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4)
백노는 백무량에게 짧은 말을 남긴 채 성불했다.
정작 검해의 주인인 백무량도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저 기억을 되찾은 그가 안식을 찾았다는 것을 알 뿐이었다.
다만, 홀로 남은 무명은 무심할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가라앉히고 있었다.
[자기 혼자 멋대로 가 버렸군.]
홀연히 떠나 버린 백노의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원망하지는 않았다.
백노, 송현이 걱정하던 것은 곤륜파의 미래와 현노윤에 대한 미안함이었으니까.
그 미련을 훌훌 털어 내고 떠났다면 족한 것이다.
‘하면 나는, 나에게 남은 미련은 무엇인가?’
무명은 백무량의 눈을 통해 아미파의 장문인, 정혜 신니의 낯을 보았다.
아주 먼 옛날에 마주했던 여승과는 다른 사람이지만, 어쩐지 닮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입술을 떼었다.
[후배야.]
‘듣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너무 섭섭하게 굴었지?]
‘섭섭하다니요, 아주 개…….’
[사소한 건 넘어가고, 나도 부탁이 있다.]
‘……후우.’
그 말에 백무량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명에게 들리게끔.
하지만 그가 뒤이은 말에 서둘러 말을 바꾸어야만 했다.
[아미복호검의 진수(眞髓)를 배워 다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다는 겁니까?’
[……떠올리지 못한 것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무명의 목소리에 회한이 있었다.
[너에게 가르쳐 준 것은 검해에서 단련한 것. 그 전에 익히고 있던 아미복호검은 조금 달랐다.]
‘…….’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의 아미복호검.
그 무공에는 분명 손색이 없었지만, 아쉬운 점이 많이 산재했다.
유성백의 천주나 부동세, 무극세처럼 대체할 수 없는 절세의 무공이 아니었으니까.
‘하긴.’
한 시대를 풍미한 상승 고수의 무학치고는 어딘가 엉성하긴 했다.
수경은 의념으로 몸을 조금 더 빨리 움직일 뿐이요, 팔첨은 다른 무공에도 있는 개념이었으니까.
백무량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숨을 깊게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잠시 심상 수련을 취할 테니, 호법을 서 주겠나?”
“당연하지요!”
“이 수련이 끝나면 후배에게 아미복호검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
정혜 신니가 깜짝 놀란 숨소리를 내뱉는 동안, 백무량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제 입을 빌려서 아미파의 후인(後人)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지 않으셨습니까?”
백무량은 양손을 가볍게 털며 물었다.
무명협행.
그 서책을 쓴 사람은 맥락상 ‘장문인이 된 여승’일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무명에 대한 기록을 조금 더 남겨 놨을지도 몰랐다.
이 무애한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고 싶었을 터인데.
무명의 표정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아미파에 제대로 된 아미복호검을 남기는 것으로 족해.”
“……그렇습니까.”
백무량은 무명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검해의 주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미복호경이 유출되었던 사실이 밝혀지면, 옛 여승의 명예가 실추돼서인가.’
그걸 떠올린 순간, 무명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함부로 읽지 마라.”
“……!”
후웅!
무명의 일 초가 순식간에 목덜미를 점한 채 휘둘러진다.
백무량은 깜짝 놀라 커진 눈으로 무명이 휘두른 수도(手刀)의 궤적을 읽었다.
‘대체 어떻게?’
의문을 삼킨 채 허공을 한두 번 걷어찼다.
운룡대팔식의 보보는 허공을 자유롭게 노니니.
거리를 벌리는 것이야 쉬운 일이었으나, 무명의 연격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쉽지 않다!’
백무량은 이를 까득 앙다물며 무명의 수도를 발끝으로 내리쳤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했다.
“……!”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양옆으로 퍼지는 수도의 잔상.
발끝은 허공을 가르고 몸은 아래로 쏠린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단순한 잔상으로만 끝나지 않으리라.
육감이 무명의 전신을 읽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시선, 뒤틀어지는 발목의 비골근, 천중수 아래서 싸웠던 경험.
세 가지가 합일을 이룬다. 본래라면 쳐 내지 못했을 무명의 새로운 일수가 훤히 보였다.
“후우.”
