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39화 (239/275)

무명 (5)

구름 한 점 없이 해가 청명하게 제빛을 드러내는 날.

곤륜산에서 보기 드문 날씨였다. 검해에 기거했던 옛 선배 둘이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날씨.

그렇게 화창한 날씨 아래.

그들의 유지(遺志)를 지키러 가는데 생각이 복잡했다.

‘만일 내가 실패한다면 많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라지겠구나.’

남 일 같지 않다.

그 소회가 백무량의 가슴속에 먹먹하게 자리했다.

하물며 현노윤에게 송현의 말을 전해 준다고 한들, 그가 제대로 이해해 주겠는가?

“쩝.”

혀를 가볍게 차곤 고개를 도리질했다. 고민하기보단 직접 부딪쳐서 전하는 것이 바르다고 여겼다.

백노 송현.

그야말로 망설이다가 뜻을 전하지 못하고 가 버린 선배였으니까.

전철을 반복할 순 없다.

고민을 끝낸 백무량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고된 세월을 겪고 삭아 버린 목소리에 야트막한 반가움이 어려 있다.

현노윤이 빙긋 웃으며 모습을 드러내니 백무량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과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후배에게 옛이야기를 꺼내서 무슨 소용일까?’

괜히 심기만 어지럽히는 것이 아닐까.

백무량은 곧바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던 것을, 어색하고 궁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속으로 삭였다.

“다른 제자들은 잘 수련하고 있나?”

“그야…… 종휘가 모범이 되어 제자들을 잘 다스리고 있지요. 아직 몇몇은 사조님의 실존을 의심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하하, 그건 그렇지. 내가 제자였으면 안 믿었을 거야. 대사형이 사실은 옛 사조라니.”

“아직도 종휘한테 대사형이라고 부르는 걸 실수하는 아이가 많습니다.”

“그것도 그런가.”

대화를 이어 가면서 현노윤의 상태를 조금씩 살폈다.

제아무리 산에서 단련했다고 한들 너무 늙은 탓에 등이 굽어 가고 있는 데다, 얼굴이 상하는 것이 보였다.

‘태청신공으로 전신을 한번 깨끗하게 해 줄 때가 되었나.’

아직은 곤륜파에 현노윤 같은 지주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현종휘는 현노윤의 상실을 쉬이 털어 낼 수 없을 터였다.

백무량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현노윤이 ‘읏차’ 소리를 내며 등을 폈다.

이에 백무량이 반사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내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아무리 사조님이래도 장문인의 약점을 그리 살피시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허허.”

“……하하.”

“사조님.”

“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

“사조님께서 수련을 제쳐 두고 여기까지 오신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요.”

백무량은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을 이어 갈 순 없었다.

자신에게 답을 바라는 무언의 눈빛이 너무나도 강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등이 굽어 있던 노인 같지 않아서.

그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잠시 위로 들었다.

그마저도 쉽진 않았다.

날씨가 너무 밝았다.

그래서 현노윤에게 하기로 약속한 말을 입에 담았다.

“송현 선배에 대해 아느냐?”

“……압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현노윤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아주 잠시, 대답을 늦게 했을 뿐.

백무량은 그의 옆까지 다가가서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전에 말했었지, 나에겐 곤륜의 무학이 담겨 있는 심상이 있다고 말이야.”

“예.”

“그곳에 백노라는 선배가 계셨다.”

백무량은 검해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백노에 관해서는 빠짐없이 말했다.

냉정했던 일면, 강호의 무공에 해박했던 지식, 환영진을 구축할 정도로 깊었던 기관진식에 대한 이해.

그때마다 현노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웃거리기도 했다.

자기가 아는 송현과는 다르다며……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냐고 은근슬쩍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자리에 앉아 있던 백무량은 볼 수 있었다.

뒷짐을 진 손에 불거진 힘줄, 핏기 없는 혈색.

곤륜산에서 휘도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마음을 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듯 위태했다.

“선배가 보시기에 장문인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무엇이?”

“저는…… 글쎄, 도사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것도 이렇게 늙은 도사가 입에 올릴 말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현노윤이 힘겨운 말을 토해 냈다.

“원망했었습니다. 학식이 그리 깊었던 장문인께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야속했습니다. 다른 어르신은 호광성 같은 곳으로 가서, 따순 곳에서 배불리 먹으며 빈객 노릇을 하고 있을 거라며 빈정댔지요.”

“…….”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종휘를 먹일 젖을 동냥하고, 운산보에 사정하느라 무릎이 닳을 때마다 계속…… 원망했지요.”

현노윤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화창했었냐는 듯, 구름이 떼를 지어서 햇빛을 가렸다.

저녁이 되어 가는 얕은 어둠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현노윤의 표정은 백무량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원망해도, 갑자기 나타나 주리란 희망도 조금은 있었지요. 신비했던 장문인이었습니다. 사조님께서 말씀하신 주백천이라는 선배처럼 말입니다.”

“……그랬구나.”

“하면 다시 묻겠습니다. 사조님이 보시기에 선대 장문인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백무량은 눈을 잠시 감았다.

검해에서 있었던 일과 무명협행에서 봤던 송현의 기록.

그가 마지막으로 부탁을 남기고 사라졌을 때 보인 웃음.

그것을 동시에 떠올리고서, 생각난 그대로를 말했다.

“괴로워했다.”

“……?”

