그저 천마는 적이요, 격퇴해야 할 마인일 뿐이다.
천마 또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피차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와라. 선수(先手)는 양보하겠다.”
“사양하진 않으마.”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쥔 채 달려들었다.
놀라우리만큼 재빠른 보신경에 여러 무학과 묘리가 녹아 있다.
그 모습을 본 청노가 가볍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천마를 돕기 위한 주술을 짜 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장본인이 원하지 않았다.
“하찮은 짓으로 끼어들지 마라.”
“커헉!”
한 마디에 담긴 경력에 청노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잠시나마 천마의 기운에 취한 채 침투조 전원을 동시에 상대했던 그로서는 전신이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강대한 고수일지라도 단숨에 절명시키고도 남을 힘.
그 강대함을 다시 체감하고서야 확신했다.
“역시…….”
이 싸움은 반드시 천마가 이긴다.
제아무리 백무량이 천의를 잇고서 각고의 노력을 했다고 한들, 고대로부터 생존해 온 천마와 비견될 수 없다.
무(武)란 시간으로 깎기 마련.
재능 또한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시간을 줄이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무수한 시간을 살아온 만마의 주인과…… 일개 도사 따위가 비견될 리가 없지!’
청노가 품은 확신은 첫 격돌에서 증명되었다.
“음.”
백무량의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공력의 우위를 넘어서 육체의 차이가 컸다.
백무량은 결국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고, 천마는 가히 석산(石山)에 가깝다.
하물며 내부가 진탕되는 건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후.”
백무량은 숨을 골랐다.
지극하게, 깊게, 그리고 옆사람조차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고요하게.
위기가 가까웠기에 처음으로 돌아갔다.
처음 곤륜파의 호흡을 배울 때, ‘무공’에 가장 집중하던 때로.
초심으로 검해를 대했다.
콰르르……!
백선신검이 바다를 토했다.
“처음에는…….”
구천화우검의 일초, 균천관일.
백무량의 검은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