백무량이 숨을 고르며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시퍼렇게 물든 안광이 무명의 허와 실을 꿰뚫는 동안 팔을 뒤쪽으로 젖혔다.
……쿠르르!
태청신공으로 이루어진 청운이 검으로 유형화하는 순간.
무명이 반보를 앞으로 내디뎠다.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집념과 독심은 검해에서 한 수련에서 보지 못했던 사나운 광기였다.
‘또 무언가 있구나.’
삼단전의 온전한 합일과 조화.
천주가 불러오는 감각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정면에서 걸어오는 건곤일척의 승부라.’
백무량은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상식적으로는 피하는 것이 맞았다. 무명 정도나 되는 상승 고수의 절초라면 필시 필살의 의지가 담겨 있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은 무인이었다.
상대가 강하다고 하여 피한 적 없는, 외길을 걸어온 무인!
꽈득.
검을 쥔 손아귀에 담긴 것은 단순히 힘과 공력뿐만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자존심 또한 존재했다.
무명이란 상승 고수와 건곤일척의 승부에서 승리하겠다는 선명한 각오.
그것을 느낀 것인지 무명이 피식 웃었다.
“이래서, 너는 도사보다 무인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남이야!”
상식적으로 어떤 승려가 후배를 천중수 폭포 아래서 수련시키겠는가?
백무량은 그 과거를 잊지 않았다.
무명을 봐주는 일 따윈 추호도 없다.
콰르르……!
한껏 끌어올린 태청신공의 공력이 오른팔 경맥, 수양명대장경을 타고 흘렀다.
검해의 주인이 발하는 용력에 주변이 크게 일렁이는 듯했다.
“힘자랑은!”
무명이 짧은 기합성을 내질렀다.
뒤이어 그가 만들었던 잔상이 수십 개로 분화하더니, 순식간에 여덟 방위를 점했다.
‘저것인가!’
그가 가르쳐 주리라 말한 팔첨의 진면목.
그것을 목도한 백무량이 폐부에 가득했던 숨을 내뱉었다.
그릇에 무언가를 담기 전에 비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호천풍연, 천간투.’
젖혔던 팔을 앞으로 휘둘렀다. 쥐고 있는 검에 청운의 물결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물결은 곧 폭풍이 되어 하늘을 꿰뚫으리라.
천간투라는 이름, 그대로.
콰콰콰!
한데 모인 물결이 무명을 향해 솟구쳤다.
이에 무명은 여태까지 잊고 있었던 검을 꺼냈다.
“……심검인가!”
두 검사의 격돌을 지켜보던 심천검이 외마디 감탄성을 흘렸다.
가히 신검합일을 이뤘다고 자평하는 무명.
그가 펼치는 심검은 호사가나 무인 들이 흔히 떠올리는 것과는 달랐다.
여덟 송곳.
거기에 각자 다른 결(訣)이 담긴 무학이 담겼다.
공동파의 대주천복마검과 비슷하나, 더욱 깊은 감정이 있었다.
‘이래서인가.’
백무량은 본 순간 이해했다.
무명의 일생을 알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가 아미복호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고 말했는지, 왜 배워 달라고 말했는지.
‘기억을 되찾기 전에 보여 준 수경과 팔첨은 공허한 것이었구나.’
수경(水經)은 흘러간 시간에 대한 무상함이요, 팔첨(八尖)은 과거를 되씹고 후회하는 무인이 만들어 낸 송곳일지니.
참으로 기이하고 기괴한 무공이었다.
공력을 운용해서 펼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나 기억에 좌우되는 강함이라.
‘검해가 품을 수 있을까?’
백무량이 호기심을 품은 그때.
꽈꽝!
천간투의 와류가 무명의 팔첨 앞에서 허물어졌다.
그러나 뒤이은 공세는 없었다.
무공을 보는 것만으로 요체를 알아차린 백무량과 얼마 남지 않은 회한을 청산한 무명.
둘의 시선이 마주침에 다른 망령들도 침묵했다.
“어떠십니까, 되찾은 기억은?”
백무량이 물었다.
“후련하지는 않아. 그대로 귀신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놈이 먼저 도망친 바람에 따지질 못하게 됐어.”
