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58화 (258/275)

행로 (4)

무자비한 폭력이 내리꽂혔다.

빠악!

척준환의 정신이 한순간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턱이 돌아가고, 상반신이 비틀어졌다.

본능적으로 충격을 흘려 내지 않았다면 이 일격으로 혼절했을 터였다.

“……후.”

어딘가 아쉽다는 듯, 한숨 소리가 척준환의 귓전을 찔렀다.

그것이 수면 속에 잠겨 있던 척준환의 의지를 꼿꼿이 일으켰다.

탓.

백무량이 후려친 힘을 그대로 살려서, 척준환은 허공에서 전신을 휘돌렸다.

뒤이어진 초식은 월야반강(月夜頒罡).

척준환의 발등이 칼날처럼 곧게 세워지더니, 백무량을 향해 내리그어졌다.

스각!

강철처럼 단련된 육체는 달밤에 그치지 않고, 일륜(日輪)마저 가를 정도로 날카롭다.

백무량은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척준환이 펼친 것은 이제 더 이상 공동파의 무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이기기 위해 궁구하게 고민하고, 그걸 갈무리하여 구체화시킨 무학이었다.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 반상.

백무량은 월야반강이 빚어낸 묵색 강기를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십대고수다.

다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역시나 경험인가.

백무량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태청진기 특유의 짙은 자색이 휘몰아치며 청운은 비검 형태로 유형화되었다.

주먹에 담긴 무공은 태청검에 불과했지만, 백무량이 여태껏 깨달은 경지가 태청검을 초월케 만들었다.

둔탁하기만 한 구결이 새롭게 탈태된다.

“……하!”

척준환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을 때, 월야반강과 비검이 부딪쳤다.

콰광! 꽈드드득……!!

일선의 형태로 내리그어진 월야반강과 태청강기라 일컬을 수 있는 비검이 부딪치며 맞물렸다.

강기와 강기, 언뜻 보면 힘과 힘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경지에 이른 고수들의 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웅!

척준환의 남은 한 발이 순식간에 백무량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형(形)에 집착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증거이자 월야반강을 완숙하게 익혔다는 뜻이었다.

스스슷.

백무량의 발끝이 앞으로 밀리며 흙이 깊숙하게 파였다. 공동파에서 얼마나 외공을 단련했는지, 순수한 힘만으로는 척준환이 더욱 강했다.

‘역시…… 이삼 년을 미친 듯이 수련해도 처음부터 외공을 단련한 고수에게는 부족한가.’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사천당가의 지하에서 싸웠던 석두를 떠올렸다.

압도적인 외공의 소유자였으며, 육체의 단련에 소홀히 하지 않은 적이었다.

눈앞에 있는 척준환 또한.

백무량의 얼굴에 짜증이 뒤섞였다.

“후우.”

“한숨?”

척준환은 즐거움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히죽 웃어 보였다. 백무량과는 이미 숨이 맞닿을 듯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런 여유가 아직 있나?”

척준환이 월야반강을 펼쳤던 발의 무릎을 굽혔다.

그걸 본 백무량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권각술도 한 발을 축으로 하거나 한 뼘이라도 거리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척준환은 그런 상식조차도 지키지 않고 자신을 끌어들인 상태였다.

대체 어떤 수로 공격해 올 것인가?

백무량은 팔뚝에 힘을 한가득 주며 태청진기를 운용했다.

위문엽이 압도적인 힘이나 기술을 바탕으로 싸웠다면, 척준환은 어떻게 싸워야 상대가 반응하지 못할지 아는 듯했다.

‘성가시게 구는군……!!’

그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척준환의 무릎이 기이하게 휘어지더니 백무량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콰직!

소리만 클 뿐, 타격은 없었다. 백무량의 호신강기를 뚫기엔 날카로움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척준환은 코로 들이쉬었던 숨을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패배한다.’

불합리한 싸움이란 건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백무량의 내공은 전보다 훨씬 정심해져 있었고, 기도 또한 비범해져 예전의 그가 아니다. 원하는 대로 싸워 준다면 삼십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제압당할 터였다.

