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45화 (245/275)

청라 (1)

“슬슬 가 볼까.”

위문엽이 떠난 지도 어언 사흘째.

이제 호광성으로 갈 때가 되었다.

마교와의 대전쟁을 준비하기 전에 무림맹이나 구파일방과 조율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백무량이 봇짐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현종휘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였다.

“사조님.”

“왜.”

“저희는 언제 불러 주실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자들의 표정이 몹시 결연했다.

마교를 상대로 동귀어진이라도 할 기세인지라, 백무량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실력도 안 되면서 불러 주기를 바라느냐?”

“하지만……!”

“시끄럽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파문시켜 버리겠다.”

차가운 독설을 내뱉었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다만 칠십여, 아니 이제 팔십여 년이나 되어 버린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불타는 곤륜파, 백련교도에 대항해 필사적으로 싸우던 동도들.

그들을 생각하면 저렇게 어린 제자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기 싫었다.

그러나 한 명은 달랐다.

“사조님, 저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현종휘였다.

소년이던 시절부터 지켜봐 온 녀석이 어느새 장성해선 같은 전장에 서고 싶다고 간청했다.

“넌…….”

백무량은 순간 말을 잊었다.

언제는 잘 가르쳐서 마교와 함께 싸우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때가 되니 데려가기가 싫었다.

그냥 조용히 여기에 두고 가고 싶었다.

“넌…… 장문인을 잘 모셔야 하지 않냐?”

“그건 철 사제에게 맡기면 됩니다.”

“대사형이라는 놈이 전쟁에 나서겠다?”

“사조님은요.”

현종휘가 처음으로 한 말대답에 백무량의 눈이 커졌다.

“뭐?”

“사조님이야말로 곤륜에서 가장 귀하신 분이 아닙니까?”

“…….”

궤변이었다.

천의를 이은 이상, 마교와의 싸움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녀석이 저렇게 말하니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 하하하…… 이제 머리가 굵었다고 제법 입심이 강해졌구나.”

“사조님.”

“송 노야께서 칭찬 좀 해 주셨다고 고수가 된 것 같으냐?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다. 지금 네 수준으로는 철혈공을 익힌 마교도 하나 이기지 못할 거야.”

“……잘 보십시오.”

현종휘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걸음에 추억이 있었다.

백무량을 깜짝 놀라게 했던 곤륜의 삼보.

바람을 담고, 돌풍을 일으키는 걸음이 발아래에서 껑충 널뛰며 구름을 자아냈다.

“…….”

백무량은 묵묵히 표정을 굳혔다. 어떤 무공을 펼치든 입을 꾹 다물 생각이었다.

필시 그러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제 변천승운입니다.”

검을 뽑은 현종휘가 발을 놀렸다.

대성을 이룬 운룡대팔식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점을 찍었다.

단순히 비유가 아니라, 태청신공의 공력이 존재했다.

점으로 이루어진 계단 혹은 기운.

그 위에 현종휘의 검이 휘둘러졌다.

“……아.”

삼보를 운룡대팔식에 뒤섞어 점으로 만든 것일까?

추억이 아스라한 곳에서 터졌다.

쌓고, 휘돌고, 몰아치는 바람이 현종휘의 검에 겹겹이 쌓였다.

그와 동시에 구름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곤륜의 훌륭한 무학이었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을 참았다.

자신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조차 모른 채 무정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겨우 그것뿐이냐? 남을 죽이지 못한다면 겨우 검무에 불과한 것이다!”

억지라는 것은 백무량이 알았다.

아마 무공을 펼친 현종휘도 알 터였다. 큰 목소리로 따져도 이상하지 않았고, 감내할 각오도 있었다.

하지만 현종휘의 대팔식은 점을 찍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텅, 텅, 텅!

허공을 세 번을 걷어차고서 구름 위로 올라섰다.

한순간 정검세(正劍勢)를 취하고서 머나먼 절벽을 보았다.

“……그렇구나.”

백무량은 현종휘가 무엇을 어떻게 펼칠지 깨달았다.

그토록 아낀 동생이 펼치겠다는 변천승운.

그 정체는 곤륜파의 상승 무학과 옛 추억을 조화롭게 뒤섞은 경천의 초식이었다.

“보십시오.”

점에서 일어난 바람이 수십 갈래로 퍼져 구름을 불러오고, 그 구름은 태청신공의 공력에 적셔져 검게 일변한다.

구름을 휘감은 검이 완전히 검게 물들었을 때.

현종휘는 머나먼 절벽을 향해 내질렀다.

“저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콰콰콰콰!!

곤륜산맥의 절벽 하나가 무너지는 광경이 백무량을 감동하게 하고, 다른 제자들을 압도했다.

땅바닥에 착지한 현종휘가 부드럽게 웃었다.

“얼마나 노력하였는지 아십니까, 형?”

“……옛날 생각을 나게 만드는구나.”

백무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전, 보름.

그동안에 서로를 편하게 불렀다.

그런 때가 있었다.

“각오는 된 거겠지?”

“예.”

“……그래, 성한이랑 같이 챙겨서 와라.”

백무량은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

호광성, 무림맹.

한창 떠들썩해야 할 곳에서 묘지와 같은 음산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유야 간단했다.

“……군사, 이 정보가 유출된 적은?”

“없습니다.”

“하아.”

남궁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파일방의 장로를 숨긴 모처에 또다시 가면을 쓴 괴한이 침입할 줄이야.

