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 (1)
저벅, 저벅.
백무량은 무림맹의 고요한 분위기를 느끼며 걸었다.
이제 누구도 자신을 시험할 엄두도 내지 않았고, 의심하는 자 또한 없었다.
그저 백무량의 방문을 기다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구천검 시절에는 이런 걸 즐겼었는데.’
이제는 즐겁지 않다.
강하다고 하여 그것이 권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백무량이라는 무인이 되살아나고, 다시 무학을 쌓는 과정에서 많은 선배가 희생했다.
그 과정을 아는 한, 자신의 운명 앞에 마물과 사교들이 존재하는 한…… 철없는 시절처럼 굴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천하제일인이 되었다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간 거냐?]
백무량의 심기를 알아차린 심천검이 너스레를 떨어 주었다.
참으로 좋은 선배다.
가끔 감상에 젖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무언가를 지켜볼 때마다 방향을 제시해 주었으니까.
백무량은 고마움을 내색하지 않은 채 피식 웃었다.
‘이제 들어갈 만하지요. 나 말고 누가 칠성교주와 마물을 막겠습니까?’
[참나, 어이가 없어서. 이러라고 천의가 너한테 자리한 줄 아느냐?]
낄낄 웃은 심천검이 옆에 있는 주백천을 턱짓했다.
[너를 그토록 아끼는 사형께서 한심하게 보시는…….]
[가끔은 일탈을 즐길 수도 있지요.]
주백천은 늘 그렇듯, 백무량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렇기에 백무량의 걸음에 무게가 덜어졌다.
무림의 중추가 모인 자리를 마실 나가듯 향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다른 무인에게 어떻게 보였으랴.
“역시 구천신검이군, 걸음에 망설임이 없지 않나.”
“그릇이 저 정도는 되어야 고금제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군.”
두 무인이 쑥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둘 다 맞는 말은 아니었다. 백무량은 늘 고민했고, 어떻게 행해야 정답에 가까울지 하늘에게 묻곤 했으니까.
고금제일인도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고금제일인까진 아닌데, 쩝…….]
[곤륜의 무공으로 천의를 이루니 고금제일인이라고 할 만하지요.]
항시 옆에 있어 주었던 심천검과 안배를 마련한 주백천.
저 자리에 주연호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가능하다면 그의 혼백을 검해에 데려오고 싶었다.
아니, 사실 바라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제자리로 돌려놓을 겁니다.’
[……?]
‘모두가 사형을 다시 기억할 수 있게 할 것이고, 심천검 선배의 기록을 누구나 볼 수 있게끔 운함석에 기록할 겁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심천검의 목소리가 굳건했다.
‘왜입니까?’
[바라지 않고 행한 것이니까.]
‘…….’
백무량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평소에 자질구레한 농담을 치던 심천검답지 않게 몹시 진지한 어조였다.
[강함만을 추구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아니냐?]
‘그건, 그렇지요.’
백무량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생각했다.
청해성에서 시작한 일보(一步), 일행(一行), 일로(一路).
이곳까지 도달하면서 이어진 인연들과 어깨에 하나둘씩 얹어진 무게와 의미.
‘저번 생은 사문의 무학을 완성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끝나 버렸지만, 이번 생은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요.’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늘 존재했다.
그것이 발목을 붙잡을 정도가 아닐 뿐이었다.
백무량은 머릿속에 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모두가 기다리는 전각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후회 없는 싸움을 벌일 겁니다.’
백무량의 말에 심천검과 주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지켜볼 것이다.
가장 아끼는 후배, 사제가 천의를 이루는 모습을.
수백, 아니 천 년 동안 이어진 곤륜파의 역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을.
***
끼이익…….
전각의 문이 열리자 모두가 입구에 시선을 집중했다.
구천신검 백무량.
그가 자칭하기를, 검해 백무량.
마교와의 싸움에서 늘 승리해 온 상승 고수의 등장에 입술을 달싹이는 자가 많았다.
특히 예전에 무례를 보였던 장로가 그러했다.
“……으음, 그동안 강녕하셨소?”
종남파의 장로, 목허도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백무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지나쳤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체면을 세워 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면을 쓴 마교도의 정체는 전서구로 들었다고 들었네.”
“……그렇소.”
“그렇습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한데 그들의 목소리가 어딘가 앓는 사람처럼 들렸다.
청라.
그가 두 마교의 술법으로 완성된 무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속이 적잖이 쓰린 듯했다.
백무량은 그들의 생각을 알아차렸지만, 위로할 생각은 없었다.
“그 녀석을 위문엽이 혼자서 물리쳤다는 사실도 말이야.”
“…….”
“아무리 십대고수가 강하다지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장로들이 그보다 못할까?”
백무량은 목소리에 공력을 실었다.
좌중의 귓가에 의향이 똑똑히 박히기를 바랐다.
“처음부터 서로 힘을 합하여 진을 형성했다면 달랐을 거야. 마교를 상대한다고 모였지만, 속으로는 아군처럼 생각하지 않았거나 딴생각을 품었겠지.”
“…….”
아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각자 다른 무류를 파종한 사조(師祖)가 있었고, 그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을 견제한 세월이 수백 년이다.
이제 와서 공통의 적을 위해 힘을 합하기엔 너무 멀다.
그걸 알면서도 백무량은 그들을 꾸짖었다.
