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47화 (247/275)

청라 (3)

“커헉, 헉, 헉…….”

도주에 성공한 청라가 피거품을 뱉어 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위문엽과의 싸움.

위문엽은 생각보다 강하고, 빨랐다.

어린 시절부터 정종의 가르침을 배웠을 척준환보다는 투박하나 ‘강하다’는 점에서는 한 수 위에 있었다.

“그딴 게 무학이라고? 구천신검과…… 다를 바 없는 괴물이다.”

낙매신검이나 척준환, 남천.

그들 모두 강자였다.

칠성교주가 아니라면 압도할 수 없고, 청라 자신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고수.

하지만 위문엽은 그들만큼 강하다고 상정하지 않았다.

그리 판단할 근거나 정보가 부족했고, 익힌 무학이 불안정했었으니까!

‘그만한 고수의 무학 체계가 달라진다는 건……. 필시 누군가 개입한 게 분명한데.’

설마 또 구천신검인가?

청라가 사람 몸통만 한 돌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대고 있을 때였다.

“역작이라고 한들 나를 대신할 순 없었구나.”

흉악한 적안(赤眼) 한 쌍이 청라의 머리 위에 드러났다.

칠성교주.

그의 분위기는 대계가 완성되어 갈수록 조금씩 더 흉흉해졌다.

청라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그놈이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도가와 불가의 기운을 동시에 다루는데…… 거대한 와류 때문에 쉬이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

“처, 청노께선 어디 계십니까? 지금 몸을 회복해서 다시 급습하겠습니다.”

“청라야.”

칠성교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부름이 공포심을 자극하여 청라가 잠시 대답하길 망설이는 동안, 그가 오른손을 가면에 가져갔다.

“왜 잡아 오지 못하였느냐?”

“교, 교주님.”

“슬프구나.”

청라는 귀를 의심했다.

마물을 되살리는 대계 말고는 어느 것도 신경 쓰지 않던 칠성교주가 저런 말을 입에 담다니?

‘다시 기회를 주실지도 모른다!’

청라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 순간, 칠성교주가 얼굴에서 가면을 떼었다.

이 또한 처음 있는 일인지라 청라가 눈을 크게 떴다.

지독한 화상.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화상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표정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근육이 조금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너를 만들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이란 것이 움직였다. 하지만 청라야, 모름지기 물건이라는 것은 제대로 쓰이지 못하면 버려지기 마련인 것을 모르겠느냐?”

그는 슬프다는 감정을 모른다.

다만 입에 담았을 뿐이란 걸, 청라는 직감했다.

이미 뜻을 정했다는 사실마저도 말이다.

청라의 입가가 고집스럽게 비틀렸다.

“나의 뭘 만들었다는 겁니까?”

“청라야.”

“그저 연고 없는 고아를 잡아다가 쓰임새대로 가르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필요가 없어졌으니 버린다는 말이오!”

청라가 무림에서 활동한 것은 겨우 한 달 남짓.

고수들을 감시하고 싸우는 것이 전부였던 한 달.

그 한 달을 위해 삼십 년 넘게 동혈에서 썩어야 했다.

“마음이 쓰이긴 했습니까?”

청라의 비통한 외침에 칠성교주가 잠시 침음했다.

뒤이어 그는 얼굴근육을 꿈틀거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자아냈다.

“이제 필요가 없어졌으니 버린다는 것은 네 착각이다.”

방금 본인이 한 말인데도 다시 뒤집는 칠성교주.

청라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예?”

“비록 그자에게 졌지만, 네가 날 위해 쓰일 자리를 만들어 두었단다.”

“저, 정말입니까?”

청라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두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에 칠성교주가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니.

“그럼, 물론이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다시 위문엽이나 척준환을 노리면 되겠습니까?”

“하하, 청라야, 그건 나에게 맡기면 된단다.”

칠성교주가 청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너는 이 대계의 마지막 돌무더기가 될 거란다. 앞으로 평생 잊지 않을 거야.”

꽈아악……!

