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 (3)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당금의 무림은 많은 오해와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교와의 전쟁이니, 무림맹 또한 사교가 만들어 낸 악행의 결과이지요.”
“…….”
“그걸 알고도 계속 두고 본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계속 두었다가는 선(善)의 방향이 틀어지고 말 겁니다.”
악행이 선행이 되고, 자신의 자식을 바쳐 재산을 부여받는 게 미덕이 되는 세상.
특히 청노는 술법사이기보다 주술사이기에 인신공양에 능했다.
어쩌면 자기 입맛에 맞는 마수를 새로이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고.
백무량이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천리(天理)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낙매신검은 담담한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어 갔다.
“호법님들께서 품으신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가 멸문지화로 돌아오는 시대라 두려우시겠지요.”
“…….”
“하지만 인연을 믿습니다.”
낙매신검의 미간이 좁혀지더니 깊게 파였다.
“화산파는 마교에게 많은 것을 잃었고 그로 인해 얻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보잘것없는 이름과 멸시였지요. 그러나 백무량이 진무월 사조의 무공을 우리에게 베풀었습니다. 전 여기서 인연을 느낍니다.”
“……치기일지도 모른단 생각은 안 해 봤나?”
정중산은 잘려 나간 자신의 오른팔을 앞쪽으로 보이며 깊은 후회를 드러냈다.
“나는 지금껏 불매향을 기치로 삼아, 백련교의 잔당과 수없이 싸워 왔다 여겼네. 그런데 사실 백련교는 이번 싸움에 관련도 없었다지?”
“하나…… 사백!”
“사실이 그렇게 밝혀진 이상 나는 화산파를 쇠락으로 이끈 천치밖에 되지 않네. 만에 하나라도, 다시 화산파가 쇠락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그것만은, 내 대에선 용납할 수 없네.”
정중산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너무도 고독하고, 슬퍼 보여 낙매신검은 함부로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때의 혈기는 사라진 지 오래야. 나는 화산파의 정기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라네.”
“옳았던 일입니다.”
낙매신검은 목소리에 힘을 담았다.
“아무리 백련교가 허상이었다고 한들, 그들은 세상을 어지럽히려던 마교였습니다. 한데 어째서 천치란 말입니까?”
“…….”
그 말에 정중산은 침묵했다. 반면 정파로는 입술은 무겁게 닫혀 있었지만, 눈에는 여전히 무기력함이 남아 있었다.
“근래 무림에서 도리(道理)라는 말을 꺼내면 바보가 아니냔 비아냥거림을 듣는다 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강호의 도리가 웃음거리가 되었는가.
낙매신검의 목소리가 자못 무거워졌다.
“화산파가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 하늘의 심판을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화산은 정(正)의 길을 걷습니다. 설령 그 길로 인해 참담해지고, 고통받는다 한들 그러할 것입니다. 그것이 여동빈 이래로 남겨진 우리, 도맥의 숙제 아니겠습니까……!!”
정도(正道), 도리(道理).
그 길을 걷는데 눈치를 봐서야 어찌 도맥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낙매신검의 혼이 실린 울부짖음에 정파로는 흐렸던 눈이 맑아지는 듯했다.
정중산 또한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웃음 지었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기에 화산인가.”
우뚝.
긴 시간 동안 침묵하고 있던 양대호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대로 저들이 오도록 그냥 둘 순 없어.”
칠성교주는 아주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처음 위기를 느꼈다.
가면 아래에 땀이 차서 축축해질 정도였다.
그 긴장과 막연한 두려움은 청노도 마찬가지였다.
“자네 말대로…… 저대로 두었다간 강림에 성공하더라도 우리 의도를 전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르네.”
마물에게 의사를 전달할 주술을 준비했고, 매개 또한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전하지 못한다면?
제단을 통해 마물의 봉인을 풀었을지언정, 의도대로 흐르지 않게 되면 무슨 소용인가?
“모두 죽고 말 테지. 숙원으로 삼았던 주인님께, 신으로 모셨던 무언가에게 말이야. 마교다운 결말도 나쁘지 않지.”
칠성교주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광신을 말했다.
청노로선 질색인 말이었다.
애초에 속한 교의 성향이 달랐다.
가면을 통해 신에게 의지하여 힘을 빌리고, 나중엔 몸마저 내주는 칠성교.
여러 주술과 실험을 통해 마수와 마인을 하수인으로 삼는 천마신교와의 차이가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해선 안 되겠군.’
청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지금 당장은 칠성교주에게 언짢은 언사 하나 던질 수 없었다.
제단의 주술을 완성하는 순간,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니까.
다만 한 가지 뜻은 같았다.
“백무량, 그놈을 다시 노리자.”
“무슨 수로?”
“무계봉신술. 잊진 않았겠지?”
“……아하.”
칠성교주의 얼굴에 짙은 웃음이 맺혔다.
한때 백련교주를 가둬 놓고서 정신적인 죽음에 몰아넣었던 술법.
그걸 백무량에게 펼친다면, 적어도 이번 싸움에서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억류당할 터였다.
그동안 마물을 부활시키고 뜻을 이루면 그만이다.
청노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이 모산 중턱 위로 올라왔을 때,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을 때…… 완전히 승기를 잡는다.”
“그거 좋군.”
크큭, 흘흘흘…….
두 마인의 웃음소리가 불길하게 휘감겼다.
그들 뒤로 검붉게 물든 제단이 거대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
“이제 모두 모였군.”
백무량은 여덟 명의 복면인을 보았다.
네 명의 십대고수, 두 곤륜도, 무림에서 멀어져 있던 화산파의 양대호법.
