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60화 (260/275)

봉인 (1)

백무량의 오른발이 반원을 그렸다.

발아래에 휘도는 바람이 있었고, 기류가 의념에 따라 일렁였다.

후웅!

백선신검이 휘둘러지자 대기가 갈라졌다.

억지로 찢어진다기보다 스스로 길을 터 준 듯한 감각에 도철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검이란 무정하거늘……!”

아무리 깨달음이나 상승의 무학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목숨을 빼앗고, 물품을 부수는 것이 병기(兵器)였다.

도철은 백선신검을 새로이 벼려 냄으로써 평생토록 궁리한 최강의 병기를 탄생시켰다.

거기에 후회는 없었다. 없어야 할 터였다.

한데 백무량이 보여 준 것은 도가의 활검(活劍)이었다.

다시금 백무량의 손목이 움직이자 도철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실망…….”

쐐애액!

장중하게 내리그어진 일 검이 도철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건 쾌검이기도 했으며 중검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백무량이 검술을 배우며 깨달은 무학의 일단(一端)이 백선신검을 통해서 흩뿌려졌다.

사사삭, 크구구궁!

백선신검의 칼날에서 날아간 검기가 오동나무 한 그루를 너끈히 베어 냈다.

그러고도 다섯 장을 넘게 날아가 바위의 반을 갈랐다.

마인을 베기 위해 궁구하며 익힌 무공.

백무량은 천애의 협로에 다다르면서 그 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모순적으로 얽매여 있었다.

마물을 죽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검의 형태를 고정하고, 궤적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자신의 한계를 사슬로 결박하고 있었음을.

백무량이라는 무인이 가진 검은, 구천화우검이 아니라 검해 그 자체였다는 것을.

스각!

백무량의 신형이 움직일 때마다 백선신검은 쾌청한 울음을 터트리며 허공에 어지러운 선을 그려 냈다.

백무량이 밟는 구궁보는 곧 건곤이었고, 태허였다.

가끔 눈에서 엿보이는 현기는 과거에서 탈피했음을 알려 주었다.

스슥.

다시 보폭을 정돈하고, 백무량이 숨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백선신검이 큰 궤도를 그리며 휘둘러졌다.

무당파의 태극이 극에 이르러, 굴공(屈空).

백무량의 검로는 허공을 희롱했다.

백선신검에 실린 태청진기는 발끝과 칼끝으로 스며들어 움직임을 더 가볍게 만들었다.

이윽고 백무량의 손끝에서 수많은 절초가 펼쳐졌다.

태청검과 구천화우검부터 시작하여 천주무극세와 현천신장, 각 도문의 무공들.

백무량은 많은 무공을 배웠고, 그 하나하나가 절세의 무학이었다. 한 무인이 일평생 동안 익힌다면 능히 절정고수가 될 수 있는 검법이었다.

그럼에도 백무량은 갈증을 느껴 왔다.

하나로 묶어 마물을 벨 수 있다면.

그 강박 때문에 백무량은 다른 도가의 무학을 밑바탕으로 삼으면서까지 수많은 절기와 파생 초식을 만들었다.

‘만족하였는가?’

백무량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천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은 여전히 자신을 억죄고 있었다. 거기에서 빚어진 사슬이 여전히 한계를 결박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인간이기에.

정(情)과 도리(道理) 따위에 집착하는 인간이기에 빚어진 일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무공을 배운 무인이기에 궁극을 추구했다.

‘틀리지 않아.’

백무량은 자신이 배웠던 검법을 천천히 역순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익힌 검법을 총망라한 구천화우검은 태청검으로, 태청검은 여섯 개로 쪼개진 육합검으로, 육합은 천지인이 되어 삼재검으로 모여든다.

마지막으로 삼재로 돌아왔을 때.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후우웅……!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도복 자락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백선신검을 곧게 휘둘렀다.

단순히 길게 휘둘렀을 뿐인, 그저 그런 행동에 불과했다.

하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쿠콰콰콰콰!!

하늘이 진동하고, 산이 떨렸다.

백무량이 휘두른 일 검은 그야말로 천검(天劍), 혹은 신검(神劍)으로 불러 마땅한 것이었다.

그걸 본 도철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이것이 바로 마물을 베는 검인가.’

도철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초식의 이름은 정했나?”

“정하지 않아.”

백무량은 가볍게 웃으며 백선신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하나 무엇인들 어떻겠나. 마물을 죽이는 칼에 거창한 이름을 지었다가는, 그들이 역사에 기록되고 말 거야. 차라리 한번 쓰고 무공을 실전시키는 게 낫지.”

“……?”

도철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백무량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진 힘을 알고 있잖나. 만일 사교가 역사에 기록된다면, 그들의 힘에 매료될 사람 또한 분명히 존재할 거야.”

“설마 그런 멍청한 놈들이…….”

“힘에 끌리는 법이니까.”

칠성교는 가면을 쓰는 것만으로 신의 힘을 빌려 쓰며, 천마신교는 지치지 않는 마병을 양산한다.

매료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백무량은 쓸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땅으로 내리깔았다.

하늘의 법도 이전에 인간의 일이었다.

“언젠가 마물을 추종할 세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려. 그런 놈들이 나타난다면 무덤에서 편히 누울 수도 없겠지.”

“……그러니, 새로이 만든 그 초식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겠다?”

“어떠한 이름도 기록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박살 낼 거다. 설령 황제라도 할지라도 말이야.”

도철은 백무량이 내뿜는 박력에 한순간 몸이 뒤로 밀리는 듯했다.

하나 그 마음은 도철도 마찬가지였다.

탁!

백무량과 도철은 손을 부딪치며 서로를 교차했다.