그가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면 십초지적도 못 된다.

그러니 백무량이 결코 싸울 수 없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계속 유도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이 싸움은 끝난다.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로 경지가 벌어져 있었다.

‘이게 전대 장문인이 말씀해 주었던 절대의 경지인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영역의 무학을 개척한 자들.

공동파의 호법장로는 그 경지가 여러 말로 나뉘어 전해진다고 말해 주었다.

천애의 협로.

혹은 무아(無我)의 경지.

그러면서 척준환에게 누누이 경고했다.

그 경지에 다다른 자에게는 결코 도전하지 말며, 언제나 경의를 표하여 대하라고.

척준환은 그 말을 굴종으로 받아들였다. 무공이 강하다고 도전을 포기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죽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연무지회에 처음 봤을 때부터 백무량은 척준환에게 있어 평생토록 싸우고 싶은 적수였다.

자신이 부족하다면 동격에 올라서거나 해답을 찾으면 될 뿐.

빡, 빠악!

송곳처럼 벼려진 무릎이 또다시 백무량의 옆구리를 파헤쳤다. 허리를 붙잡은 발에는 현천진기를 집중시켜, 경맥을 얼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통하지는 않을 터.’

과연 그 예상대로, 백무량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손바닥을 내질렀다.

장심에 담긴 공력은 막아 내기조차 버거울 정도라, 척준환은 허리를 붙잡았던 발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한 발로 있는 힘껏 백무량의 가슴을 밀어 냈다.

파앙!

아슬아슬한 순간.

척준환은 앞머리가 풍압에 쓸려 나가는 걸 느꼈다.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백무량의 장심에 내력이 진탕되었을 게 분명했다.

진땀이 손바닥을 적신다. 상대는 조금의 어려움도 없건만, 자신은 매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했다.

‘그래서, 불합리한가?’

척준환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예상했던 바였다. 이만큼 어렵지 않았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터였다.

‘좋아, 여기서…….’

“이제 그만.”

텁.

백무량이 척준환의 발목을 잡아챘다.

“슬슬 마무리를 내 볼까.”

빠악!

순식간에 짓쳐 든 삼연타가 척준환의 복부와 얼굴을 후려갈겼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엄청난 풍압이 공동파의 도복을 반쯤 찢어 놓았다.

척준환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멍든 살이 부풀어 오르며 눈가를 강하게 압박한 탓이었다.

“아직, 아직은.”

척준환은 혼잣말을 되뇌었다.

온몸이 날아가는 듯한 타격에도 의지를 잃지 않았다. 정신의 끄트머리를 어떻게든 붙잡았다.

움찔.

그때 척준환의 발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그 감각은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척준환은 찰나를 억지로 늘려 냈다.

척준환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오른발이 위로 쳐올려졌다.

‘……?!’

본능적인 반응이라 생각한 백무량은 공격을 멈추고 척준환의 발목을 놓았다.

혹여나 힘 조절을 잘못하진 않았나, 백무량의 눈빛에 걱정이 담겼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쓰윽!

지면에 꽂아 놓았던 백선신검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렇게 갑작스레 올려 쳐진 백선신검은 낯선 발길질에 따라, 청명한 소리를 냈다.

까앙!

어찌할 도리도 없이, 백선신검의 칼날은 무정하게 백무량의 가슴을 노렸다.

“검은…… 쓰지 않기로!”

“실전에서 그런 게 어딨습니까?”

척준환이 히죽 웃으며 말하니, 백무량이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뭉툭하게 변했다지만 백선신검은 백선신검이었다. 수강으로 막아 낼 수는 있어도, 어려움은 존재했다.

무엇보다 그 짧은 순간에 현천진기가 백선신검에 주입되어 있었다.

‘맞는 와중에 이 수를 생각한 건가!’

백무량은 척준환의 임기응변에 크게 감탄했다.

하지만 임기응변은 어디까지나 변초일 뿐 상대를 꺼꾸러트리는 힘은 없는 법이다.

백무량의 쌍장이 반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대포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콰아아……!!