“천의를 이루기 위해 행한 길에 많은 후회를 품고 있었다. 단지 검해에 거하면서 기억을 잃었을 뿐이고, 되찾고 나서는……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저에게 말입니까?”

“그래.”

“…….”

대화가 끊겼다.

그러나 어느 쪽도 이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을 감거나,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해묵은 감정과 기억을 풀어 가는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현노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과를 받아 주어야 대인(大人)이겠지요?”

“……너한텐 갑자기 곤륜에서 하산한 전대 장문인이 아니냐.”

“하지만 천의를 행하기 위해 조용히 떠나신 게 아닙니까?”

현노윤은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송현이 남긴 사죄를 받아들여야 대인이라느니, 천의를 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난 것이라느니.

이유를 만들어 가며 묻는 모습이 백무량에겐 애처롭게 들렸다.

그래서 짧게 말했다.

“원망하는 게 뭐 어때서 그러냐?”

“……예?”

“어떤 거창한 뜻이 있든, 망할 사문이나 어린아이들을 두고 떠난 것은 맞지 않느냐? 솔직히, 나도 전해 달래서 전해 준 것뿐이야.”

“……흘흘.”

백무량은 모든 무게를 내려 두고서, 현노윤을 오래 지켜본 선배로서 조언했다.

“대승적인 관점에서는 송현이 옳겠지. 하지만 악화 일로를 달리던 곤륜과 너를 두고 간 것까지 부정할 순 없어.”

“…….”

“어떠냐, 좀 트이느냐?”

“예.”

현노윤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몹쓸 어르신이지만, 좋은 일을 하고 가셨지요.”

“하하.”

“나중에 만나면 멱살이라도 잡아야겠습니다.”

“뭐 그런 불길한 소리를! 사조 앞에서 죽음을 논하느냐?”

그렇게 농담을 던지는데 물방울 하나가 백무량이 앉은 자리에 툭 떨어졌다.

구름이 모여 어둑어둑해진 하늘.

비구름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비가 오려나 보다. 안에서 차나 마시자꾸나.”

“감사합니다.”

“뭘 감사해? 오래간만에 비싼 찻잎 맛이나 보자.”

그날 밤.

백무량과 현노윤은 밤새워 곤륜의 미래와 마교와의 싸움에서 패배할 경우를 논했다.

***

“정혜 신니는?”

백무량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물으니 철유가 곱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사조님께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보나 마나 감사하단 거겠지. 일단은 나한테 주고 가거라.”

“예, 사조님.”

“아, 그러고 보니 성한이는 어디에 있느냐?”

“성한이라면…… 유성한 말입니까?”

“그래.”

그 말에 철유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유, 성, 한!!”

공력을 한껏 담아 고함을 내지르는데, 한두 번 해 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백무량은 유성한이 어떤 말썽꾸러기인지 대강 알아차렸다.

“많이 골치냐?”

“……그게.”

철유가 잠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사고 쳤냐?”

“이번에는 어디를 뒤집고 다녔대?”

“대사형의 수련을 나무 위에서 훔쳐보고 있었겠지. 요즘은 그러고 다니잖아.”

검해에서의 수련 이후로 예민해진 오감이 모든 목소리를 잡아챘다.

재능이나 노력은 인정하지만, 도사답지 않은 말썽꾸러기.

어찌 보면 강해지기 위해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녀석이었다.

‘보타문에서 무력하게 지켜만 봤던 게 기억에 남았나?’

유성한의 눈물을 보았던 백무량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제자들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디를 뒤집고 다녔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답.”

“아, 그게…… 사조님께서 신비한 심상을 품고 있단 말이 도니까…… 성한이가 곤륜산맥을 뒤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자기도 기연을…… 얻고 싶다고.”

“푸하하!”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참으로 소년다운 재치이고, 상상이 아닌가!

그렇게 웃고 있는데 어느새 유성한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시도는 나쁘지 않았잖아요?”

폭소할 일까진 아니라는 듯, 뚱한 표정을 지은 유성한.

그 모습을 보니 유성백의 후인이 맞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유 선배는 행동 하나하나에 품위가 있었는데.’

유성한이는 오히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닮아 있다.

백무량은 묘한 기분이 드는 걸 걷어 내고서 유성한의 팔목을 잡아챘다.

“뭐, 뭐예요?”

“잠깐만 있어 봐라.”

백무량은 실낱같은 영기로 유성한의 전신을 살폈다.

“……과연.”

천주를 창안한 유성백.

그의 전신은 별다른 외공을 수련하지 않았음에도 근골이 무척 단단하고 강한 탄력이 있었다.

그의 후손인 유성한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발전해 있었다.

‘금기를 수련하는 보타문의 여승들과 오래 있었던 탓인가?’

피부를 타고 스며든 금기가 근육의 구석구석에 자리해 있었다.

저 상태로 태청신공을 수련하면 금기와 상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룰 터.

백무량은 유성백이 해묵은 망념을 버리고서 승천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철유야.”

“예, 사조님.”

“당분간 성한이는 내가 데리고 있으마.”

그 말에 왠지 모르게 철유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 아, 아니…… 정말로 그러시겠습니까?”

“뭐, 길지는 않을 거다. 사나흘로 끝내마.”

“……예.”

철유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유성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왜 사조님과 있어요?”

“뛰어난 무학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싫으면…….”

“아닙니다! 좋은 터를 제가 압니다!”

갑자기 앞장서서 걸어가는 유성한.

백무량은 그 뒷모습을 보곤 피식 웃으며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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