강호를 쥐어짜도 이번이 아니면 이런 전력은 나오지 않는다. 말 그대로 마교를 일소하기 위한 최강의 전력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간단했다.
“다른 고수들이 모산 초입에서 불을 놓고 시선을 끄는 동안 우리는 정상으로 향한다. 경로는 제갈후가 만든 지도를 토대로…….”
“잠깐.”
양대호법, 정중산이 백무량의 말을 끊었다.
그의 시선이 현종휘와 유성한에게 향해 있었다.
“우리야 언제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라지만, 두 청년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저 아이들도 각오를 다지고 왔소.”
“하나…….”
정중산의 표정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걸 본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들었던 양대호법의 성격을 떠올렸다.
정파로는 괴팍하고, 정중산은 대협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의 성향상 두 곤륜도는 이번 침투조에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에 나이가 어린 유성한이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후웅!
장중하게 휘둘러지는 일 검.
그 일 검에 담긴 무게를 보고서 정중산은 잠시 침음했다.
“허어, 저 나이에 저리도 무겁고,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중검(重劍) 안에 변화의 묘리가 있었다.
더더욱 신비한 것은 아주 오래전에 강호를 활보했던 십대고수의 향취가 있었다.
정파로가 걸걸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설마…… 유성백의 일가(一家)인가?”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그렇습니다.”
유성한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백무량이 여러 차례 유성백을 좋게 말해 줬지만, 보타암에서 겪은 고생 때문에 여전히 싫어하고 있었다.
“음,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구만. 내가 아는 그놈은 집구석 내팽개치고 떠날 놈은 아니었는데.”
정파로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별안간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근데 어린놈이…….”
“여기까지.”
백무량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청량한 기운이 청운으로 유형화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언뜻 보면 불쾌할 만한 방식이었으나 태청진기에 담긴 진득한 현기는 감정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백무량이 하려던 말을 꺼냈다.
“침투하되, 각자 방향이나 길은 조금씩 다르니…… 숙지하고 갈 수 있도록 하지요.”
“예!”
“……흠.”
백무량은 지도를 펴고서 침투조로 합류한 고수들과 눈을 하나하나 맞췄다.
남천, 위문엽, 낙매신검, 척준환, 유성한, 양대호법과 현종휘.
죽고 다시 살아나서 구축한 인연들.
‘물론 양대호법은 낙매신검이 데려왔을 뿐이지만…….’
칠성교주와 청노, 제단에서 부활할지도 모르는 마물까지.
그들과 대적하러 왔다는 건 목숨을 걸었다는 뜻이다.
백무량은 양대호법을 향해 간단한 예를 보였다.
“반갑소, 곤륜파의 구천검이오.”
“……우릴 기억하지 못하나?”
정중산이 묘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고, 정파로가 입술을 비틀며 무언가를 투덜거렸다.
이에 백무량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중산과 만나 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네가 과거에 패기라도 한 건 아니냐?]
‘선배…… 지금은 그럴 자리가.’
심천검의 농담에 정색하려는 와중에 정중산이 진실을 말했다.
“과거에 비무를 빙자하여, 우리를 흠씬 두들기지 않았소?”
“……어?”
백무량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정중산의 표정은 무덤덤하여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는 듯했다.
“그땐 우리도, 선배도 어렸지. 하지만 선배의 성격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오. 후배가 강호에 처음 발을 내디뎌서 설렐 수도 있는 거 아니오?”
“……어, 진짜 그랬나?”
“곤륜파의 선배에게 가르침을 청했더니, 돌아온 건 가르침을 빙자한 폭력이었소.”
“…….”
백무량은 진심으로 할 말이 없어서 잠시 침묵하였다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내, 내가 진짜로 파락호처럼 굴었던 시절이라…….”
보는 눈이 없었다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팔십여 년 전, 엉망진창으로 강호를 활보하고 다녔던 자신을 꾸짖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중산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지금 그 벌을 받고 있지 않소?”
“……으, 으응?”
“천의를 잇고서 많이 고생했다고 들었소. 뭣보다…… 그때와 사람이 달라진 것 같고 말이오. 그대로였다면 애초에 돕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을 거요.”
이에 정파로가 입술을 비틀었다.
“흥! 이번 일만 끝나면, 되갚아 줄 테니 딱 기다리고 있으시오!”
“미, 미안하네.”
백무량은 재차 양대호법에게 사과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농담을 던지던 심천검도 크게 당황하였다.
[저, 정말 개판으로 살았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너를 용서한 것도 사실인 것 같고.]
‘……정말 다행이지요.’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구천검이었음을 밝혔을 때, 양대호법이 나타나서 제동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천의를 이은 도사는커녕, 과거의 괴팍한 망령 취급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정중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다 잊었소. 하물며 곤륜이 가장 어려울 때에 우리가 돕지 못한 죄가 더 크오.”
“……뭐,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정파로는 입술을 쩝쩝거리며 백무량에게 고개를 숙였다.
“과거 일을 꺼낸 건 솔직히 우리가 속이 좁아서 그렇소. 이번 일로 해묵은 걸 정리한 걸로 칩시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마교의 흉행을 막는 것이니 말이오, 선배.”
그 말에 백무량은 모산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싸움이 끝나는 곳이 저기에 있지.”
천애의 협로.
상승 경지를 넘어선 이후 처음으로 든 예감. 아니, 거의 예지나 다름없었다.
그 끝이 죽음인지, 새로운 도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았다.
“저 불길한 아지랑이 때문인가, 날이 어둡구나.”
보통 이런 날이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가 끝나고, 어두컴컴한 구름이 화창하게 개었을 때에야말로.
비로소 새로운 하늘을 맞이할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