다행히 이번에는 모두 경상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자존심을 구긴 셈이고, 정보가 바깥으로 샜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균열이 생기고 말겠지.’

가면을 썼다는 그놈이 노린 게 그것이리라.

척준환에게 중상을 입힌 놈이 아무도 죽이지 못했다는 건 어딘가 이상했으니까.

‘물론 다른 무인일지도 모르긴 하지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때 청라는 어디 있었지?”

“잠시 출타했다곤 하지만, 통천옹께서 말씀하시길 극마에 가까운 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극마라.”

청라가 가진 공력은 무색무취였고, 마공의 낌새는 전혀 없었다.

마기란 숨기고 싶어도 드러나기 마련.

남궁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일이 쉽게 풀리나 했더니 허탕이군. 괜한 사람을 의심한 건가?”

“일단은 구천신검을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땐 너무 늦을지도 몰라.”

“……그야 그렇지요.”

지금 당장 곤륜산에서 출발해 말과 십 성 공력의 보신경을 병행한다고 한들 일주일이 걸린다.

백무량이라면 조금 더 빠르겠지만, 그 시간이면 모든 게 끝나리라.

“구파일방의 장로를 한꺼번에 죽이려고 했던 놈이다. 언제 어디서 무림맹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마교가 나타난 이후로 두통이 끊이는 날이 없다.

약을 씹어 먹은 남궁진이 제갈후에게 말했다.

“청라를 포함해서 호광성에 모습을 드러낸 고수 모두를 감시해라.”

“인력이 부족합니다.”

“상황이 이러니 개방과 중소 문파에도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겠나?”

강호가 달린 문제에 수단을 따져선 안 된다.

그러다 남궁진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다.

‘혹시, 만약에라도 무림맹에서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죽는 일이 벌어진다면…….’

은원에 집착하는 강호인의 생리상, 마교와 대전쟁을 준비하는 것보다 먼저 무림맹에게 죄를 추궁하리라.

남궁진의 목소리에 힘이 없어졌다.

“외나무다리 위에 서 있는 것 같구나.”

“…….”

제갈후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조용한 것이 참 좋다.”

위문엽은 곤륜산에 있으면서 쌓인 불안과 짜증을 고독하게 다님으로써 해소했다.

그래도 뭔가 아쉽기는 했다.

어린 막내 노릇을 하면서 착한 도사들을 골려 먹는 재미가 쏠쏠했으니까.

‘그거랑 구천신검한테 무공을 배우는 걸 비교하면…… 음, 나오길 잘했군.’

솔직하게 말하자면 은인이었다.

그런데 가르치는 방식이 워낙 괴팍하고 감정적이라 존경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적당히 감사하고, 은혜를 갚으면 되는 정도?

위문엽이 생각하는 ‘사부’란 딱 그 정도였다.

“이번에 또 마교랑 엮이지는 않겠지? 에이, 설마.”

그땐 상대가 오합지졸이라 아녀자를 지키면서 싸울 수 있었지만, 한번 실력을 드러냈으니 더욱 강한 놈이 찾아올 게 뻔했다.

위문엽이 생각하는 마교의 강자란 단 하나.

‘칠성교주라…… 불안정했을 때면 몰라도, 지금은 이길 수 있을지도?’

킬킬 웃으며 검갑째로 이리저리 휘둘렀다.

칠성교주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으나 상상으로 싸우는 건 쉬웠다.

어쨌든 자기보다 약할 테니까.

그렇게 위문엽의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던 순간이었다.

“설마 하면 진짜 이루어진다더니만.”

위문엽이 혀를 가볍게 찼다.

수십 명의 마교도와 눈빛이 흐리멍덩한 무인들.

전자는 오합지졸이었으나 후자는 만만치가 않았다.

한때 강호에서 신진 고수라고 불리던 자들.

그들이 칠성교의 주술에 걸린 채 맹목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인형으로 사느니 내가 숨을 끊어 주는 것이 사리에 맞겠지.”

곤륜산에서 배운 태청신공의 위력을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마음을 긍정적으로 고친 위문엽이 검갑에서 검을 뽑자, 허공에서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났다.

“야차가 아니신가?”

“…….”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호광성으로 가는 거라면 내가 용납하지 못할 것 같은데.”

“……허.”

위문엽이 실소를 터트렸다.

“누군지 몰라보라고 그딴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데, 나 같은 놈은 워낙 쩨쩨해서 말이야.”

“무슨 허세를…….”

“청라, 이놈아.”

한껏 여유롭기만 하던 남자의 어깨가 순간 굳었다.

위문엽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사실은 잘 모르는데 낚아 본 거야. 찔려 하는 걸 보니까 맞는 모양이네.”

“……놈!”

“근데 전부터 좀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긴 했어. 얼마나 싫었으면 남천보다 더 좆같다고 기억했겠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기도.

걸핏하면 사람을 얕잡아 보는 행태와 무인답지 않게 손목을 내미는 모습.

위문엽은 청라를 딱 한마디로 요약했다.

“넌 무인보다 남색을 파는 게 어울려.”

……으득.

이빨을 꽉 앙다문 청라가 사이한 기운을 흘렸다.

그러자 마교도를 비롯한 무인들이 위문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걸 본 위문엽이 빙긋 웃었다.

“역시, 내 말은 틀린 적이 없어. 화내는 방식까지 구역질이 나오네.”

콰콰콰!

위문엽의 검에서 거대한 와류가 솟구쳤다.

마교도와 무인을 모두 처리하기까지 한 식경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 네 차롄가?”

위문엽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사납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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