도철에게는 휴식이 필요했고, 백무량은 무공을 수련하며 모산으로 침투할 인원을 강구해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선민의 고통은 길어질 것이며, 모산은 마물의 둥지로 변하게 될 테니까.

백무량은 모산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머지않았다.”

매번 생사를 걸어가며 헤쳐 나갔던 어둠 끝에서, 점차 광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날 밤.

백무량은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

일고여덟이나 되었을까?

어린 백무량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서 말했다.

“제안을 하나 들어주겠니?”

백무량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화상으로 뒤덮여서 이목구비가 엉망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의심을 한 꺼풀 버렸다.

“무엇을요?”

백무량의 말에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확하게는 얼굴근육의 변화가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다.

“네가 되살리고 싶은 사람들.”

“…….”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되살려 주마. 이제 더는 싸우지 않아도 돼. 처음부터 하늘의 뜻을 잇고 싶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니었잖니?”

남자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네 미련을 끝내 주마. 싸움이랑 멀어져서 그들과 함께 살아. 적어도 그 지역만은 건드리지 않으마.”

정확하게는 백무량이 죽을 때까지지만.

남자, 칠성교주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뜻을 꺾는다.’

청노가 백 명의 피로 심혈을 기울여 펼친 술법, 환환밀음.

꿈속에서 무인의 정신을 어리게 한 뒤, 세뇌에 가까운 암시를 거는 술법이었다.

한데 백무량의 정신력이 만만치가 않았다.

“잘못 짚었어요. 내 미련은…… 그게 아니에요.”

“그러면 무엇인데?”

“음, 글쎄. 뭐였을까요? 이건 사형한테 물어보면 쉽게 알려 줬을 텐데…… 내가 항상 말했거든요.”

“기억이 나지 않는 거니?”

“예, 제가 무공은 금세 익히는데, 도경은 못 외우겠더라고요.”

“음, 그 미련이야 사형과 함께 떠나면 풀리지 않을까?”

“그게, 그게 아니에요.”

어린 백무량의 진체.

삼단전의 경혈 전체에 정심한 경력이 흘렀다.

청운이었고, 태청진기였으며, 강기였다.

백무량의 의향이나 의념에 따라 수없이 변화할 수 있는 만상이기도 했다.

칠성교주는 술법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어리고, 여린 백무량의 얼굴에 강건한 힘이 맺혔다.

“약속했거든.”

백무량이 한 발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아무것도 없는 공간.

청노의 술법으로 만들어져, 그저 어두컴컴하기만 할 땅바닥.

환환밀음진의 어둠이 백무량의 진각에 무너졌다.

쩌저적……!

용천혈에서부터 길어져 온 태청진기.

그 힘이 전신을 타고 휘돌았다. 삼단전이 크게 약동하며 천주가 되고, 일천세맥에 가득 찼다.

“이 모든 악연, 굴레를 끊을…….”

백무량은 잠시 말을 망설였다.

도사라고 할 순 없었다.

많은 과오를 겪었고, 한때는 삶을 포기했으니까.

무인 또한 아니었다.

타문의 무학을 허락 없이 익히는 등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지금이야 천하제일인이 되었고 마교라는 공통의 적이 있어서 용인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백무량은.

“사람.”

영웅담의 영웅이 되겠다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았다.

강한 무공을 익힌 사람.

하늘의 뜻을 이은 사람,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 또 사람이라.

백무량은 전신의 힘을 주먹에 집중하고서 말했다.

“내 미련을 이루어 주려거든, 하늘의 힘을 빌려 와라.”

“……!”

“네깟 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미련이 아냐!”

환환밀음진이 무너진 틈.

그 사이를 검해가 집어삼켰다.

오롯이 백무량의 의지, 의념의 강함이 해낸 일이었다.

백무량은 다급해진 표정의 칠성교주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민얼굴 한번 기가 막히게 생겼다! 내가 좀 더 부숴도 티가 나질 않겠어!”

“놈!”

위기를 느낀 칠성교주가 세뇌를 포기하고서 마기를 운용했다.

그러나 백무량의 일수가 더 빨랐다.

무림맹에서 익힌 도문의 무학이 검해에 녹아 있었기에.

촤아아!

백무량의 주먹질과 검해의 파도가 동시에 일어났다.

칠성교주의 앞뒤를 점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이런!”

이대로라면 청노가 펼친 술법 안에 갇힌 채로 얻어맞게 되리라.

칠성교주가 ‘마지막 가면’을 벗었다.

쫘악!

“……!”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인간의 정신으로 넘길 수 없는 무언가가 칠성교주에게 있었다.

“이래서 성류인가.”

별의 흐름은 인간이 함부로 담아낼 수 없거늘.

칠성교주의 거죽 안에 수많은 ‘별’이 있었다.

“그게 네 정체였구나.”

쩌억!

칠성교주의 턱을 후려갈긴 백무량은 히죽 웃었다.

“모산에서 보자!”

“커헉!”

칠성교주는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하고 나서야 사라졌다.

***

꿈에서 깬 백무량은 전신을 매만졌다.

어려졌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에 현실을 자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뒤엔 황군이 준 모산의 지도를 제갈후에게 넘겼다.

“이제 고수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과연 모산까지 온 고수들을 불만 없이 감시자 역할로 가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다른 천막에 있던 고수들이 백무량을 찾아왔다.

“간밤에 모두가 악몽을 꾸었는데, 선배께서 그것을 부숴 주었습니다.”

“우린 모산에 올라설 자격이 없소. 대신 다른 일을 주시오.”

‘……일이 술술 풀리는데?’

환환밀음진을 진각으로 깨부순 것이 고민거리까지 없앴다.

백무량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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