무명은 피식 웃었다.
“한 번 더 보여 줄 필요는 없겠지?”
“제가 워낙 잘난 사람이라서요.”
“그렇겠지. 나랑은 다르게 천의를 제대로 이은 도사님이시니까.”
“하하.”
이후로 백무량과 무명은 사사로운 대화를 나눴다.
마교나 무공, 과거에 대한 건 아예 잊은 사람들처럼.
같은 동네에 사는 형, 동생끼리 대화를 나누듯.
그러다 천중수 아래서 있었던 일을 꺼냈다.
“그때는 너무하지 않았습니까?”
“뭐, 생전의 기억을 잊은 상태였으니까…….”
“허!”
“그러는 너는 나한테 복수하겠다고 무작정 패려고 하지 않았냐?”
“먼저 당했으니까 갚아 주려고 했던 거지요.”
“……흐흐.”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 무명이 별안간 하늘을 보았다.
“너도 느꼈겠지만, 도문의 무학에는 서로 비슷한 점이 있어. 당장 네가 가진 검해의 심상에 다른 무학이 녹아 있지 않더냐?”
“그렇지요.”
“모두 네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냐?”
“…….”
그 말에 백무량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부터 저런 생각을 자신도 품고 있었던 터다.
예컨대.
공동파의 경파와 화산파의 화검은 같은 근본을 지니고 있었다.
변화.
무당파는 그 변화를 조율할 수 있는 태극의 이치를 품고 있으며, 곤륜파의 검해는 모든 무학을 품을 만큼 넓은 그릇이었다.
이것을 잘 조화시킨다면 하나의 무학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정리하던 차에 무명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망검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뭡니까?”
“마물을 가까스로 몰아낸 도문들이 각지에 흩어지기 전에 그놈의 약점을 노릴 무공을 창안하리라 약속하였다고.”
“…….”
“나 또한 그놈을 숭앙하던 사교를 죽이기 위해 아미복호검을 만들었지. 공동파의 도인과 얼핏 비슷하지 않더냐? 수경과 팔첨 말이다.”
“그렇지요.”
“너라면 잘 조화시킬 수 있을 거야. 도움을 줄 사람도 많겠지, 나와는 다르게.”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심천검과 주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사라진, 곧 사라질 망령과는 달리 끝까지 백무량을 지켜봐 줄 동반자였다.
백무량은 그들과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앞으로 점창과 해남에도 가 봐야겠군요.”
“하하, 가 봐야 문전박대만 당하겠지. 다른 도문이 너무 친절했던 거야.”
“제가 앞장서서 칠성교주와 싸우겠다고 그러면 당연히 내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끌끌, 성격 한번 지랄맞은 후배구만.”
무명은 송현처럼 후련하게 웃어 보이진 않았다.
다만 앞으로 찾아올 천하의 혼란함과 미련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아미파는…… 네가 잘 챙겨 줄 거라 믿으마.”
“부탁하지 않아도 아미복호검을 돌려줄 겁니다.”
“그래, 고맙다. 괜한 부담 주는 거 아닐까 걱정스러웠는데.”
“그런데 어떻게 알아차린 겁니까?”
“뭐를?”
“선공을 취했을 때 말입니다.”
“아, 그거 말이냐.”
무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이 마치 후배를 곯려 먹으려는 성격 나쁜 선배처럼 보였다.
“좀 더 정진하면 알게 될 거다.”
“아니, 그게 무슨……!”
“천이통(天耳通)을 가진 도사에게 직접 배우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에 백무량은 한 도사를 떠올렸다.
화산파, 매화동인 진무월.
다시 매화비원에 오라고 말하였는데, 설마 귀신이었던 시절에 그와 인연이 있었던 걸까?
“선배!”
“다음에 더 인연이 있다면 보자꾸나.”
무명은 그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이제 검해에 남은 망령은 둘.
심천검과 주백천뿐이었다.
***
“검을 쥐어 봐라.”
“……예?”
“아미복호검을 가르쳐 주마.”
정혜 신니가 눈을 크게 뜬 채 검갑에 손을 가져갔다.
두 시진 뒤.
백무량은 명상에 들어선 정혜 신니를 내버려 두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곤륜파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