어깨가 강하게 붙잡힌 채 몸이 아래로 기우는 감각.

청라는 전신으로 밀려들어 오는 오한과 공포를 느꼈다.

그제야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천마신교의 청노가 쌓고 있는 제단.

거기에 올릴 산 제물은 마인이어도 가능하단 것을…….

눈앞에 있는 칠성교주가 마지막 제물로 자신을 낙점하였다는 것을 말이다.

“네 삼십 년엔 가치가 있었단다. 참으로 고맙구나.”

칠성교주가 청라의 눈을 가렸다.

***

백무량은 위문엽과 호광성으로 향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먼저 다가왔다.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

백무량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들을 훑었다.

해진 옷차림, 오래 물을 마시지 못해 말라붙은 입술.

누가 봐도 난민처럼 보이는 행색이었으나 주위에 숨죽인 채 앉아 있는 기척이 산재했다.

그래서 곱게 말하려고 했다.

“이런 짓은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

“……고수요?”

“적어도 이 주변에 앉아 있는 어중이떠중이가 몇인지는 알지.”

백무량이 슬쩍 허리에 묶은 백선신검을 드러냈다.

무림에 관한 소양이 없어도 귀품(貴品)은 보는 순간 알기 마련이라.

불쌍한 표정을 짓던 아낙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보인 탐욕의 눈빛에 위문엽이 전음으로 투덜거렸다.

[굳이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나? 한번 싹 쓸어버리고 가지.]

백무량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들도 마교 때문에 여기까지 몰린 걸 텐데, 우리가 더 헤집을 필요가 있겠냐?]

[누가 도사 아니랄까 봐, 참나. 예전에는 이런 애들도 마구잡이로 패고 다녔다는 악명이 아깝소.]

[…….]

머릿속에서 심천검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무량은 저절로 아파지는 뒷머리를 매만지고는 아낙네를 비롯한 산적에게 경고했다.

“무슨 연유로 이러는 줄은 모르겠지만, 사람을 해친 적이 있다면 진심으로 반성하고 귀의하는 건 어떻겠냐?”

“귀의? 도사가 되는 게 아니라?”

위문엽의 의문에 백무량은 간단히 답했다.

“나도 바빠. 절에 있는 중한테 떠넘기는 게 낫지.”

“……허. 뭐 이런 선배가 다 있나.”

백무량은 그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솔직하게 답해라.”

“거짓말을 어떻게 가려내려고 그러시오?”

아낙네가 조심스럽게 묻자, 백무량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이 나에게 거짓말을 가려낼 능력을 주셨다. 천의를 이은 도사, 구천신검 백무량이 바로 나다.”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하는구만?]

심천검의 말도 무시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은 하늘을 논하면 쉽게 믿는 편인지라, 그걸 이용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에 아낙네가 입술을 악물며 물었다.

“내가 고향에서 듣기로, 마교 놈들도 자기 행동에 하늘의 뜻이 있다던데 어찌 도사님을 믿겠습니까?”

아낙네의 말에 주변에서 더운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떠오른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백무량은 그들에게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깨달았으나, 그는 딱한 사연으로 누군가를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 하늘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서 묻겠다. 여기서 사람을 덮치면서 단 한 명이라도 죽인 적 있느냐?”

“…….”

아낙네가 시선을 피했다. 더운 숨을 내뱉던 소리도 멈췄다.

그것으로 대답은 끝났다.

이들은 마교의 습격으로 터전을 잃은 채, 남을 해치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다.

백무량은 마음에서 동정심을 지웠다.

“나와 위문엽마저 알아보지 못하는데, 식견 없이 이런 짓이 얼마나 더 가능할 줄 알았느냐?”

“그거야…….”

“이런 짓밖에 할 줄 모른다. 그렇게 대답하려거든 혀를 잘라라. 이게 쉬워서 했을 뿐 아니냐!”

당장 백무량의 길이 어떠하던가?

사문의 무학을 팔고, 어려운 운명을 외면했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은 배불리 살았을 터였다.

이는 현노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이기에 더욱 가치 있는 행보였다.