아니, 꾸짖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사이에서 곤륜은 늘 마교와 싸웠다. 너희는 마교의 위치가 그런 것을 어떡하냐고 변명하던 때가 있었고, 마교가 나타날 줄 몰랐다고 억울해하던 때가 있었지만…… 곤륜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
“너희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그들과 유일하게 대적하여 계속해서 이기고 있는 게 나뿐이라면, 따라와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말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이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것이면 족했다.
뜻을 강요하는 건 백무량의 성격상 맞지 않았으니까.
다만 알아주었으면 했다.
심천검이나 백노, 망검과 같은 곤륜의 선배가 걸어온 길을.
그들처럼 싸웠더라면 마교에게 쉽사리 농락당하지 않았을 거란 사실을.
백무량은 좌중을 둘러보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근 칠성교주와 천마신교의 중추가 보이지 않는 건 마물을 부활시키기 위함이고, 어딘가에서 제단을 세웠을 거다.”
“어딘지는 알아내었습니다.”
“나도 맹주에게 들었다. 모산이라지?”
“예.”
대답을 들은 백무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제단을 올리면서 얼마나 많은 목숨을 바쳤겠는가?
그 전에 막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보다 최악은 막아야만 했다.
“마물이 부활하기 전에 우리가 가서 친다.”
“……그곳에 진을 치고 있을 마교도가 한둘이 아닐 겁니다.”
남궁세가의 무인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백무량의 입술이 한쪽으로 씰룩거렸다.
“우리도 한둘은 아니지 않나?”
“그러나 적진으로 무작정 들어가서야…… 죽는 무인이 시산혈해를 이루겠지요.”
“마물이 살아나면 나도 이기지 못한다.”
“……!”
중년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남궁진이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 같아서, 백무량은 진지하게 말했다.
“무림맹주는 사기를 꺾기 싫어서 말하지 않은 것 같다만, 솔직하게 말하지. 마물이 부활하면 칠성교주보다 훨씬 강할 거다. 나도 이긴다고 장담하지 못할 거고, 강호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겠지.”
“그, 그게 무슨…….”
“도망간다고 한들 마물은 생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이다. 곤륜파가 남긴 기록에도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기대는 버려라.”
백무량의 시선이 오대세가의 무인들에게 향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구파일방 출신이라고 은연중에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나, 칠성교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았기에 상황을 가볍게 보는 듯했다.
그 착각을 부술 때였다.
백무량은 한껏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당장 오대세가가 모두 덤빈다고 한들 날 이길 것 같으냐?”
“……이보시오!”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아니나 다를까 상상한 대로의 반응이 나왔다.
백무량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럴 때는 위문엽을 모방하는 것이 편했다.
“당장 여기서 무위를 드러내지 않은 건, 대화의 장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할까? 너희 오대세가가 자랑하는 고수인 남궁진조차 칠성교주에게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라고, 너희라고 뭐가 다를까?”
“……이런 모욕을 당할 거라면.”
“나가시겠다?”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언사가 너무 심하셨소!”
백무량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는 아직도 나랑 줄다리기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도움이 필요하니까 여기까지 불렀을 것이라는 착각.
조금이라도 생색을 내어서 이득을 취하려는 무림의 생리.
백무량은 환멸을 느꼈다.
이런 놈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게 맞나, 잠시 고민스러웠다.
그때 해남파의 장문인인 통천옹이 전음을 보내왔다.
[진정하시오, 선배.]
[이런 이들을 두고 어찌?]
[지금은 달래고 얼러서 같이 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야 일이 마무리되고도 또다시 싸우는 일이 없을 겁니다.]
[…….]
백무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통천옹의 말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옳아서였다.
[저들이 우리 뒤통수를 친다 이건가? 아니면 우리가 저들을 핍박한다?]
[어느 쪽이든 그렇습니다. 선배가 말한 것 외에도 또 다른 분란이 일어나겠지요.]
통천옹은 노쇠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살면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옳은 일이라고 하여 더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요. 이번도 마찬가집니다. 선배께서 한 수 무른다면, 천하가 조금 더 평안해지겠지요.]
[……내가 저들을 의도적으로 앞으로 내세운다면 어쩔 테냐?]
[그것까지 제가 말릴 계제는 아니지요.]
노쇠한 목소리에 장난스러운 어조가 섞였다.
그것이 사람 헷갈리기 딱 좋은지라, 백무량은 허허롭게 웃었다.
[나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오대세가의 세를 줄이려는 건 아닌가?]
[그렇게 보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만 지금 저들을 쫓아내면…… 때에 따라 도망치거나 뒤통수를 칠 건 확실하겠지요.]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여기서 다 묶어 버릴까.’
백무량은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어 털었다.
저들을 감시할 인원을 분배하는 것조차 아까웠다.
무엇보다…… 아직 제대로 된 전력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척준환과 낙매신검.
그들이라면 자신보다 더욱 세련된 말로 오대세가의 참여를 독려할 터였다.
‘어렵구나.’
차라리 마교와 싸우거나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는 게 편하다.
백무량은 통천옹의 조언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솔직한 말을 털어놓았다.
“성질 나오게 하네.”
“……그게 무슨 말이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팔다리 하나씩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작작 하라 이 말이다.”
“아, 아니.”
“언사가 심해? 모욕을 당해? 마교한테 쑥대밭으로 밟혀 봐야 정신을 차리지.”
백무량의 심후한 공력에 오대세가의 무인 모두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이 일은…….”
“기억하든가.”
백무량의 주먹이 탁자에 닿자 진흙이 짓물러지듯 쑥 아래로 들어갔다.
“…….”
불편을 토로하던 목소리가 조용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