삼십 년의 내공을 머금은 진현무극장(陳玄無極掌)이 백선신검에 부딪쳤다. 삽시간에 스며들었던 현천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정도로, 그저 잔해만이 백선신검의 칼날에 남았다.

쩔그렁.

백선신검이 바닥을 뒹굴며 거친 소리를 냈다. 그것이 신호처럼 되어, 두 무인이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촤악!

백무량과 척준환 사이에 있던 흙무더기가 갈라졌다. 현천진기와 태청진기, 맑기 그지없는 도가의 내공이 부딪치며 상충한 까닭이었다.

두 주먹이 중앙에서 부딪쳤다.

빠득!

손가락 뼈마디가 맞물리며 두 주먹에서 무언가가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누구라고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백무량이나 척준환이나 최선을 다한 정권이었다.

“큭.”

“크으윽.”

내공의 우열, 외공의 격차, 익힌 무공에 대한 이해도.

무인 간의 싸움에서 승자를 가르는 요소기도 하지만 호사가들이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기고자 하는 의지와 정신력 따위가 한 치도 되지 않은 간극 사이에서 어지러이 얽히고 서로 부풀어 올랐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두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이때만큼은 백무량도 이를 꽉 악문 표정으로 척준환을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척준환의 손목이 아래로 푹 꺾였다.

‘네가 가진 의무는 알겠지만.’

백무량의 주먹에 세찬 바람이 감돌았다.

‘나도 짊어진 것이 많아, 함부로 질 수 없다.’

쿠웅……!!

가슴 한가운데를 얻어맞은 척준환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는 듯, 독기 어린 시선으로 백무량을 흘겨보았다.

정신은 불굴하나, 육신은 유한한 법이라고 했던가.

척준환의 눈동자가 한순간 멍해지더니, 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져 갔다.

스르륵, 턱.

척준환의 머리가 바닥에 내리꽂힐 듯한 모습에 백무량은 손을 뻗어 상반신을 잡아챘다.

“손이 많이 가는 후배군.”

혀를 가볍게 차긴 했지만, 그만큼 불쾌한 건 아니었다.

후련했다.

어떤 배경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무인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싸운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니, 현생에선 처음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백무량은 척준환의 한 손을 잡아끌며 천막으로 향했다.

“무작정 비무를 청했으니 짐짝 취급해도 상관없겠지.”

백무량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

다음 날, 탈진 상태에서 벗어난 척준환은 또다시 비무를 청해 왔다.

어찌나 추하게 행동하던지.

양손을 크게 흔들며 무작정 덤벼 오기에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들어 전심전력을 다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살초를 쓴다면 십 초.

구천화우검을 쓰지 않더라도 오십 초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척준환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비무를 멈췄다.

모산으로 향하기 전에 몸을 살펴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튿날.

쿠르릉!

황군이 거대한 용광로를 질질 끌고서 이곳에 도착했다.

“이게 무슨……?”

“황실에서 누굴 보낸 건가? 설마 황제는 아니겠지?”

무인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백무량은 나이 많은 손님을 맞이했다.

“누구시기에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백선신검을 봐주려고 왔네.”

“……?”

“도철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압니다. 그런데…….”

천하제일 장인, 철장무상인 도철.

백무량은 그가 최고의 장인임을 떠올렸다. 하지만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철골개가 아직 전서구를 보내지 않았는데?’

과연 도철에게 개방의 소식통에 걸리지 않고 먼저 찾아올 능력이 있을까?

하물며 황실에 도철이 있었다는 얘기조차 듣지 못했는데?

백무량의 미간이 고집스럽게 좁혀지자 노인은 히죽 웃었다.

“젊은 사람이 그리 의심이 많아서 쓰겠는가.”

“……설령 존장께서 도철이 맞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오랫동안 검을 손보지 못했을 텐데, 아닌가?”

“…….”

백무량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전설상의 명장, 철장무상인(鐵匠無上人) 도철을 직접 뵈어 영광입니다.”

“유난은.”

도철은 앉은 자세 그대로, 담담하게 인사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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