백무량처럼 되살아난 고수가 아니라, 평범하게 늙은 학도사가 그토록 강한 의지로 생을 연명했다.

‘물론 이들에게 그만큼 바랄 순 없다. 하지만…….’

남을 해치면서 살아가는 건 인간의 도의가 아니지 않나?

백무량은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흘겨보았다.

“어딜 하나씩 꺾여서 가든, 곱게 따라오든 선택해라.”

“…….”

아낙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백무량은 한 무리와 마주칠 때마다 십수 명씩 따라오게 시켰다.

마교가 만든 참상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을 좌시할 수도 없었다.

‘소악을 방치하여도 또 다른 대악이 되기 마련인데, 사람을 죽인 자들을 그대로 둘 순 없는 노릇이니.’

백무량은 자신이 믿는 대로 행했다.

그때마다 옆에 있는 위문엽은 답답해했다.

“이런 짐을 왜 달고 다니시오? 이러다가 칠성교주가 나타나서 인질로 잡으면 어쩌려고?”

“그때는 그때 생각해야지.”

“염병할, 도사가 아니라 천존이 여기 계셨네.”

“말이 험하다.”

“……쩝.”

가끔 위문엽과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하루에 두 번씩 그러면 가르침을 빙자해서 몇 번 패 주었다.

물론 위문엽의 발전이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구름이라면, 너는 돌풍이구나.”

“그래 봐야 사부처럼 완벽한 게 아니라 어정쩡한 것이오. 전력으로 펼치면 사지가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

위문엽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태청신공을 배워서 안정을 되찾았지만, 칠성교주가 상대라면 본디 몸에 익은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소.”

“그러다 힘줄이 찢어지면 어쩌려고?”

“그 틈을 메우려고 남천 같은 잡놈과 함께하려는 거 아니오.”

“남천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없으면 나라님도 욕하는 법이오.”

위문엽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검해에 있던 선배들도 피식 웃었다.

말은 조금 괴팍한 면이 있어도 동행하기에 지루하진 않은 후배였다.

백무량은 어느덧 백에 가까워진 ‘소악’을 대동한 채 무림맹 본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게 무슨 행렬이지?”

“맨 앞에 구천신검이랑 야차 아닌가?”

“허어…… 척 보기엔 마교도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 같은데?”

많은 말들이 오갔다.

개중에는 구천신검이 사람을 핍박하기 시작했단 추측도 있었으나, 그냥 무시했다.

하나하나 대꾸하기에 피곤한 세상이다.

그 세상에 마물을 부활시키려는 미친 마교가 둘이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어깨에 걸친 채 여유롭게 걸었다.

“……후우.”

기감은 늘 날카롭게, 마기가 조금이라도 느껴지면 눈을 부라렸다.

그때마다 기척은 눈 녹듯 사라졌다.

[네가 지치길 기다리는 모양이다만, 그럴 일은 없겠구나.]

주백천의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먹은 영단 숫자가 몇인데요. 게다가 태청신공을 아마…… 제가 처음으로 완성했을 텐데, 그걸 어찌 마교 놈들이 알겠습니까?’

백무량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대성(大成)에 가까운 도사는 많았다.

당장 심천검만 하더라도 태청신공으로 이 갑자에 가까운 공력을 쌓았으니까.

하지만 백무량은 대성을 넘어섰다. 주백천과 주연호가 남긴 안배와 검해에서의 수련이 큰 도움이 되었다.

태청신공의 완성.

그 말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이번에야말로 긴 악연을 끊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모든 업을 홀로 끝내고 싶지만, 세상사가 만만치가 않다.

백무량은 주먹을 꽉 쥐고서 무림맹의 대문으로 걸어갔다.

끼이익…….

자연스럽게 열리는 정문.

그 안쪽에서 남궁진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었다.

“오셨습니까?”

“이들은 자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 줘.”

“그러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남궁진이 문 안쪽을 가리켰다.

“모두가 선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영웅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그것도 영웅담의 주인공이라.

백무량은 힘 있게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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